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산책] 금강구(金剛鉤)
불교문화 산책/ 순수한 진금(眞金)의 색
Ⅰ. 밀교의 기원과 밀교법구(密敎法具)
밀교란 부처님께서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교파로, 7세기 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부파불교시대[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 중심의 수행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정치한 교학(敎學)의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교리에 어두운 신도들의 발길을 돌리게 하여, 교단의 위축을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 운동이 밀교의 탄생배경이다.
밀교에서는 의식을 거행할 때 엄격한 법식에 따라 여러 가지 물건이 사용되는데, 총칭하여 밀교법구라고 한다. 하지만 밀교가 성행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금강령, 금강저, 화사형 향로(火舍形 香爐) 등이 일부 전해지는데, 대부분 중국 원나라에서 유입된 라마교의 영향으로 13~14세기에 주로 사용되었다. 밀교법구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 등이 전한다.
『금강정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대교왕경』 중권 「대만다라광대의 궤품」에는 “이때에 세존 비로자나여래는 다시 모든 여래의 삼매야구삼매야에서 난 바의 살타금강이라 이름 하는 삼마지에 들어가 모든 여래의 모든 인중주(人衆主)를 자신의 마음에서 낸다. 廊日奇二合矩濾(vajrankusa, 金剛鉤)” 『금강정유가중략출념송경』 제 2권에는 “자신의 마음 월륜(月輪) 가운데에서 금강저의 형상은 순수한 진금(眞金)의 색으로서 광염(光焰)을 내며 곧 이는 티 없는 청정한 부처의 지혜라고 관상하라.”
Ⅱ. 밀교법구의 유형
대표적인 것으로 현재도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강저와 금강령을 들 수 있다. 금강저(金剛杵; Vajra)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제석천(Indra)이 지닌 무기의 일종으로, 천둥의 모양을 따랐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항상 몸에 지녀 금강과 같은 지혜로 미혹을 깨뜨려 부수는 지혜의 무기로, 보리심을 상징하는데, 달리 금강지저(金剛智杵)·견혜저(堅慧杵)라고도 한다.
저(杵)는 고대 인도의 무기 중 하나로 제석천이 코끼리를 타고 아수라와 싸울 때 사용하는 것이다. 무기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예리하고 뾰족하였으나 차츰 불교의식구로 전용되면서 불꽃[寶杵]이나 탑 모양[塔杵]으로 변모하였다.
사진3는 『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진공대사의 부도탑 하대석이다. 8각형 석재에 안상을 판 후 정·후면 내부에 금강저를 돋을새김 하였다.
금강령(金剛鈴; Vajra-ghanta)은 승려들이 지녔던 요령에서 유래한 것으로 법회나 의식 등을 행할 때 마음속에 감추어진 불성을 깨우기 위해 사용한다. 방울 바깥에 보살·사천왕·명왕상 등이 조각되며, 손잡이 부분은 금강저의 모양과 유사하다. 손잡이 윗부분에는 날카로운 고(怯)가 있는데, 그 숫자에 따라 독고령(獨怯鈴)·삼고령(三怯鈴)·오고령(五怯鈴)으로 구분한다.
사진2는 삼고령으로 손잡이 윗부분 꽃잎 받침에 위를 향한 동물 머리가 양쪽에 있고, 이 동물 입에서 나온 고는 중앙에서 솟은 고 상부에서 합쳐진다.
몸체는 6면으로 구획한 후 악귀를 밟고 무기를 들고 있는 사천왕상과 그 사이로 구름을 타고 있는 제석, 범천상 등을 조각하였다. 방울의 내부에는 긴 설(舌)이 달려 있었으나 현재는 분리되어 있다. 설의 끝부분은 눈, 코, 입이 있는 고래(鯨) 머리 모양이다.
『유가대교왕경』권1에는 “이 때 아사리는 이 진언의 염송을 마친 뒤 오른손으로 금강저를 던지고, 왼손으로 금강령을 흔든다.” 라고 하는데 사진 1의 나한 표현이 이를 따르고 있어, 고려시대 불화제작과 승려들의 수행에 밀교의식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Ⅲ. 깨달음의 다양한 길
불교에서는 수행하는 이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깨달음의 방편을 설한다. 이것을 『대일경』 에서는 실지(悉地)라고 한다. 수행자는 하실지에서 상실지로 오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 상실지와 하실지는 결코 다르지 않다고 한다. 불성이란 늘 자신의 마음에 있으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