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의 발견] 패엽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야자잎에서 경전으로
‘패엽경(貝葉經)’, 무슨 뜻일까?
패엽경(貝葉經)은 마치 ‘역전앞’처럼 두 번 강조한 말이다. 패(貝)는 산스크리트어로 나뭇잎을 뜻하는 ‘pattra’의 앞 음절만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고, 그 뒤의 엽(葉)은 다시 한문으로 ‘나뭇잎’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곧 패엽경은 나뭇잎에 쓴 경전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인도 경전들은 나뭇잎에 글을 썼다는 것인가. 그렇다. 종이가 중국에서 발명되어 인도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인도인들은 많은 기록을 나뭇잎에 써왔다. 바로 야자나무 잎이다. 야자잎을 산스크리트어로는 딸라빠뜨라(Tālapatra), 또는 딸리빠뜨라(Tālīpattra)라고 부르는데, 한역 불경에서 자주 다라수(多羅樹)라고 부르던 나무가 바로 이 야자나무다. 다라수의 다라도 ‘딸라(Tāla)’를 음사한 말이다.
야자잎은 자작나무 껍질과 함께 인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광범위하게 종이를 대신해서 사용됐던 재료다. 이 야자잎을 적절하게 재단해서 붓으로 잉크를 찍어 쓰거나 철필(鐵筆, Stylus)로 표면을 긁은 다음 그 위에 잉크를 바르고 닦아내서 기록물을 만들어냈다. 야자는 인도 북부의 몇몇 지역(겨울에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질 수 있는 지역들, 예를 들면, 카슈미르, 히마짤 쁘라데쉬, 펀잡, 하리야나 등)을 제외하면 인도 전역에서 생육상태가 좋을 뿐만 아니라, 야자잎은 비교적 크기가 크고 다른 잎보다도 질기고 건조한 후에도 보존상태가 좋아서 쉽게 기록 매체로 선택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야자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한데 그 잎들을 다 경전을 적는 데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경전의 기록에 사용한 야자의 종류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카라딸라(Kharatāla)와 슈리딸라(Śrītāla)가 그것이다. 카라딸라는 말 그대로 ‘단단한(khara)-야자(tāla)’이다. 흔히 팔미라 야자라고 부르는 이 야자(학명 Borassus flabellifer)는 남아시아 전체와 동남아시아에서 넓게 자생한다. 그리고 슈리딸라(학명 Corypha umbraculifera)는 주로 타밀과 케랄라 등지의 남인도와 스리랑카 등에 자생한다. 이 야자를 남아시아에서는 간소화된 지역 말로 딸리팟(Tālipot, 탈라빠뜨라)[도판 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팔미라 야자는 슈리딸라 야자에 비교하자면, 그 잎의 길이와 폭이 비교적 짧고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도 간혹 부러지는 성질이 있다. 반면 슈리딸라는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또는 동남아 일대 고온다습한 해안 지역에 넓게 자생하는 야자나무 잎으로 부드럽고 크기도 상당히 크다. 스냅을 주고 구부렸을 때도 쉽게 부러지지 않기 때문에 기록 매체로 이 잎이 훨씬 더 적합하다. 필자의 개인적인 관찰을 통해 보더라도 슈리딸라 야자잎으로 만든 패엽경이 훨씬 더 얇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것은 잎을 가공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차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야자잎을 어떻게 가공해 불경을 기록하는 것일까.
야자잎은 말려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꽤 번거로운 공정을 거쳐서 쓰기 적합한 재료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 야자잎을 필기 재료로 쓰기 위한 공정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삶아서 말리고 주름을 펴서 재단해 쓰는 과정은 비슷하다. 현재까지 패엽경 제작 전통이 일부 유지되고 있는 지역은 대체로 인도 동북부 지역의 오릿사 지역과 타밀 지역, 그리고 스리랑카 등이다. 이 지역마다 야자잎을 가공하는 형태가 조금씩 다르며, 그 잎을 이용하여 어떠한 책(또는 경전)을 만들 것인가에 따라 그 공정과 정성이 훨씬 차이가 난다.
먼저 패엽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야자나무 위쪽으로 올라가 잎이 될 부분의 어린 순(筍)을 딴다. 야자잎은 마치 펼쳐진 커다란 부채모양처럼 퍼져있지만, 잎이 벌어지기 전에는 마치 접힌 부채처럼 2m 정도의 길고 둥근 순(筍)기둥 속에 접힌 채 두꺼운 껍질에 싸여 접혀있다. 이 순(筍)을 타개서 접힌 잎들을 갈라내면 좁다랗고 긴 야자잎 수십 장을 얻을 수 있다. 이 야자잎의 가장자리 부분들을 칼로 다듬어서 포개놓는다. 이 잎들은 대개 폭이 8~10cm가량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모은 잎들을 여러 장씩 함께 포개서 둥글게 말아놓는다. 마치 영화필름을 말아놓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개의 야자잎 말이가 준비되면 큰 솥이나 냄비 등에 물을 넣고 함께 끓일 준비를 한다. 솥에 야자잎들을 넣을 때는 먼저 바닥에 야자잎 말이를 하나 넣고 그 위에 파파야 껍질조각과 파인애플 잎을 얹어서 함께 삶는다. 이렇게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약한 불로 3~4시간 천천히 끓인다. 물이 끓은 후에는 그 상태로 3~4시간 정도 더 담가둔 다음 꺼내서 깨끗한 물로 헹군다. 그다음에는 야자잎들을 일일이 펴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린다. 3일 정도 그늘에 말리고 나면 색깔은 은빛이 도는 연갈색으로 변하게 된다. 이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빨랫줄을 매달고 한나절 말리면서 혹시 곰팡이 같은 것이 피지 않았는가를 살핀다[도판 2].
이러한 과정이 끝나면 다시 영화필름처럼 둥글게 말아놓던가, 아니면 말지 않고 끈으로 야자잎들의 가운데를 함께 묶어서 그늘진 곳에 보관하게 된다.
다음은 표면가공을 하는데, 돌을 이용해 표면을 문질러서 매끄럽게 다듬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위해서 돌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매끈한 나무 기둥을 사람 키 높이 정도 위에 가로로 걸어놓고 그 위에 야자잎을 걸친 다음 양쪽에서 재빠르고 세차게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면서 표면을 매끄럽게 만든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당기기도 하지만 건조된 야자잎의 한쪽 끝에 돌을 묶어 달아놓고 한쪽에서 당기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서 잎의 잔주름을 펼 뿐만 아니라 표면이 매끈해지도록 가공하는 것이다.
표면가공에 들어가기 전에 야자잎을 1~2분간 물에 담갔다가 위와 같은 처리를 하는데 표면에 살짝 물을 묻히면 표면이 더 매끄러워지고 당기면서 생기는 마찰열에 의해 손상되지도 않는다. 이렇게 하면 표면에 살짝 광택이 돌게 된다.
그다음은 야자잎들을 하나씩 포개 얹어서 블록처럼 쌓아놓고 무거운 돌 등으로 눌러놓은 다음 필요한 크기에 맞게 재단한다. 최근에는 재단(裁斷)용 틀을 쓰는데, 일정한 크기(사본 크기)로 잘린 목판에 가늘고 긴 볼트가 양쪽으로 부착돼 있고 그 볼트 위에 공정을 마친 야자잎을 여러 장씩 끼워 너트로 꽉 조인 다음 가장자리를 칼로 잘라낸다.
여러 장을 이 볼트에 끼우기 전에 미리 볼트 간격만큼 양쪽에 구멍을 낸다. 이것은 나중에 경전을 쓴 다음 여러 장을 함께 실로 철(綴)하기 위해 철공(綴孔)을 내면, 볼트의 간격이 책철의 간격이 되는 것이다. 재단한 후에는 그 상태에서 그대로 다림질한다. 쇠를 달궈 야자잎들의 양 끝과 측면을 다림질하는데, 이렇게 해서 야자잎의 끝자락이 습기와 곰팡이, 벌레 등에 견딜 수 있도록 마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살짝 태워보면 겹친 야자잎의 크기가 잘 잘렸는지도 확인할 수 있으며 지저분한 섬유질도 다 없어진다.
철공도 가능하면 불에 달군 철꼬챙이로 안쪽 가장자리를 그슬려주는 것이 좋다. 철공까지 만들어 준 다음, 다시 벽돌처럼 포개어 묶어놓으면 이제 쓸 준비가 끝난 것이다. 필사가는 야자잎 한 장씩을 손에 들고 철필로 긁어 글을 쓰고 그 위에 먹물을 먹인 후 닦아낸다. 이렇게 작성된 기록은 한 장씩 철공을 관통하는 실에 꿰어져 철하게 된다[도판 3].
철공은 가운데 하나만 뚫거나 왼쪽이나 오른쪽 하나만 뚫기도 하는데, 대체로 왼쪽과 오른쪽 하나씩 각각 뚫어서 실을 관통시켜 야자잎을 철하게 된다. 철실은 면실을 꼬아서 만든다. 한쪽 끝을 구멍 크기보다 크게 매듭지어 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두 구멍을 다 관통시켜 철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야자잎들이 흩어지지 않아 순서가 흐트러질 이유가 없다. 바깥쪽 커버는 나무를 깎아서 만들거나 대나무로 만드는데, 야자잎과 동일하거나 약간 큰 크기로 만들고 야자잎의 철공과 같은 자리에 구멍을 내고 함께 철하게 된다. 이렇게 긴 노고를 통해 한 권의 경전이 만들어졌던 것이다[도판 4].
이제 위와 같이 제작된 불교 경전의 내부를 잠시 살펴보자.
‘도판 5’는 근대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스리랑카에서 제작된 빨리어 경전이다. 율장대품 『마하박가(Mahāvagga)』의 일부분이다. 패엽의 폭이 대략 6cm가량 되는데 10줄로 매우 섬세한 백조체로 정성스럽게 필사됐다.
언어는 중세 인도-아리아(Indo-Arya)어 계통의 하나인 빨리어인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불경들은 이 언어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작은 원들을 조밀하게 붙여놓은 듯한 이 문자는 스리랑카 문자인 싱할라(Sinhala) 문자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꾼달리(kuṇḍali)’라 부르는 뱀과 같은 연결선을 볼 수 있다(실제로 ‘뱀’을 뜻한다). 이는 본래 마침표 역할을 하지만, 때로 지면의 장단을 조절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싱할라 문자는 근본적으로 북인도의 초기 문자 형태인 브라흐미 문자에서 파생한 것이지만, 브라흐미 문자의 초기 남인도 변형 형태인 그란타(Grantha) 문자 형태에서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싱할라 문자는 오랜 발전 단계를 거치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됐다.
‘도판 5’에 보이는 패엽경의 내용은 불교 수행자들의 계율(戒律)을 담고 있는 율장(律藏) 대품인 『마하박가』의 일부분을 적고 있다. 『마하박가』는 불교교단의 제도와 각각의 규정들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배경 내용으로 이뤄진다. 이 패엽경은 『마하박가』 전체가 아니라 후반부에 해당한다. 후반부에는 주로 짧고 간단한 사례들을 통해 어떤 경우에 출가가 허락되고 또는 허락되면 안 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출가에 관련된 소소한 규정들도 설명하고 있다. 불경의 특성상 유사한 경전의 내용들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몇 개의 단어들을 제외하고 경문의 구절들을 그대로 반복해 쓰고 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있는 패엽경은 비교적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필사(筆寫)도 매우 정성스럽게 이뤄져 연구와 보존에 매우 유용하다. 패엽경의 물리적 형태를 이해하거나 제작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흔적이 여전히 잘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필사하기 전에 야자잎을 재단한 후 철공을 뚫고 전체 패엽들을 정렬해서 압박하여 누르는 과정이 있는데, 이 패업경에서 그 압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패엽 측면의 훼손을 막기 위해 뜨겁게 가열된 철다리미로 지지는 과정이 있는데, 이런 흔적들도 잘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패엽경이 아주 최근에 제작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위 ‘백조체(Haṃsalipi)’라고 부르는 이 패엽경의 서체는 한 장의 잎 위에 매우 작게 적는데 천천히 주의를 기울여 써야 하고, 따라서 깊은 정성과 아름다움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경전은 근자에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패엽경 제작의 전통은 비록 급격히 쇠락해 가고 있으나, 미약하게나마 인도의 따밀이나 오릿사 지역 등에서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특히 인도의 오릿사 지역은 패엽 위에 철필로 그림을 그리는 경전화(經典畵) 전통이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패엽경 경전에 필사를 하고 작은 그림을 경전에 그려 넣는 전통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대신 야자잎에 철필로 그림을 그리는 관습은 전승되고 있다. 무형문화를 보존하고자 하는 정부의 관심도 있거니와 관광객을 위한 상품이 되어 지역 예술가들의 생계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글·사진. 심재관
심재관
상지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에서 고대 인도 의례와 신화 연구로 석·박사를 마쳤다.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힌두교의 문헌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필사본과 금석문 연구를 포함해 인도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