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예산 수덕사

古寺의 향기 한국불교 선맥의 큰 줄기

2007-10-17     관리자

  [1] 위치

  장항선 삽교에서 기차를 내리면 서쪽 하늘에 우뚝 솟은 수려한 산을 대한다. 호서의 금강이라고 이르는 덕숭산이다. 높이는 480m 에 불과하지만 산수는 이름 그대로 숭엄하다. 덕숭산 남쪽 계곡을 흐르는 산이 바로 수덕사의 기지다. 삽교에서 덕산을 지나 산 아래 주차장에 이르는 거리는 자동차로 약 30분, 동구에 이르면 뜻밖에 소란한 여염의 거리다. 수덕사 문전에는 관광객을 위한 상가나 숙박시설이 들어선다.

  덕숭산은 산 위에 정혜사가 자리하고 산 아래 서편에 견성암이, 그리고 남쪽 기슭에 수덕사가 차지하며 그 사이에 수많은 암자가 혹은 개울에, 혹은  바위에 의지하여 흩어져 있다. 오늘날 수덕사는 한국불교 선의 중흥지로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근대 한국 선맥의 큰 봉우리인 만공{滿空}스님이 이곳에 머무시며 법을 펴고 오늘의 한국불교의 중요한 맥이 흐르는 원류이기 때문이다.

  [2] 창건내력

  수덕사의 창건 연대에 대하여는 이설이 있으나 백제 법왕{法王} 1년 {서기 599년}이고 개산주는 지명{智明}법사라고 전해온다. 지명이라는 이름이 그 당시 신라 고승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지명법사는 서기 585 년 중국에 들어가 629년에 돌아온 신라의 대표적 율사[律師}인데 그가 백제에 와서 절을 지었다고는 믿어지지 않고 연대도 맞지 않는다. 그때로 부터 좀 연대가 내려와 백제말 숭제{崇濟}법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는데, 백제 법왕 때로 부터 60년 후에 백제가 망했으니 수덕사의 창건은 대개 서기 600년 상반기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 시대는 한반도가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이 정립하여 크게 위세를 떨치며 자웅을 겨루고 있었던 때다. 밖으로 천하의 태평과 국가의 안정과 겨레의 번영을 희구했던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수덕사는 국내의 여건 속에 뜨거운 염원의 결실로써 이루어졌을 것이다.

  [3] 산내의 주요 건물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49호로서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 건물의 하나다. 백제의 명장{名匠}인 아비지{阿比知}의 손으로 이룩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또 대웅전 내부 벽화는 지금은 퇴색하여 거의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고구려 담징의 작이라고도 일러온 명화다.

  1936~1940년 당시 대웅전을 보수할 때에 이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대개 고려 때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지금의 건물은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건립됨} 담징이 579ㅡ631년  당시의 인물이고, 610년에 일본에 건너 간 것을 생각하면 담징작이라는 추측을 해봄직도 하나, 고구려와 전쟁 중에 있던 그 무렵에 고구려 고승이 백제에 와서 그림을 그렸다고 보는 것도 역시 무리인 것같다. 어쨌든 대웅전이 담고 있는 그윽한 역사의 향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수덕사가 머나먼 역사를 담고 오늘에서 있음을 똑똑이 보게 한다.

  비록 그러하나 아무래도 오늘의 수덕사는 만공스님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오늘의  수덕사 정혜사는 만공스님이 중창하여 한국불교 선맥의 큰 줄거리를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수덕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비구니 선원의 한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수덕사에서 산정의 정혜사에 이르는 산 중턱에는 현대식 석조 2층으로 된 덕숭총림이 자리한다.  이 건물은 얼마 전에 수덕사 전 대중스님들이 충력을 기울여 이룩한 도량인데, 참선 수도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중심지이다. 아마도 오늘의 참선하는 비구니스님으로서 견성암, 덕숭총림과 연고 없는 스님도 드물 것이다. 수덕사는 정혜사 능인선원과 덕숭총림과 함께 과거의 역사를 미래에 이어갈 큰 사명을 발전시키고 있는것이다.

  [4] 가람의 배치

  오늘에 수덕사의 가람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대웅전 오른 쪽에 청련당{靑漣堂}이 있고, 그 맞은 편에 백련당{白蓮堂}이 있다. 그리고 동편에 명부전이 있어 본사의 주요 가람을 형성한다.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한 1천 관의 큰 종이 장치되어 있다. 정혜사에 이르는 산 중턱에 25척 관음보살 입상이 있는데 자연석 그대로 조각한 용출 석불이다. 정혜사 아래에 위치한 만공탑은 만공선사의 사리탑인데 탑 상부가 둥근 구형을 이루어 그 형식이 사뭇 이체롭다. 정혜사 산내에는 정혜사, 견성암 외에 많은 부속암자가 있다.금강암, 사자암, 금선대, 환희대, 전월사 들이다.

  [5] 만공의 생애

  스님은 법호가 만공이고, 이름은 월면{月面}이시다. 속성은 여산 송{宋}씨이며, 전북 태인에서 서기 1871년에 낳으셨다. 13살 때 부모와 함께 절에 참배왔다가 출가할 뜻이 용솟음쳐 마침내 야반 도주해서 절로 왔다. 숙연이 있어서 전주 송광사를 거쳐 계룡산 동학사에 출가하였다. 그 해 경허{鏡虛}스님을 뵙게 되어 서산{瑞山] 천장사[天藏寺}로 자리를 옮겼다. 25살 때 참선공부를 시작하여 3년 만에 깊은 도리를 깨달았다.

그것은 온양 봉곡사{鳳谷寺}에 있던 서기 1895년 7월 25일이다. 사람마다 붙들고 [나에게 희유한 도리가 있으니 함께 공부하자] 하였지만 모두가 비웃고 돌아 서므로 공주 마곡사{魔谷寺}토굴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파전을 일구며 3년을 지내고 다시 경허스님을 따라 서산 부석사, 부산 범어사, 통도사 백운암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공부했다. 만공스님이 마지막 대오한 것은 그 무렵이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암자에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문득 천근 짐을 놓아 버리니, 온갖 묘한 도리가 일시에 드러나 대사를 마친 장부가 되었다. 그 후 수덕사에 와서 지내는 중에 경허스님에게서 인가를 받고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그 때는 스님이 34세니, 서기 1904년 7월15일인데 경허스님이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시는 길이었다. 만공이라는 법호가 그때 받은 것이다.

  다음 해 봄에 덕숭산에 조그마한 초암을 짓고 금선대로 했는데 이곳이 오늘의 수덕사를 이룩한 근원법좌가 되었다. 스님의 문하에서 많은 대덕이 쏟아져 나왔다. 그 후 금강산에서 세 여름을 지낸 외에는 줄곧 덕숭산에 계시어 천하납자의 눈을 열어주었다. 말년에 전월사{轉月舍]를 짓고, 납자를 감추하시다가 이윽고 입적을 맞았다. 그날은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당신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때가 다 되었네 그려.] 껄껄 웃고 입적 하였다. 그때가 서기 1946년 10월 20일이다.

  세수 75, 법랍은 62세다. 만공스님의 법광은 오늘도 덕숭산을 덮고  천하 납자들의 바른 안목이 되어 있으니 가히 만공불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