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처라 함은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한다. 곧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다.
세간의 범부로서 출세간의 붑럽을 배우려면 범부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주관을 근본적으로 바끄어 놓지 않으면 불법을 바르게 배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념처관(四念處觀)은 불교에서 소승과 대승을 떠나서 가장 근본되는 수행 방법이라 하겠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팔만사천의 방편문을 열어 놓으셨으며, 37조도품(三七助道品) 6바라밀 등 우리가 익히 보고 들어온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사념처관은 범부들의 잘못 전도된 생각을 바꾸어, 마침내 우리의 구경목적지요 이상향인 열반으로 나아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경유지라 하겠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아난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며, 무엇을 의지하여 주하며, 육군(六群)비구들은 어떻게 조복하며, 경을 경집할 때는 경 첫머리에 무엇이라고 하오리까?」하고 네 가지를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계율로 스승을 삼으라. 침묵을 지키라. 사념처에 의지하여 주하라.」고 답하셨다.
이것을 보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범부들이 의지해서 수행하는 방법은 사념처관이 가장 적합하고, 수행자들도 항상 사념처를 잊지 말고 관찰해야 된다는 것을 일깨우신 것이다. 범부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주관적인 자기 몸에 대하여 이 몸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관념과 정신적으로 느껴서 받아들이는 작용에 쾌락을 요구하는 감정과 의식의 주체인 마음은 항상하다는 관념과 객관적인 만유(萬有)에 주재적(主宰的)인 실체아(實體我)가 있다는 관념이 있는데, 이러한 관념은 망상집착의 범부들에게 온갖 번뇌로 업을 짓게 만든다.
사념처관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1. 몸은 부정한 것이라고 관한다.
<觀身不淨> 범부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온갖 탐욕과 허영심에 날뛰고 있고 일생 동안 무엇인가를 구하려고 허덕인다. 아름다운 미색, 좋은 음식, 의복, 재산, 권력, 명예 등등 이러한 끝없는 욕망의 근본 동기는 몸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생긴다. 이 애착 탐욕을 제지하지 못하고는 수행을 한다 해도 헛수고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애착 탐욕을 버리는 방법으로 먼저 부정관을 닦는다.
「이 몸은 아름다운 연꽃이나 향기로운 꽃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 몸을 받아 날 적에 부모의 부정한 정혈을 모아서 태어났고 몸에는 온갖 더러운 대소변, 피고름이 있고 갖가지 기생충들이 활개를 치고 있고, 병들어 죽고 난 다음에는 피부가 썪어서 악취가 풍기고 끝내는 앙상한 뼈만 남는다.」
이렇게 관하는 것을 부정관, 고골관(枯骨觀)이라고 한다.
2. 감수(感受)는 괴로운 것이라고 관한다.
<觀受是苦> 우리들에게 감각으로 느끼는 작용은 세 가지의 느낌이 있다. 괴로움의 느낌, 즐거움의 느낌,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녀의 애욕, 자식, 부귀, 소리, 빛깔, 향기, 맛 등의 감수에 대하여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을 즐겁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에는 이별의 괴로움, 부귀는 항상하지 못해서 재난이 뒤따르고 언제나 슬픔이 뒤따르므로 쾌락의 허무함이 요술장이 놀음과 같아서 진실되고 항상한 것이란 없는 것으로 관하는 것을 고관(苦觀)이라고 한다.
3. 의식의 주체인 우리의 마음은 덧없고 일정하지 못한 것으로 관한다.
<觀心無常>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다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 가운데도 가장 잘 변하는 것이 마음이다. 우주 만법이 하나도 항상한 것이 없고 이 몸을 움직이는 마음도 찰라마다 변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한다.
4. 모든 객관적인 법은 불변하는 「나」라는 주체가 없다고 관한다.
<灌法無我> 우주 만유의 현상은 다 인연의 화합으로 이룩된 것이고, 본래 「나」라는 것이 없고 거짓으로 나타난 현상임을 관찰하고 일체가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므로 무아관(無我觀)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신수심법(身受心法)을 부정 고 무상 무아(不淨苦無常無我)의 순서대로 하나하나씩 관찰하는 것을 별상념관(別相念觀)이라 하고 신수심법이 부정 고 무상 무아임을 한꺼번에 합쳐서 관찰하는 것을 총상념관(總相念觀)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