여성들이 할머니가 되는 계기는 나이와 관계없이 결혼한 자녀가 출산을 시작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조혼이 일반화되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40세 미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통이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결혼을 해야 어른 대접을 받고 또 빨리 할머니가 되어 아랫대를 두어야 집안의 어른으로서 위세와 존경을 누릴 수 있었던 시대에는 할머니라는 호칭은 여성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이 컸다.
부모에 대한 효가 강조되는 만큼 대를 이은 아들의 어머니, 나아가 할머니로서 한 집안에서 할머니의 지위와 위세는 당당했다. 지금 60, 70대는 ‘호랑이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지난 연말 텔레비전 드라마 ‘바람은 불어도’에서 ‘기세등등’한 할머니·시어머니역을 맡은 연기자가 연기대상을 타는 것을 보았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드라마에 나오는 기센 할머니를 본 다른 할머니들이 그대로 따라하는 통에 집안에 갈등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이 할머니의 모습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할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핵가족화한 집안에서 추락한 할머니의 울분을 대변해주는 속시원한 부분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할머니들에게 인기가 더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비친 이 할머니의 모습은 ‘당당한 할머니’의 모습보다는 그런 할머니를 희화화한 부분들을 보고 더 재미있어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바람은 불어도’의 할머니의 세상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며느리 위에 군림한 채 시어니 -집안어른- 할머니라는 보도(寶刀)를 종횡무진으로 바람처럼 휘둘러대는 돈키호테 같은 할머니를 보여 주고 있다는 느낌이 많기 때문이다.
가족과 연결시켜 본 여성의 할머니 됨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여성들 자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할머니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다. 그런데 왜 유독 사람들은 특히 여성은 할머니가 되어도 청춘같이 보여야 한다는 ‘자연스럽지 못한 생각’을 정상적인 여성의 심리인 양 여기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는 ‘나이든 처녀’, ‘다늙은 여자’, ‘쭈구렁 바가지 할망구’ 등으로 여성을 ‘육체’만으로 평가하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여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일쑤다.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은 ‘육체’만 있는 인간 아닌 ‘여자’로 치부되고, 심지어 나이 어린 청소년 여성을 영계로 동물화하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행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농담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왜 우리 사회는 여성을 직종, 계급, 주부, 일하는 여성, 또는 어린이, 대학생을 막론하고 모두가 ‘육체로서의 여성-성적 존재’로만 생각하면서 남자와 똑같이 육체와 정신을 지닌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못된 병에 걸린 것일까?
아주머니에서 할머니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있는 여성들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여기 저기에서 경험하면서 정체감의 혼란으로 당황할 때가 있다고 한다. 어떤 여성은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한께 탄 어린이가 어느 날 자신을 보고 할머니라고 부를 때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은 아직 할머니라고 불릴 만큼 늙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할머니가 되었다니!’라는 느낌이 인생을 다 살았다는 서글픔으로 다가오더라고 했다.
어떤 여성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할머니’라고 한다. 여성의 할머니됨에 대한 사회 주변의 시선이 얼마나 부정적이었으면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일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여성 자신의 문제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여성 자신들도 혹시 자신을 ‘육체’로만 평가하는 왜곡된 인간관을 가진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을 해본다. 여성의 ‘젊은 육체’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늙음은 인생주기에서 자연스럽게 오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그러한 자연적인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또는 할머니가 된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감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느냐에 따라 여성들의 삶의 내용은 많이 달라질 것 같다.가족의 대접이나 사회의 인식도 문제이지만 여성들 자신들이 자신을 주체적인 여성으로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처님 말씀에 사상(四相)을 여의라는 가르침이 있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상과 나라는 상, 그리고 나이가 먹었다는 상과 나는 중생이라는 생각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성들은 할머니라는 사회적인 역할에 얽매여 때로는 수자상에 가려서 스스로가 ‘다 늙은 사람이 무얼 이런 것을 다하랴’하는 생각으로 ‘할머니’로서만 살려고 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 같다. 할머니는 할머니답게 행동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속으로는 호기심이 있어도 눈썰매장에 가서 썰매를 못 타게 하는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승들은 딸답게, 아내답게, 어머니답게, 그리고 할머니답게 살다가 보면 ‘나는 어디로 갔지?’라는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딸도, 아내도, 어머니도, 그리고 며느리, 시어머니, 할머니도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서로 잊지 말고 사는 자세가 우리들에게는 필요하다. 여성불자의 수행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가 또는 인간이 우리에게 씌운 모든 인위적인 것들을 벗어던지고 자연 가운데 존재하는 한 생명체로서의 나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는지.
여성의 인생주기 중에서 이제 아주머니에서 할머니시기로 진입하는 여성들이야말로 정말 자유롭다는 생각을 한다. 자녀들도 결혼을 시켜 사회로 보내어 이제는 어머니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없는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건강관리를 하면서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다시 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다시 맞고 있다고나 할까? 그동안 중독되어 있던 가족, 자식 중독증(집착)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 또는 이웃을 위해 새로운 삶의 내용을 짜나갈 수 있다고 본다.
육체로서의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할머니의 삶은 역할과 책임에 눌려 살아야 했던 젊은 날에 비해 훨씬 더 풍요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삶의 여성학] 할머니에 얽힌 생각
- 관리자
- 승인 2009.08.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삶의 여성학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