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悟)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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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悟)의 논리
  • 관리자
  • 승인 2009.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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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문답

    1. 어떻게 깨닫는가
  질문 : 불교는 진리를 깨닫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고 깨닫는 방법으로 참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참선에서 어떻게 깨닫는다는 것인지요?
  답 :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불교는 근원 진리를 깨닫는 것이며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고 깨달은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불교믿음의 모두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과 모든 존재의 실다운 모습을 무한공덕 원래로 갖춘 찬란한 불성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체의 근원이며 인간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망각하고 미혹에 빠져들어 온갖 세계를 환작(幻作)하며 그 속에서 생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중생들의 생활입니다. 선은 이러한 중생들이 미혹에서 벗어나 참된 차지 본분을 자각하는 것임을 귀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혹과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의 주체적 주인공이며 만법의 근원자로서의 자기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은 귀하는 물으셨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 중생 세계란 그 근원이 자기 본분을 착각한 망념에 있는 것이며 망념이 분주히 일어나서 중생 세계가 끊임없이 상속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뇌에서 벗어나 망념을 없애는 것이 수행에 무엇보다 요긴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번뇌는 원래 없는 것이므로 벗어나려 하여도 이것이 번뇌요, 이것이 번뇌라 인정하는 것도 물론 번뇌입니다. 번뇌를 끊었다는 것도 번뇌이고 번뇌가 아주 없다는 것도 번뇌입니다. 번뇌란 원래로 없는 것이지만 범부로서는 번뇌에서 벗어나기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원시적이며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체 생각을 모두 쉬는 것입니다. 번뇌가 분분히 일어나서 미혹세계가 분분하다면 번뇌는 쉼으로써 본래의 밝음, 즉 깨달음에 이른다는 논리입니다. 이 방법은 오랫동안 성행한 방법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누구나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비우라’ 하신 것도 이런 뜻에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묵조선(黙照禪)을 제창한 천동정각(天童正覺) 선사는 묵조명(黙照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묵묵히 말을 잊으니 밝고 밝게 드러나누나. 비추어 보니 분명하고 체성이 말끔해라.’ 망념의 구름이 부질없이 일어나서 푸른 자성(自性)의 하늘을 보지 못하고 있더니 묵묵히 망념을 잊으니 원래로 밝은 푸른 하늘이 헌출하게 드러났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야의 활용이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중생이 원래로 법신인데 미혹하여 범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범부의 결정 계기인 미혹이란 무엇입니까 미혹은 착각이 아닙니까. 착각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휘들린 생각대로 보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미혹 중생에게 미혹의 눈을 돌리게 하는 방법으로 미혹이 없는 진리의 태양을 그 눈에 들여대는 방법이라 할는지요 .... 중생이 본래로 불성이며 설사 미혹하여 중생이 되었다 하여도 불성에는 조금도 손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중생 눈앞에 자성본분을 정명에 들여 댈 때 거기서 확연히 자신의 진면목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 자성본분이 이른바 공안(公案)입니다. 이 방법도 고래로 많은 종사들에 의하여 행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방거사가 마조선사에게 물었습니다.
  “만법과 짝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마시는 것을 보아 일러주마!”
  하니 방거사는 이 말 아래 곧 깨달았습니다. 또 한 예를 들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멸도에 드신 뒤 부처님 법을 이은 가섭존자에게 아난존자가 물었습니다.
  “세존께서 존자에게 전하신 것이 가사와 발우 밖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가섭존자는 부처님에게서 법을 전해 받은 신표로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난존자는 가사와 발우가 아닌 법 자체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가섭존자가 대답했습니다.
  “문 앞의 찰간대를 넘어 뜨려라.”
  아난존자는 가섭존가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원래로 이 도리는 생각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7일 간을 궁구한 끝에 깨달았다 합니다.
  위의 말한 것을 정리해 보면 선에서 깨닫는 방법에 2가지가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묵조선이고 또 하나는 간화선(看話禪)입니다. 묵조선은 모든 생각을 다 놓아 또렷하게 자성을 비추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고요히 앉아서 옳든 그르든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온갖 생각을 다 놓아버려 오직 말끔하게 마음을 지어가는 것을 요점으로 삼습니다. 둘째의 간화선은 화두를 간(看)하는 공부입니다. 화두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조의 언구를 한결같이 참구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수행에서 첫째 방법으로는 번뇌가 쉬어 깨달음의 성품을 보게 되고 둘째 방법에서는 번뇌가 없는 것을 알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2. 화두란 무엇인가

  질문 : 화두란 본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깨닫는다는 것입니까?
  답 : 화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합니다. 공안이란 관청의 공문서란 의미를 가진 말인데 범치 못할 법칙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바로 아는 데서 참된 진리가 뛰어나오는 것입니다. 화두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 본질이 불조의 깨달음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격의 연구는 범부의 생각이나 말로써는 어림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히 자신과 불조 진면목을 밝혀낼 길이 열려있는 것이므로 그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법신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화두는 공부인에게 반드시 통과를 요구하는 지상의 관문입니다. 그 관문을 뚫고 나와야 불조를 알고 자신을 알며 법을 알게 되므로 화두를 조사관(祖師關)이라고도 합니다. 화두는 대개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이나 언동으로 구성됩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였다든가 다자 탑존에서 가섭존자와 자리를 나누어 앉으셨다든가 한 고사는 모두 대표적 공안입니다. 또 달마대사가 처음 중국에 와서 양무재를 만났을 때 무재가 묻기를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의 첫째가는 도리입니까?” 했습니다. 달마대사는 “성스러운 것이란 없다.” 하였는데 다시 묻기를 “나와 대화 하고 있는 분은 누구요?” “모르겠다.”
  이것은 달마불식(達磨不識)이라는 공안입니다. 실로는 불조의 언동 모두가 공안인 것입니다.
  공안의 본질이 깨달음 자체의 전면 제시라면 불조의 깨달음을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조의 지혜 안목을 연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 밖의 범부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범부들은 미혹하여 6근, 6진, 6식의 18계에 갇혀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8계가 아닌 18계에서 벗어난 경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도 어림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상대로 논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불조가 보이신 18계가 아닌 절대적 진리 자체를 눈앞에 들여대어 보였을 때 어떻게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어떻게 더듬어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천길 장벽에 맞부딪친 것처럼 꽉 막힐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는 의정의 벽에 맞서게 됩니다. 이것이 범부가 공안을 대할 때의 자세이며 표정이게 됩니다. 그러기에 옛 조사들은 말씀하시기에 공안을 가져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은산철벽 같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진리는 생각 밖의 것이고 말과 논리가 이룰 수 없는 도리이며, 공안은 이 이룰 수 없는 깨달음 자체의 전면제시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론이나 문자로 알려하거나 증거하려 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방거사가 마조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가 무엇입니까”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법은 생명의 법이며 무상의 법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무상생멸 하는 자가 아닌 만법과 상관없는 자가 누구인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거듭 말해서 만법은 18계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방거사는 이 만법이 아닌 자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니 이것은 명백히 불멸의 진리 깨달음 자체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조 스님은 “단숨에 서강의 물을 마시고 오라” 했습니다.
  이 대답은 그 근본 성격이 18계의 법이 아니며 만법으로 인식되는 범부적 의식권 내의 것이 아님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대하는 자는 망념 만법으로 우굴 대는 인식 수단으로는 결코 해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법에 걸려 만법에 갇히고 있던 생명의 눈이 그러한 자신을 박차고 벗어날 새로운 빛을 열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절대 방식으로 존재하는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법의 존재 방식인 절대는 공안이라는 절대를 통하여 그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공안에서 어떻게 깨칠 수 있는가 의심하기보다 공안에 맞붙어 정진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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