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위하기에서의 위험

번뇌에서 건지는 깨달음

2007-09-22     관리자

나는 카사노바가 누구인지 몰랐었다. 단지 사람들이 한결같이 여자를 홀리는 것과 관련해서 그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고 그가 천재적인 바람둥이 또는 여자의 마음을 훔치는 데 도가 터진 사기꾼일 것이라고 짐작하기만 했다. 그런데 금년이 카사노바 사망 200주년이 되어서 한 잡지는 그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주었다. 조반니 자코모 카사노바는 1725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798년에 현재의 체코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카사노바는 16세에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해서 고전들을 줄줄 외울 수 있었다. 독서를 좋아해서 당대 주요한 서적들을 모조리 섭렵했다. 의학, 자연과학 등 여러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외모, 박학다식, 언변, 기발한 아이디어, 지성미, 깔끔한 매너, 로맨틱한 분위기 등은 귀족 여인들의 허영심을 사로잡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지금까지 카사노바의 주된 이미지는 부도덕한 호색방탕아였다. 그러나 사후 200년이 지난 오늘에는 다른 평가도 제기되고 있다. 카사노바는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은 여성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여성을 기쁘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하려 했고, 여성의 쾌락을 중요하게 여겼다. 여성을 유혹하고 반대로 유혹당하기를 좋아하는 주된 목적은 여성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 뭇 여성과 놀아났다는 점에서는 패륜아이지만 여성의 청이라면 거절하지 못하고 여성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것이다.

남을 위한다는 핑계

카사노바가 오직 여자만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어디 여자를 위하는 사람이 그뿐인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세상 남자 어느 누가 여자를 위하지 않으려 하겠는가. 단지 보통 남자들은 온 세상의 여자들을 빠짐없이 기쁘게 해 주겠다는 과욕을 내지 않을 뿐이다.
요즘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근래에 암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는 발표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비아그라에만 쏠려 있다. 제약회사는 심장질환을 비롯해서 다른 병증이 있는 사람이 비아그라를 잘못 복용하면 죽는다고 경고하고 있고, 실제로 죽은 사람도 많다. 또 복용 후에 두통 등 많은 종류의 부작용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부작용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 비아그라의 복용이 남자, 여자, 아니면 둘 다를 위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기서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여하튼 저 약이 여자와 관계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남자들은 죽음 같은 부작용을 무릅쓰면서도 여자 때문에 저 약을 복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위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누군가를 위한다는 많은 핑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일에 빠질 때 반드시 누군가를 위해서 자기를 바친다는 명분을 만들고 자기를 합리화한다. 자기의 잘못이 발견되더라도 그것을 변명할 이유를 찾아낸다. 설사 이유를 대지 못하더라도, 자기의 잘못은 더 큰 것을 위해서 부득이 치뤄야 할 최소한의 대가로 처리한다.
언론에서 대도(大盜)라고 부르는 조세형의 변호사는 법정에서 조씨의 도둑철학 5계를 소개했다고 한다. 훔치더라도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는 것, 나라 체면을 위해서 외국인 것은 훔치지 않는다는 것, 훔친 것 일부는 어려운 이를 위해 쓴다는 것, 다른 도둑을 위해 판·검사의 집은 털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도둑질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외에 가장 중요한 이유가 또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보살피기 위해서 도둑질을 해야만 했다는 주장 말이다.
32년간 독재로 인도네시아를 다스리던 수하르토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나라의 국민들은 수하르토를 나쁘게 말하겠지만, 그도 장기집권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나름의 이유를 댈 것이다. 변명을 위한 주요 문구는 직접 듣지 않더라도 너무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이것은 이방원, 수양대군, 마르코스 등 예나 지금의 모든 득세가들이 한결같이 써 왔던 말이기 때문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던가.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하던가.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어떤 명분이나 사람을 위해서 그리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타심 뒤의 자기 과시욕

그래, 카사노바가 오직 여자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만 살았다는 말을 인정해 주기로 한다고 치자. 정말 그는 남만을 위해서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자기라는 것과 그 자기를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자기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면 카사노바는 왜 일생 내내 헐떡거리며 살아야 했는가. 왜 자기가 살던 곳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가고, 귀족 여인의 등을 쳐야만 했는가. 또 진정으로 여자의 쾌락을 중시했다면, 왜 회고록에는 자기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아서 여자의 품격을 격하시켰는가. 세상 여자들이 카사노바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참다운 쾌락을 알지 못한단 말인가.
비아그라를 복용하는 남자들 모두가 오직 육체의 기질적 병만을 치료하고자 할까. 보통 이상으로 강해져서 남성을 과시하고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마음은 전혀 없을까. 조세형이 경제적으로 평등한 나라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만 깊은 밤에 도둑질을 했을까. 수하르토가 오직 국민만을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30년 넘게 독재를 했을까. 우리 모두가 부질없이 자기 과시욕의 노예로 사는 것은 아닐까.

줌이 없는 무자미(無慈味)의 줌

『금강경』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와 자기 과시를 지우려고 한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줄여서 말하면 자기와 자기 과시욕이 아니겠는가. 부처님은 이 과시욕에 걸리기만 하면 부처, 보살, 중생교화, 불국토 장엄, 또는 그 무엇이든지 무용지물이나 무효가 된다고 설한다. 자기 과시가 남아 있다면 부처도 부처가 아니고 중생교화도 가짜라는 것이다.
카사노바나 우리가 각자의 파트너에게 줄 무엇이 있는가. 상대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 그 무엇을 상대에게 주어서 상대를 위할 수 있는가. 없다. 내가 줄 것은 없다. 또 상대가 기뻐하더라도 그 기쁨은 상대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즐기는 것이지 없던 것을 내가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오직 상대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제대로 누리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에게 무엇을 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상대에게 무엇을 주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의 것에 내 이름표를 붙이고 내것이라고 주장하는 격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기 자기의 파트너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카사노바는 참 훌륭했었다. 그와 같이 되기를 꿈꾸며 사는 사람들의 뜻도 참 좋다. 상대를 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매달릴 일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최고의 쾌락을 주기 위해서 발가벗고 밤낮으로 뛰겠다는 과욕을 낼 일은 아니다. 마음은 제한이 없으나 육체는 걸림이 있다는 한계를 알고 상대를 위하겠다는 원력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상으로 더 크게 더 많이 주는 것은 없다. 무력하고 재미없고 심심하고, 권태롭고, 따분하고 시시함을 철저히 사무쳐 느낄 때, 그곳에서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할 수 있다. 이 이타심에는 자기과시가 없다. 진실로 위해도 그것의 참 맛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상대의 문제이다. 중생심에 방편적으로 순응할지언정 무한의 욕망을 전부 충족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나와 함께 상대도 필경에는 무자미의 이타심 경지까지 올라가야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