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중국 1 남경 영곡사
불국토 순례기/중국 사찰 기행(1) 강소성 남경의 영곡사
지난 1991년 5월 24일 남경에서 열린 당송시사학술발표회에 「한국문학상의 두시」를 발표하기 위해 소련항공(아에로프로트)편으로 중국의 제2도시 상해에 내렸다. 미리 여행사에 아퀴를 맞춰 놓은 가이드의 마중을 받아, 우선 상해도서관으로 가서 두보(杜甫)의 시문집으로 최고의 유일본(1039년 간)인 송본 『두공부집』부터 열람하였더니, 공교롭게도 정전이 돼서 휴관이라 후일을 위해 열람신청을 하고 돌아섰다.
그래서 내친 김에 중산로 만국공원으로 가서 독립지사 박은식․노백린 두선생의 묘소에 재배를 하고, 이어 황포강변을 돌아 곧장 소주(蘇州)로 달려 당나라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 시로 헌사된 한산사(寒山寺)를 찾으렸는데, 가이드가 왕복에 무려 5시간이 걸려 안된다는 바람에 부득이 뒤로 미루었다. 실은 관광지도를 보면 불과 수원 정도인데 좁은 땅에서 자란 선입견의 착각이었다.
그래서 외국에 내리면 우선 거리감각부터 바로 살펴야 하는데, 관정(觀井)의 실수여서 속으로 웃으면서 개혁된 야경만 만끽했다.
그나마 이튿날 아침 7시 (서머타임)발 특급 합비(合肥)행을 타고 남경으로 달리면서 소주를 지나는 바람에 차창밖으로 바라보고 속절없이
달은 지고 가마귀 울고 서리는 하늘에 그득/강풍교 어선의 등불 마주해 시름에 잠겨,/화사를 극했던 고소성 밖의 한산사/한밤중 객선에 다다르는 쇠북소리여./
라고 읊조리었다.
사실 남경이라면 육조(六朝)이래 수도인 금릉(金陵)으로 우리 한국문학의 개산시조인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명작 「등윤 주자화사 상방」시로 해서 진작 귀에 익고, 또한 일본군의 남경학살 르포로 익히 돋본 상록의 도시로, 우리의 유학생이 나든 곳이어서 마음부터 도사려졌다. 그래서 우선 붓으로 고운(孤雲)의 자화사시를 써서 옆자리의 노인에게 보였더니, 자못 아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더불어 소리내어 읊었다.
속세와의 갈림길 잠깐 격해 올라를 와서/흥망을 상기하니 한시름이 더욱 새롭다/바라소리엔 조석으로 일렁이는 메아리요/푸른 산 그 속에는 고금인 그림자 서려/스산하다, 「옥수화곡」은 여전컨만 후주는 갔고/따스해라, 금릉바람 봄풀은 멋대로 푸르러./사씨네에 힘입어도 남은 시경 있기 때문에/시객(나)으로 하여금 정신을 해맑게 하누나./
물론 남경 일대는 산수가 수려해서 자고로 기라성 같은 시인묵객이 손속을 과시한 고장이다 특히, 사영운(謝靈運)과 사조(謝月兆)는 물론 헌다한 이백(李白)까지도 동곳을 뺏는데 그가 남긴 시경으로 샅바를 쥐었고, 화사한 「옥수후정화곡」으로 놀아난 진(陳)의 후주를 회상하며 자연과 인생의 정한을 승화시킨 최고운이었다. 본래 윤주(潤州)는 지금의 진강(鎭江)으로 남북을 꿰뚫은 운하로 유명한 남경에서 70km떨어진 곳이다. 워낙 남경이라면 만당의 대가 두목(杜牧)이 「강남춘(江南春)」에서
꾀꼬리 우짖고 푸르름에 붉은 꽃 어리고/강마을과 산다락엔 술집 깃발 펄렁거린다./육조 시절 사백팔십의 찬란한 가람에다/하고많은 누대가 안개비에 가물거린다./
라고 읊을 정도로 호화로워 지금도 진회(秦淮)에 가면 두목등이 놀이하던 배를 띄워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더구나 산재한 절집이 7백을 헤아린다고 한다.
한편 성당의 시성 두보가 과거를 보기에 앞서 자기의 실력을 겨루기 위해 24세 때 노닌 딸이기도 해서 나의 두시기행은 보람차기 그지없었다.
동으로 오나라땅 고소대에 내려를 가서/진작에 바다에 띄울 배를 타야 했는데,/떠돌이로 이제에 이르도록 한스러움은/신선 땅인 부상에 다다르지 못함 아쉬워./
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절경을 못잊어 이른바 남방의 가락을 기린 두보로 당시의 빛저운 유람을 되새기었다.
애초에 두시기행이 주였던 나지만, 불교도여서 주변의 사찰은 되도록 참배하는 바람에 오죽하면 “관광은 않고 왜 답사만 하느냐”고 가이드의 비양을 받았다. 구태여 남의 장단에 춤을 추고 싶진 않아 나름대로 고집을 부렸다.
사실 남경이라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 대전에서 제갈량이 대파한 육조 이래의 도읍지다.
더구나 양 나라 무제는 유난히 불교를 대흥시켰고, 이어 진(陳)나라 때는 호사를 극해 놀이에 취하다 수(隋)나라 양제에게 멸망되고, 다시 명나라에 정복되는 흥망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명의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는 바람에 자연 남경으로 쳐졌고, 또한 19세기 태평천국 때 파괴됐지만, 실은 진작 후경(侯景)의 난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남경이다. 그러나 영락제의 효릉을 비롯하여 공자의 사당인 부자묘, 그리고 당말문사들의 향락의 고장인 진회(秦淮)는 대표적인 고적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관광객은 유명한 영곡사는 찾지 않고, 삼민주의 손문(孫文)의 중산릉(中山陵)에서 숫제 발길을 돌리는 판이다.
영곡사는 중산릉 동남쪽에 자리한 대찰로 비록 명나라 때 건축이지만, 실은 양 나라 무제가 건립한 웅장한 개선사(開善寺)였단다. 거기에 우뚝한 5층의 영곡탑은 실로 남경의 상징적인 명물이며, 현장 법사 기념당 또한 보암직하다. 오로지 벽돌만으로 쌓아 지은 무량수전은 우리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연상케 한다.
특히 강남이라 날씨가 무더워 거시적으로 식수한 탓에 38도를 웃도는 기온을 4도나 낮추었다고 자랑하는 가로수의 터널은 마치 우리 청주시 입구의 플라타너스 길과 같다. 영곡사 참도도 우거진 숲은 하늘을 가렸고, 입구부터 경내를 메운 참배 객의 줄을 이은 향공양과 다투어 사루는 소지(燒紙)로 경내가 매끼 할 정도로 붐비는 영곡사였다. 그러나 우리의 순례대는 아예 찾지 않아 안쓰러워 얄궂기 그지없었다.
하여간 종교는 아편이라는 공산치하에서 철저하게 세뇌되었고, 또한 문화혁명으로 크게 제약됐어도 수정주의로 해서 사찰이 개방되자 인민의 기복처로 환원된 것을 실감했다. 그러니까 기복도 하고 피서도 하는 크게 붐비는 영곡사였다. 신도를 비집고 거대한 불상을 우러러 삼배를 올리고 고즈너기 『반야심경』을 외웠다.
실은 불전을 내야 비로소 종두가 편종을 땡땡 치는 법인데, 그냥 종을 치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동참했던 남경사범대학 상국무(常國武)교수가 되받아 남경 사투리로 대답을 하니, 놀래면서 “남조선 사람은 처음이다”하면서 엄지를 치키며 주지실로 안내를 해 차공양까지 받았다.
상교수와 나란히 경내를 빠져 나오면서 우리 불교계의 현황을 묻기에
“우리도 사찰이 관광객으로 미어지긴 매한가지지만, 소지는 안 한다.”
고 신생중국의 도타운 불심은 대단하다면서 나도 엄지를 치켜 경탄했다.
물론 이젠 수교가 돼서 앞으로 양자강을 거슬러 떠날 여유단(旅遊團)도 많으리라 짐작할 때, 이왕이면 신라의 삼시(三詩)로 일컬어진 작품의 현장인 자화사와 경주(涇州) 욕삭사, 그리고 사주(泗州) 구산사를 찾는 순례단이 길을 열고, 또한 두보가 평생 되씹은 천모산(天姥山) 와관사(瓦悺寺) 고개지(顧愷之)의 유마벽화 자리만이라도 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곧 사천성 무상(無相)대사와 섬서성 종남산의 자장(慈藏)율사의 주석처처럼 찾아 표석과 시비를 세우잔 말이다. 이는 우리 불교도가 아니면 숫제 영원히 잃어버릴 발자국이 될 터이니 더욱 간절한 바람이다. 일본인은 조금만 근거가 있어도 관광객을 그리로 몰고 가서 옛 사연을 부연하는 자랑을 볼 때 스스러워 더하다.
이병주 : 1921년 서울 출생, 호는 석전(石田), 동국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동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두시언해비주」「석보상절」「두시연구」「고전의 산책」「한국한시의 이해」「세한도」「왕십리」「한우물」「연꽃의 사연」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