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문 바 없이 행한 대각大覺보살, 용성 스님
연재 근현대 스님들의 수행과 사상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서울 종로는 역사의 과거와 현재, 정치적 모든 성향이 뒤섞여 숨 쉬는 또 하나의 작은 대한민국이다.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조차 담아내듯 시대의 끊임없는 상흔이 고스란히 배여 요동치는 곳이 바로 종로다. 이 동네의 중심, 종로3가 지하철역 7번 출구에서 창경궁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삼화페인트 골목길 사이 대각사와 절 정문 오른쪽에 「용성 스님 거주터」 표석을 만난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불교혁신운동을 펼친 백용성 스님이 활동하던 곳”이라 새겨져 있다.
백용성은 용성 진종(龍城震鍾, 1864~1940) 스님으로, 옛날에는 스님의 속성을 앞에 붙여 불렀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1919년(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오등(吾等, 우리)은 자(玆, 이)에 아(我,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라며 독립선언을 거행한 종교 지도자 33인 중 한 분이다.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장로교, 감리교) 16인, 불교 2인(용성 스님, 한용운)으로 구성됐다. 구성인의 표면적인 인원수의 비교로 마치 이 운동의 주체를 기독교로 여기는 오해가 많이 발생한다. 특히 기독교는 이를 부풀리는 경향이 강하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의 대표성을 갖추기 위해 덤으로 들어왔을 뿐 계획하고 실행한 이는 용성 스님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일 이후 용성 스님은 당시 전국의 공무원들(정승, 판서, 팔도감사, 고을수령)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의 뜻을 모으려 했으나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나라의 녹을 먹은 사람들이라 당연히 함께하리라’라는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고, 대신 가난하고 못 배운 민중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음을 알게 돼 그들을 기반으로 큰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스님은 1916년 만해 한용운과 만나 시국을 논의하고 차후 거사를 계획한 후, 1918년 서울로 돌아와 그 당시 가장 민중의 힘이 강하게 뭉쳐져 있었던 천도교의 교주 손병희를 찾아간다.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는 그때 300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독립선언 거사에 대한 제언을 하러 가니 이미 천도교는 독자적으로 시행하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용성 스님은 “이런 거사는 사람의 힘만으로 안 됩니다. 33천(불교의 우주관)의 하느님이 우리를 보우하시어야 우리나라가 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표는 반드시 33명으로 구성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손병희 교주는 찬성하며, 대신 천도교 30인에 불교 3인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스님은 이를 만류하며, “종교적 대표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기독교계 대표도 포용합시다”라고 끝까지 설득해 기독교까지 참여시켰다. 처음엔 모두 동등하게 각 11인으로 33인을 구성했으나, 기독교 장로교와 감리교 측에서 각기 11명씩 총 22명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불교에서 양보하며 기독교를 최대한 수용하는 방안으로 모색했다. 최종적으로 장로교와 감리교 합해서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으로 구성된 33인의 독립선언의 민족대표가 정해졌고, 거사 당일 한용운 스님이 「독립선언서」를 대표로 낭독했다.
용성 스님의 주도면밀함은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민중이 일어날 수 있게끔 시행됐다. 미리 태화관 기생들에게 참석한 대표들의 신발과 두루마기를 감추라고 지시해 놓고, 다른 스님을 시켜 일본 헌병대에 신고하도록 했다. 일본 헌병대가 오기 전에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고, 모두 잡혀가 고초를 치러야만 민중이 일어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스님의 의도대로 태극기를 흔들며 3.1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안타깝게도 스님은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종로 대각사에서 열반했다(1940년 음력 2월 24일, 세납 76세). 다비식은 일본 경찰의 방해로 제자 일부만 참석한 가운데 몇 분 만에 치러야 했다.
백범 김구와 용성 스님
1945년 해방, 김구를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이 귀국했을 때 가장 먼저 한 공식 일정이 바로 대각사 참배였다. 5년 전에 입적하신 용성 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1945년 12월 12일, 임시정부 요인을 환영하는 ‘귀국 봉영회’가 대각사에서 열린 셈이다. 이날 백범 김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용성 스님을 추억했다. “용성 큰스님께서는 독립운동 자금을 계속 보내 주셨고,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중국 상하이로 보내 만대위국충절 순국으로 독립운동의 사표가 되게 해 주셨고, 쌀가마에 돈을 넣어 만주로 보내 주셔서 늘 요긴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백범과 용성 스님의 인연은 백범이 탈옥하여 스님으로 있었던 1912년으로 소급된다. 대각사에서(백범은 32세, 스님은 49세) 첫 만남이 이뤄졌다. 용성 스님은 열반에 드실 때까지 남모르게 백범의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윤봉길은 1930년 서울 대각사에서 스님께 삼귀의와 오계를 받았다. 스님은 윤봉길에게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가서 신명을 바쳐 애국충정의 길을 가라” 했고, 그는 그렇게 독립 거사에 가담하게 됐다.
스님은 고통스러웠던 옥중 투쟁을 “삼 년 동안 철창생활의 신선한 맛을 체험했다”라고 담백하게 표현했다. 그 “철창생활의 신선한 맛”은 생의 분기점이 됐다. 따라서 스님의 생은 크게는 옥살이 전과 후 2분기로, 좁게는 산중 수행기와 옥살이 전후의 3분기로 나눌 수 있다.
경전번역과 전법활동, 그리고 독립운동
스님은 전라도 남원군(현재 장수군) 출생으로, 법호 ‘용성’은 남원의 옛 지명이다. 지명을 당신 법호로 정한 것이다. 스님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유년 시절은 새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7세 때부터 한학을 익히기 시작했고, 14세에 남원군 교룡산 덕밀암(‘현재 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 성지’라는 표지가 있음)을 찾았다가 출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강제로 집으로 되돌아오고, 16세(1879년)에 집에서 먼 거리의 해인사 극락암으로 재출가를 감행했다.
재출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운사의 수월 영민(1817~1893)선사를 찾아가 대비주 수행을 지도받았다. 수월 스님은 “지성껏 삼보를 예배하고 부지런히 대비주를 염송하면 자연히 업장이 소멸되고 마음이 훤히 밝아 번뇌를 투과할 것”이라 일렀고, 스님은 양주군 보광사 도솔암에서 대비주 염송에 전념하게 된다. 6일 만에 “한 생각이 통밑이 빠지는 것 같은 경지를 체험하게 되었다”라고 스님은 술회했다. 한때 세간에는 여기 수월 스님을 경허 스님의 제자 수월 음관(1855~1928, 전수월) 스님으로 전해져 왔는데 이는 잘못이다. 고운사 입구에 있는 수월 영민(김수월)의 ‘행적비’ 비문에 의하면 용성 스님이 찾아와 대비주를 하도록 지도했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후 본격적인 선 수행의 시작은 금강산 표훈사에서 무융 선사의 지도로 ‘무(無)’자 화두 참구였다(나이 20세). 하루는 송광사 삼일암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구미 낙동강변을 걸어가는 도중 금오산의 저녁놀을 보며 오도송을 읊게 된다(23세).
금오천추월(金烏千秋月)
금오산에 천 년의 달이 걸렸고
낙동만리파(洛東萬里波)
낙동강 만 리에 파도가 치는구나.
어주하처거(漁舟何處去)
저 고깃배는 어느 곳으로 가는고
의구숙로화(依舊宿蘆花)
예나 다름없이 갈대밭을 의지해 쉬는구나.
용성 스님은 공부 중에 상대방이 묻는 법거량에만 응했을 뿐, 남에게 먼저 법거량을 하지는 않았으나,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에게 먼저 법거량을 시도하게 된다. “목침이라고 부르면 부딪히게 되고, 목침이라고 아니하면 배반하게 되니 이 도리를 일러라”라는 법거량 후, 남의 깨달음을 점검해 주는 단계로 나아갔다(1901년, 38세). 본격적으로 제방의 납자들을 지도하고 양성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 철원 보개산 성주암에서 발생했다(1904년 2월, 41세). 하루는 선원대중 가운데 무휴라는 스님이 자칭 ‘견성했다’고 하자, 스님은 “내가 듣기로 견성한 사람은 백천 공안을 모두 꿰뚫고 있다고 하는데, 열 가지 병통에 떨어지지 말고 조주가 말한 ‘무’자의 의미가 어떤지 속히 일러보게”라며 받아쳤다. 무휴 스님은 우물쭈물하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스님은 “그대는 대망어(大妄語, 큰 거짓말)를 하고 있어. 앞으로는 이런 견해는 내지 말게”라며 꾸짖었다. 이후 선회(禪會, 참선하는 모임)를 주관하고 개설하며 수좌들의 공부를 지도하게 됐다.
스님은 참선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깊이를 지녀 불교를 비방하는 특히, 기독교에 대한 반박 논서로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기도 했다. 1910년, 지리산 칠불선원 조실로 머물 때 집필한 이 원고는 “1910년 음력 5월 10일 오전 10시에 칠불조실에 착수하여 7월 10일 오후 3시에 탈고했다”라고 한다. 그해 하안거 기간 중 5월 8일은 당신 생일날(47세)이었는데, 호은 스님이 “우리가 먼저 남을 배척할 것은 없지만 기독교의 배척이 너무 심한 현실에 한 번은 변론할 필요가 있으니, 스님이 변론하는 서책 하나를 저술하여 종교의 깊고 얕은 것을 알게 하소서”라며 말문을 텄고, 칠불선원 대중들도 적극적으로 필요성을 권해 착수하게 됐다고 한다.
그때 『귀원정종』 원고는 1913년 중앙포교당(현재 안국동 선학원)에서 정리해 6월에 간행했고, 1921년 7월에 재판되기도 했다. 『귀원정종』의 집필이 대중교화를 위한 인연의 씨앗이었는지 스님은 이듬해(1911년) 서울로 상경하여 조선독립과 불법 교화를 위한 이모작 생으로 접어들었다.
“철창생활의 신선한 맛을 체험한” 스님의 옥중생활은 원력의 기간이었다. “<독립선언서> 발표의 대표 일인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큰 충격은” 이웃 종교인들의 종교서적이 모두 한문이 아닌 한글이라 한결같이 알기 쉬웠다는 데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은 옥중 원력을 세우게 된다.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을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연구의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하지만 “출옥하여 옆 사람들과 협의하였으나 한 사람도 찬동하는 사람은 없고 도리어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라고 회고했다.
3월에 출옥한 스님은 그래도 4월에 ‘삼장역회’를 만들어 번역과 저술에 전력했다. 옥중 원력인 불교경전의 한글화 작업에 가장 먼저 착수했고, 불교의 포교를 위한 새로운 조직화를 시도했다. 왜색화된 기성의 불교 교단에서 벗어나 진정한 즉불(卽佛, 그대로 부처님)을 시현하는 운동, ‘대각교운동’을 벌였다. 불교혁신의 관점에서 기존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각(大覺)으로 칭한 것이다. 만주 용정과 경남 함안에서 농장(화과원華果園)을 운영하며 사원경제의 자립뿐만 아니라 여기서 나오는 잉여농산물을 독립자금과 독립군의 식량으로 사용했다. 이는 철창생활의 옥중 원력이 경전번역과 전법활동, 그리고 독립운동의 각 부문에 그대로 구현된 것이다.
‘활구참선 만일결사회’ 창설(1925년)로 정진결사에 들어간 진제(眞際, 출가법)의 영역에서부터 비록 밀정의 고발로 실패한 독립군 창설(1938년)에 이른 속제(俗際, 세속법)의 영역까지 용성 스님은 머문 바 없이 늘 대의를 행한 대각(大覺) 보살이었다.
월조 효신 스님
동국대 강사, 철학과 국어학 그리고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