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불교] 모린 묘온 스튜어트
(Maurine Myo-On Stuart)
제자들에게 바하의 음악을 화두로 내어주고 연주로 화두를 통과했는지 점검했던 스님! 여성의 섬세함으로 자신의 몸을 악기로 느끼며 참선을 통해 몸을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스님! 롤링스톤스의 노래 중 ‘원하는 것을 항상 가질 수는 없지만, 필요한 것이라면 종국에는 가질 수 있다네’가 진리라고 설법한 스님! 캐나다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음악 유학을 간 모린 스튜어트는 거기서 선불교를 만났다. 졸업 후 연주회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다가 후에 임제종의 소엔 나카가와 노사를 은사로 계를 받았지만 그는 독립 초종파 선원을 운영했다. 미국 매서츠세츠주 캠브리지 시에 소재한 캠브리지 불교회(Cam-bridge Buddhist Association)에 주석하며 참선과 수행을 가르치면서 특히 여성들을 위한 장기수련회를 자주 개최하던 그를 제자들은 ‘엄마 스님(Ma Roshi)’이라고 불렀다. 음악을 수행에 사용했다는 것 말고도 독특한 점 몇 가지를 스튜어트는 가지고 있다.
첫째 한 번도 일본에 가서 수행을 한 적이 없다. 임제종의 노사 중에 그런 사람은 드물다. 둘째 임제종과 조동종의 스님들에게 고루 배웠다. 셋째 선불교를 뿌리로 가지고 있지만 그에 머물지 않고 모든 불교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다 수행과 의식에 사용하고 있다.
스튜어트에게 ‘수행(practice)’이라는 말은 피아노 연습과 불교 수행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 그의 승원에는 음악에 관한 비유가 풍부하다.
“나는 늘 내가 피아노 같은 악기라고 느꼈다. 선불교를 수행하면서 그 느낌은 더욱 깊어졌다.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피아노 같은 기술적 도구가 있어야 하듯이 선불교는 참선이라는 기술적 도구를 필요로 한다.”
스튜어트의 피아노 은사인 나디아 블랑제르(Nadia Boulanger)는 열정적이고 독창적인 가르침으로 유명한 여성이다. 모든 작곡가의 말과 음악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연주기법과 음악을 가르쳤던 그는 이미 2차대전 이전에 세계 굴지의 교향악단을 처음으로 지휘했던 여성이다. 그런 은사에게 공부한 제자답게 그에겐 음악과 선(禪)의 경계가 없다. 바하의 음악(The Well-tempered Clavier)을 화두로 받았던 제자의 말을 들어보자.
“그건 피아노 레슨이 아니었어요. 스님은 연주회 전문 피아니스트이셨으니까 저의 연주를 평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내어주신 화두를 참구한 대로 보여드렸고 스님은 제 연주를 통해서 나오는 본질적인 것에 관해 몇 마디 하셨어요.
저는 집에 돌아와서 스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화두를 좀더 참구했고, 다음 인터뷰에서 스님은 제게 화두를 통과했다고 말씀하시고는 다른 음악을 화두로 내주셨어요.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스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스님의 그런 창조성과 융통성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스튜어트 노사가 모든 형식을 다 파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진정 필요한 형식도 있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자유는 형식에 있어요. 형식을 버린다면 선(禪)도 음악도 되지 않아요. 심지어 아이를 기르는 것처럼 삶의 일상에 뿌리내린 듯 보이는 것도 형식 없이는 안 돼요.” 1949년 프랑스에서 선불교를 처음 접했던 그가 불교수행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1965년 뉴욕의 선학회(Zen Studies Society)에서였다.
4살, 7살, 9살의 어린 세 자녀를 둔 어머니가 수행을 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매사에 의욕적이었던 그는 모든 것을 남보다 빨리 많이 하고 싶어했다. 가정을 버릴 수도 없고, 수행을 놓을 수도 없고 팽팽한 갈등을 겪었다.
선방에서 수행할 때는 가족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고, 집에 있을 때는 수행을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나의 삶에는 다른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수행이든 가정이든 양보다는 질이 더 중요하다. 또한 모든 것을 버리고 나가는 것은 아주 쉽지만, 돌아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은 더욱 커다란 수행이다.” 1972년 보스턴에서 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한 스튜어트는 1979년 여성 법사 엘지 미첼이 하던 캠브리지 불교회를 이어받는다.
그보다 2년 전인 1977년 스튜어트는 에이도 노사에게 사미계를 받았지만 몇 년 후 스승과 결별하였다. 그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집중수련을 할 수 있는 대정진에 여성을 빼놓은 것, 그리고 에이도 노사가 여성 제자들과 성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지금 당면한 상황은 ‘내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온 것임을 알기에 스튜어트는 자신과 에이도 노사 사이의 결별도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최상의 일이었다고 받아들였다.
1982년 여름 소엔 나카가와 선사는 아무런 증인도 없는 사석에서 스튜어트 스님에게 ‘노사(roshi)’라는 호칭을 주는 수계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는 “내가 너를 노사로 만들었음을 모두에게 알려라.”고 말했다.
이 약식 수계의식에 대해서 일본 본산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았다. 심오한 동시에 장난스러웠으며 엉뚱한 장난을 잘하던 소엔 노사였기에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미국 제자들이 이 화두를 몇 년 동안이나 끙끙대고 풀라고 제시한 그의 마지막 역설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스튜어트는 ‘노사’라는 타이틀을 기꺼이 사용했다.
불교의 역사를 보면 여성불자들이나 비구니들에게 장애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불교 스승으로서 스튜어트가 할 일은 장애를 긍정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나 선불교 스승으로서나 음악가로서나 자신이 여성임이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선은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관련이 없고, 타이틀이나 계보에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 스튜어트. 그는 서양에 비구니가 드물었던 시절에 여성으로서 노사가 되었지만 선불교의 가부장적 체제를 비난하는 독단적 페미니즘보다는 ‘선불교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자고 외친 긍정적 페미니스트이다. 소엔 노사가 가르쳤던 불교수행은 ‘열린 마음으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 내어놓은 수행’이라고 스튜어트는 말했다. 그런 은사에게 배운 제자답게 스튜어트는 말했다 .
“스승이 아무리 높고 고결하다 할지라도, 그 스승이 우리의 존재 밖에 있는 한 그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때 스승은 우리에게 보물이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