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해 살거라. 인과는 분명하다"
고암스님 - 다시 뵙고 싶은 큰스님
2007-09-20 관리자
늘 고암 스님을 따라다니는 형용사는 자비보살이다. 한평생 철저한 하심과 자비심으로 초지일관하셨으니, 한 생에 이루어진 게 아닐 것이다. 어릴 때 형의 등에 업혀 있을 때 지나가던 도승이 “이 아이는 나중에 출가해 반드시 큰스님이 될 것”이라고 한 것도 전생부터의 깊은 인연을 암시한다.
열아홉에 발심 출가한 스님은 매우 뛰어난 학승이었다. 기미독립만세운동 비밀 활동을 하였으며,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강원도 산속에서 정진하다가 다시 해인사로 돌아와 내전(內典)을 모두 이수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선원을 두루 거치며 정진하다가 마침내 용성 선사에게 인가를 받았다. 선교(禪敎)를 겸비한데다 용성 스님, 한암 스님, 제산 스님의 율맥까지 이은 대선지식으로서 자비롭게 살다가셨기에 스님을 자비보살로 기리는 것이다.
공양주를 하면서 스님들의 신발까지 늘 깨끗하게 닦아 놓았고, 엄동설한에도 항상 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대중스님들께 올렸는데, 만공 큰스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고 “이러한 복덕과 하심이면 뒷날 큰 선지식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것이다.”라고 하신 얘기는 아주 유명하다.
“금가루가 비록 귀한 것이기는 하나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고 강조하시면서 책이든 돈이든 생기는 대로 다 주셨다. 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고 병든 사람의 치료비로 내놓거나 경전을 발간하여 유포하고, 또 염주를 사서 나누어주는 무주상 보시로 일관하셨다. 그리고서도 빚을 다 갚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알고 보니, 운수행각 시절 한 아낙이 대신 뱃삯을 치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아낙은 헤아릴 수 없는 저축을 한 셈이요, 그래서 도인에게 공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전이 된다고 했나보다!
아흔 살의 고령으로 열반에 드시면서 “조심해서 살거라. 인과는 분명하다.”고 하셨던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뼛속깊이 사무친다. 인과법만 알아도 세상이 평화로울 터, 그 말씀의 편린이나마 접하면서 스님을 따라 자비보살의 길을 걸었으면 한다.
나를 내세우는 마음을 끊어야
성품을 보는 것이 공(功)이요, 평등은 이것이 덕(德)이며,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이요, 밖으로 예(禮)를 행하면 이것이 덕이며, 자성을 여의지 않는 것이 공이요, 응용에 물들지 않는 것이 덕이다. 공덕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가볍지 아니하며 항상 널리 공경하나니 만약 마음으로 항상 남을 업수이 여기고 나를 내세우는 마음을 끊지 않으면 즉 스스로 공이 없는 것이요, 자심(自心)이 허망부실하면 즉 스스로 덕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면 온 세계가 깨끗하다
부처님이 싯다르타 태자로 있을 때에 세상을 관찰해 보니 나라마다 사상 대립과 민족 분열로 평화로운 때가 없고 백성들은 근심 걱정 속에서 자기만 살려고 하면서 노병사(老病死)에 허덕이는 것이었다. 거듭 생각해보니 그러한 원인은 곧 중생 스스로가 지은 것이었다.…
이 마음은 얼마든지 새 마음을 일으킬 수 있고, 나쁜 마음은 언제든지 안 일으킬 수 있다. 그리하여 심정(心淨)이라야 국토청정이라 하셨고, 이 마음 광명은 시간, 연대도 없어 언제나 새해, 새 마음이며 생로병사와 우비고뇌가 없어 언제나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지도 않고 즐겁게 잘 살 수 있다고 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언제나 새마음을 일으켜 사섭법(四攝法)을 실행하면서 잘 살아가자.
눈 마주칠 때 계는 전해진다
계를 전하는 사람과 계 받는 이의 눈이 서로 마주칠 때 그러니까 계사의 ‘자비한 눈’과 수계자의 ‘간절한 눈’이 무념(無念)으로 마주볼 때 계가 형성됐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받은 계라야 영겁을 두고 파계됨이 없이 정(定)을 닦아 성불하게 된다. 계는 불교 수행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흐트러지기 쉬운 중생의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그래서 계를 그릇에 비유하여 계기(戒器)가 완전해야만 정(定)의 물이 고인다고 한다. 또한 지혜는 그 정(定)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삼학(三學:戒·定·慧)의 기초는 바로 이 계이다.
참다운 복혜를 구족하신 부처님
우리의 부처님이신 싯다르타 태자는 그 부유, 그 권력, 그 지능, 그 일체가 수승하기 비길 바 없이 높고 깊고 크기 한량이 없었으나 이를 남김없이 버렸고, 버렸다는 그 생각마저 멸진하였으므로 참다운 복혜를 구족하여 바라밀의 법계를 장엄하신 것이다. 조그만 것을, 하찮은 것을 자기라고 고집하는 유소득(有所得)의 아집으로 살고 있는 이 사바의 중생들에게 사제(四諦)와 중도(中道)의 법륜은 참으로 우레 같은 천고(天鼓)의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좋은 꿈은 좋은 삶을 살다가 가는 것
영가는 그 동안 이생에 있으면서 꾸던 꿈을 다 훌훌 털어버리고 오늘에야 비로소 극락세계로 간 것이다.… 좋은 꿈은 좋은 삶을 살다가 가는 것과 같고, 나쁜 꿈을 꾸는 것은 나쁜 삶을 살다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꿈을 오래 꾸는 것이고, 짧게 사는 것은 잠깐 꿈꾸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윤회의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꿈의 주인공인 청정 본래의 마음자리, 이 영가는 그 어떤 어둠에도 가리어지지 않는 빛을 찾았다는 말이다.
온 세계는 일화(一花)이며 온 중생은 일신(一身)
온 세계는 일화(一花)이며 온 중생은 일신(一身)이다. 민족도 국경도 피부색도 문화의 이동(異同)도 이것은 왕성한 생명의 나무의 색깔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의 생명 질서 위에서 자신과 신뢰와 협동으로 인간 신성을 보장하며, 나아가 그가 지닌 생명의 내실공덕(內實功德)을 남김없이 발현할 때 이 땅에는 평화와 번영이 구현되는 것이다. 만약 이와 반대로 불신과 아집으로 대립한다면 이 하나밖에 없는 세계수(世界樹)는 쇠약하고 고사(枯死)하며 그 속의 모든 중생은 도탄의 구렁에 빠질 것은 필연이다.
수도(修道)의 목적
가족생활을 버리고 한정(閒靜)한 산사를 찾는 것은 수도(修道)가 전일하게 성취되도록 하는 조도(助道) 조건은 될지 모르지만 이것을 가지고 수도의 전부라 오인해서는 결코 안 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란 출발부터 사회참여의 성격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부조리한 구석구석과 국토통일의 중대과업 민족 총화의 구현 방안과 대중불교의 실천 활동, 사상단결의 기저 정립 등 이 모든 것이 수도인들의 사회참여를 기다리고 있는 절실한 부문들이다. 거치른 민심을 순화시키고 민족정신의 방향제시, 총화단결의 지표 이러한 일들이 모두 수도인들의 현실 참여의 분야일 것이다.
지금 이 육신으로 윤회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이 일은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걸어놓고 대들어야 한다.… 정진 대중은 항상 자기가 처해 있는 발뿌리를 살펴야 한다. 내가 일용하고 있는 시은(施恩)의 무게를 알고 있는가. 사대(四大)로 된 이 육신이 순간순간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분을 만나고도 그대로 지나쳐버리지는 않았던가. 항상 도량에 안주하면서 수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쓸데없는 잡담이나 나누면서 시비를 일삼고 있지는 않는가.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지금 이 육신으로 윤회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