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수 칼럼] 바미안 불상

2007-10-14     서경수

   오늘의 아프가니스탄은 초강대를 자랑하는 공산권의 종주국인 소련의 침공과 여기 대향하여 투쟁하는 저항군 사이의 전쟁터가 되어 극심한 비극을 겪고 있는 후진국의 하나다. 소련, 중공, 이란, 파키스탄 등 네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가 오늘의 비극을 몰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세계의 지붕으로 알려진 파밀 고원을 배경으로 카라코름 준령이 지도의 가운데를 가로막은 지형은 정치, 문화, 사회의 통일을 저해하고 있다. 험준한 산맥으로 가로 막힌 골짜기마다 이질적 문화 양상을 띤 씨족이 독립적 행정체제 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산과 산맥이 너무 많아서 가장 대중적 교통수단인 철도부설마저 불가능한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이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민족 변천사 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민족사가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골짜기여서 각기 독자적 양상으로 지속된 것이 아프가니스탄 역사다. 옛날 [나선비구경] 에 등장하는 메난드로스 왕이 지배하던 카불의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용모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구성한 민족의 다양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건장한 타탈계의 우람한 체구를 가진 북방인종이 있는가 하면, 몸집이 다소 왜소한 남방계의 인종도 있다. 흰 색깔의 피부에다 파란 눈을 한 페르시아계의 미인이 있는가 하면, 검은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몽고계의 여인도 거리를 다닌다. 한 마디로 인종 전시장에 간 기분을 맛보게 한다. 나선비구경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인 나선비구는 인도계고, 그와 대화한 메난드로스는 희랍계였다.

  그러나 내가 아프가니스탄을 찾은 것은 이와 같은 인종전시를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고, 유명한 [바미안 불상]을 참배하러 갔다. 옛날 중앙 아시아를 거친 동서무역 통로가 번창하던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은 동서와 남북 무역 통로가 마주치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무역 상인은 반드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래된 통로도 아프가니스탄을 거치는 중앙 아시아의 실크로드였다. 인도와 중앙 아시아 출신의 여러 전교승들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에 가서, 포교와 역경에 종사했다.

  또 중국과 한국을 출발한 여러 구법승들은 실크로드와 아프가니스탄을 지나서 인도에 갔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는 불교에 관련된 여러 유적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바미안 불상도 그와 같은 유적 중의 하나다.

  바미안은 해발 3천 미터에 가까운 큰 분지다. 분지라고 하여도 평탄한 것이 아니고, 힌두쿠쉬 산맥 계의 산들로 둘러 싸여 있어, 높고 낮음이 심한 분지다. 분지 가운데에 힌두쿠시 산맥에서 얼음이 녹은 물이 흘러 들어와 이루어진 바미안 오아시스가 있다. 이 오아시스 주변에 사람들은 모여살게 되었다. 무역의 중개지로 발전하여 바미안 국을 형성했다. 특히 3세기 부터 8세기 까지는 불교가 성행했던 바미안 국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동서 2천 여리, 남북 2백 여리 설산 중에 위치한 바미안 국에는 수십 개의 큰 사원과 수 천의 스님이 있다. 또 동북방에 서 있는 석불이 있는데 높이가 140여 척이고,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또 그 동쪽에는 큰 가람이 있는데 그 가람 동편에도 서 있는 석불이 있고, 그 높이는 1백여 척이나 된다.]고 했다.

  또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이 나라 왕은 오랑캐족이고, 다른 나라에 예속되지 않고, 군대가 강하고 많아서 다른 나라가 감히 침범하지 못한다. 의복은 전포로 만든 저고리나 가죽, 담요 등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고 있다. 이 땅에서는 양, 전포 등이 생산되고 포도가 풍족하다. 눈이 오고 매우 춥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은 삼보를 크게 공경하고 절과 스님도 많으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7세기의 현장이나 8세기의 혜초는 둘 다 바미안 국에는 불교가 상당히 융성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다만 현장보다 약 백 년 후에 바미안을 찾았던 혜초의 기록에는 현장이 언급한 두 불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혜초가 지나간 후, 바미안은 이슬람의 침공에 의하여 이 나라의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 이슬람은 모든 가람과 불상을 철저히 파괴하고 승려들을 쫓아버렸다.

  두 불상의 얼굴을 깎아버린 것도 바로 이슬람의 칼이다. 오늘 두 불상은 얼굴에서 눈과 코, 입을 잃은 처참한 모습을 하고 서 있다. 세속적 더러움을 보지 않고, 세속적 더러운 냄새를 맡지 않기 위해서는 눈도 코도 없는 편이 도리어 나을 지도 모른다.

  바미안을 점령한 이슬람은 여기를 새로운 교역 시장으로 발전시켰다. 사방에서 오는 모든 물건들이 바미안에서 교역되므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서로 흥정하는 소리가 떠들썩했다. 그래서 이름도 떠드는 도시를 의미하는 [샤레,이,그루구라]고 바뀌었다.  페르샤어로 샤레는 도시 거리를 의미하고, 그루구라는 떠든다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샤레,이,그루구라]는 상업도시로서 소란하였었다. 그런데 이슬람이 바미안국을 침공한 것보다도 더 모진 박해와 파괴가 장기스칸이 이끄는  몽고군에 의하여 감행되었다. 몽고군이 [샤레,이,그루구라]를 포위한 것은 1221년이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에서 징기스칸이 총애하던 손자 모도간이 흘러가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모도간의 죽음은 바미안 계곡의 역사를 바꾸어 놓고 말았다. 분노에 찬 징기스칸은 부하들에게 [이 도시를 함락하거든 인간들 뿐 아니라, 모든 가축, 그리고 개미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다 없애버려라, 여기를 완전히 적막의 계곡으로 만들어라.]고 추상같은 엄명을 내렸다. 과연 징기스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죽음과 같은 폐허 만이 남았다. 중앙 아시아 역사는 징기스칸의 원정으로 사양의 길을 달리다가 바다를 통한 동서교역의 시작으로 기능을 잃었다.

  내가 바미안을 찾은 것은 6월 초, 인도 뉴델리의 더위가 45도 까지 상승하여 기승을 부릴 때다. 그러나 바미안은 두꺼운 담요 없이는 잠들 수 없을 만큼 추웠다. 쉬발 고개를 넘어 바미안 오아시스로 흘러가는 시내를 따라, 두 시간쯤 달렸을 때, 포플라 나무가 우거진 숲이 보였다. 오아시스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했다. 광막한 사막지대에서 푸른 숲이 무성하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오아시스다. 그순간 바른 쪽으로 절벽을 바라보니 얕게 깎은 동굴 속에 얼굴 없는 두 불상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 세월을 두고, 보고 싶었던 얼굴 없는 바미안 불상이다. 나도 모르게 얼른 그 쪽을 향하여 합장 배례했다. 다시 쳐다보니 정말 거대했다. 왼쪽은 55미터, 바른 쪽은 35미터 높이의 불상이다. 두 불상이 우뚝 서 있는 절벽 넘어 멀리 파밀 고원이 보였다. 이 자리에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게 된 동기가 바로 저 파밀 고원의 거대함에 있음을 절감했다.

  파밀 고원을 배경으로 조성하는 불상이 1미터, 2미터 또한 5미터, 10미터의 높이라면 웅장한 자연의 조화를 깨뜨릴 위험이 있다. 그래서 불상은 파밀 고원의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거대하여졌다. 그런데 55미터의 거대한 불상마저도 파밀 고원과 비교하면 아직 너무나 왜소하였다. 그렇더라도 파밀 고원의 웅장과 조화를 시도한 바미안인들의 예술감각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파밀의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조성된 거대한 두 불상은 인간의 역사에 의하여 얼굴을 잃어버렸다. 얼굴을 잃어버린 얼굴 없는 불상 앞 오늘은 또 다른 인간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토록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전쟁 만을 되풀이해야 하는 인간의 역사다. 아마 인류사에서 평화는 영원히 잃어버린 유실물이 아닐런지. 평화가 인류사의 영원한 유실물인 한, 눈도 코도 입도 잃어버린 얼굴 없는 불상도 영원히 그 얼굴을 찾지 못할 것이다.

  (1925년 함북 출생, 1960년 동국대 대학원 수료,

1976년~1983년 인도 네루대학 교환교수, 현재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