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으로 가꾼 성지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화성군
2007-11-04 관리자
충효사상을 중시한 사회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가 사회질서의 기본이 된다.
나아가 충효를 국가경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면 모든 사회규범과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이것에 의해서 설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조선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병석의 부모를 간호하기 위해 관직을 내놓는 것이 당연히 허용되고 돌아가신 부모의 무덤 곁에서 몇 년씩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 그 당시 선비들이면 누구나 행해야 하는 실천덕목이었다. 사회의 풍속이 이러하니 큰 효자나 열녀, 열부가 출현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인물이 나오는 것은 그 지역의 자랑이었다. 지금도 전국 각지의 마을 입구에 수없이 서 있는 효자비나 효열각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와 반대로 불효자나 불충한 자가 나오면 그 출신지역의 격을 낮추는 벌이 주어졌다. 충청도를 한 때 공청도(公淸道)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이는 충주에서 그 부모를 죽인 자가 출현하여 충주의 격을 낮추고 또한 공주를 그 자리에 대체하여 공주와 청주를 합해 공청도라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사회윤리와 효를 기본으로 움직여 가게 되니 왕 중에서도 효행의 모범을 보인 이가 나오게 되었고 그이가 바로 정조대왕이다.
정조대왕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그 아버지인 영조대왕과 사이가 갈려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기에 일명 뒤주대왕이라고도 부르니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이 당시의 안타까운 마음을 적어 놓은 「한중록(恨中錄)」은 잘 알려진 한글 기록이다.
열한살 때에 아버지를 잃은 정조대왕은 왕위에 오른 뒤에 아버님에 대한 효심을 여러 가지로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우선 사도세자라는 세자의 호칭을 장조(莊祖)라는 왕의 호칭으로 바꾸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묘를 화산(花山)으로 옮긴 후 현륭원-지금의 융릉-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아버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인근에 사찰을 창건하게 하니 이곳이 바로 용주사(龍珠寺)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 곁에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을 창건한 경우 대개 사찰 이름의 첫머리에 ‘봉(奉)’자를 쓰게 마련이니 광릉의 봉선사, 선릉의 봉은사, 정릉의 봉국사가 그런 예에 든다. 그러나 용주사라는 색다른 이름을 얻은 것은 정조대왕이 낙성식 전날 밤에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꿈을 꾸고 이렇게 지었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그 13년(1789년)에 부친의 능을 옮긴 후 말죽거리 · 과천을 거쳐 능으로 오고가는 것이 백성들에게 불편을 준다하여 시흥 ·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5년만에 완성하는데 이 길이 바로 지금의 국도인 것이다.
원래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화산으로 능을 이전할 때에 이곳의 남쪽에는 수원의 옛읍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 수원부를 지금의 수원자리로 옮기고 장차 서울을 옮길 목적으로 수원성을 건축하게 하니 부친의 능과 가까운 곳에 머물면서 자주 왕래하려는 효심이 짙게 배인 정책이었다.
정조가 화산에 묘자리를 정하는 데에는 보경(寶鏡) 스님과 얽힌 일화가 있다. 용주사 인근에는 임금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황리(大黃里)가 있다. 보경 스님은 정조가 신하를 거느리고 왕능자리를 손수 물색하러 다닌다는 것을 알고 이곳에서 임금을 기다리다가 임금의 행차를 만나자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이 너머에 마땅한 능자리가 있다고 진언하였던 것이다.
정조의 신임을 얻은 보경 스님은 성월(姓月) 스님과 더불어 용주사 창건을 주도하게 되니 불교계와 관계의 시주금과 수많은 기술공, 재능있는 인재들이 총동원되었던 것이다.
용주사터는 원래 염거(廉居) 화상이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던 곳이었다.
염거화상이 누구인가?
신라말에 처음 선종을 들여온 도의국사가 경주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양양 진전사에서 40년간 은거하다가 입적하였고 이분의 법을 이은 분이 바로 염거화상이다. 염거화상의 전법제자가 바로 보조체징 스님이니 이 스님이 장흥 가지산에 내려가 보림사를 창건함으로써 드디어 선종의 일문인 가지산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갈양사는 고려초까지 존재했으나 그후 폐사되어 조선시대 정조 때까지 잡초더미 속에서 도량재건의 긴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사를 주도한 스님이 바로 보경 스님이고 스님은 바로 장흥 가지산 보림사 출신이었다.
보경 스님은 염거화상이 갈양사를 창건한 지 936년 후인 1790년에 바로 그 터위에 용주사를 새롭게 창건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깊고 질긴 인연의 이어짐인가.
용주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일주문 대신 세 개의 문이 있는 삼문(三門)이 있으니 이는 용주사가 왕실의 능묘를 돌보는 재궁(齋宮)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나타내는 표징이다.
삼문을 들어서면 누각 모양의 천보루(天保樓)가 힘차게 섰다. 사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누각을 올렸는데 대웅전으로 가려면 이 누각 밑을 통과해야 한다. 천보루에 걸린 주련을 보니 이 절이 바로 효행의 근본사찰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母年一百歲
常憂八十兒
欲知恩愛斷
命盡始分離
백살 되신 어머니
팔십 먹은 아들 걱정
자식 사랑은 언제 끝날까
목숨이 다해야만 흩어진다네
정조대왕이 용주사에 부모은중경 목판을 하사한 때가 1796년이고 그 후 순조가 부모은중경 석판과 동판을 하사한 때가 1802년이었으니 사찰 주련에 부모의 자식 사랑을 새긴 것이 하나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이유가 된다.
천보루 누각 밑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서 대웅전을 바로하면 좌우에 승당과 선방이 마주섰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 창건 때 지어진 건물로 57평이나 되는 큰 건물이지만 외부는 장중한 위엄을 갖추고 내부는 온갖 섬세함으로 가득하다.
주춧돌도 일반 사찰에서 흔히 보이는 자연석 주춧돌이 아니라 사각돌에 기둥을 받는 부분을 둥그렇게 튀어나오게 한 이중초석을 쓰고 있고 축대도 전부 기다란 사각돌인 장대석을 겹쳐 쌓아서 궁궐이나 관청 건물에서 흔히 쓰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대왕은 세자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선양하고 모후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으로 내려와 능묘를 돌보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소박한 꿈을 토로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나이 49세, 세자의 나이 11세 때에 귀밑머리에 난 부스럼으로 갑자기 붕어하게 되고 그 자신도 융릉 옆에 묻히게 되니 바로 지금의 건릉이다.
이제 우리는 융능과 건능을 합쳐 융건능이라 부르며 한가한 소풍장소로 삼지만 정조대왕이 효성으로 일으켜 세운 용주사는 오늘도 그 품안에 부모은중경을 간직한 채 ‘효도’라는 인륜도덕의 무한가치를 오고가는 참배객에게 말없이 설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깊고 깊은 가을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