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佛性이 익어가는 미황사의 부도밭
[해남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 부도가 아름다운 절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을 승탑이라고 하는데, 보통 ‘부도(浮屠)’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원래 부도란 ‘붓다’를 음역한 것이어서 ‘불교’와 같은 뜻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승탑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됐다. 이러한 부도가 모여 있는 곳을 ‘부도전’, 혹은 ‘부도밭’이라고 한다. 마치 밭에 곡식이 자라듯 부도들이 솟아 있어 그랬거니 싶지만,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즉 ‘복전(福田)’이란 말도 있는데, 스님께 공양을 드리거나 절에 시주를 하는 행위는 곧 나에게 돌아올 복을 키우는 것과 같기에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도밭이란 불성이 자라는 곳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숙한 생명을 배양하는 인큐베이터에서 생명이 숙성되는 것처럼, 스님들의 수행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도 안에서도 점차 완성돼 가는 중이라고 봤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부도 하나하나가 마치 ‘성불의 인큐베이터’처럼 보인다.
미황사의 명소, 부도밭
역사가 깊은 사찰들은 그만큼 많은 고승을 배출했기에 부도가 빽빽이 모인 부도밭을 품고 있다. 사찰 입장에서는 그 사찰의 역사요, 훈장인 셈이다. 부도밭으로 유명한 사찰로는 보조국사비와 부휴, 벽암 스님의 탑이 세워진 송광사 부도밭,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의 부도가 세워져 있는 대흥사 부도밭 등을 들 수 있다. 이 절들은 각각 고려시대의 16대 국사, 조선시대의 13대 종사와 강사를 배출한 절이어서 부도밭이 특히 더 잘 가꿔진 듯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널리 알려진 부도밭이 바로 미황사 부도밭이다. 이곳의 부도들은 마치 역대 스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 미황사를 방문했다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더구나 다른 곳의 부도밭과 달리 미황사는 부도밭 안에 들어갈 수 있어, 한결 가까이서 부도 하나하나를 감상하며 부도 조각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
미황사 부도밭은 대웅보전에서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부속 암자인 부도암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다시 서쪽으로는 사리탑 6기가 세워진 서부도밭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이 부도암의 부도밭이다. 부도밭은 전체적으로 서북향이며, 총 5개의 비석과 21개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부도밭 바깥에는 탑신만 남은 탑이 하나 더 있다.)
설봉당·벽하당 승탑과 비
대개 부도밭의 안쪽 열에서부터 더 오래된 탑들이 자리 잡고, 앞으로 나오면서 시대가 내려오는 경향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우선 가장 안쪽, 가운데 있는 탑에 다가가 본다. 대흥사 13대 종사 가운데 한 분이신 설봉당(雪峰堂, 1678~1738) 스님의 탑이다.
1739년에 세워진 이 탑은 마치 건물 한 채가 올라가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미황사 부도밭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한껏 멋을 낸 십자형의 지붕은 마치 정말 나무로 지은 건축인 것처럼 기왓골과 서까래까지 조각했다. 이처럼 탑의 윗부분을 건축처럼 표현하는 방식은 우리나라에 부도가 처음 등장했던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나타났지만, 조선시대에는 잘 사용되지 않았기에 주목된다.
탑 몸체의 정면과 좌우에는 여닫이문 두 짝을 간단히 새겼는데, 정면은 문고리가 2개, 좌우 측면은 하나씩이다. 그런데 측면의 경우는 외짝 문고리가 반대편 문짝의 걸쳐지는 곳에 걸려 있지 않다. 고리가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잠기지 않았으니 누구든 열고 들어와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면의 두 짝 고리도 전통적인 부도의 경우는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데, 여기서는 자물쇠가 없다.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라는 듯한 의미로 읽힌다.
반면 부도 뒷면에는 장중한 용의 얼굴을 부조했다. 이 탑의 다른 조각들이 귀엽고 소박한 데 반해 이 용만큼은 법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 반전 매력이다.
이렇게 십자각 형태의 전각과 용을 보면 안성 칠장사 괘불 하단의 도솔천궁이 떠오른다. 설봉당 스님의 탑처럼 십자각 형태의 도솔천궁은 다시 용이 감싼 역삼각형의 높은 수미산 위에 올라가 있는데, 전체적인 윤곽이 마치 부도탑과 유사하다. 다만 수미산 대신에 부도탑에서는 팔각형의 기둥이 받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 수미산을 감싼 용을 부도탑에서는 건물 뒤편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설봉당 스님의 부도탑을 만든 제자들은 아마도 입적한 스승이 도솔천궁에 오르시기를 바랐던 것인가 보다. 도솔천궁은 다음 생에 태어나면 성불하게 되는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이 머무는 곳이다. 그러니 스승께서 다음 생에 부처가 되실 것이라 믿었던 제자들의 마음을 담은 탑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탑의 진정한 매력은 이 몸체를 받치고 있는 하단에 있다. 팔각형의 기둥에 돌아가며 여러 동물이 새겨져 있는데, 긴꼬리도마뱀(장지뱀), 거북이, 게와 물고기, 오리 등이다. 물이나 물가에 사는 동물들인데, 아마도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향수해(香水海)라는 바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나 해남은 바닷가에 있으니, 마치 해남의 바다와 강에서 올라온 이런 동물들이 이곳으로 와서 수미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연출한 것 같다. 마치 현실과 가상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포털(portal, 문)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게와 물고기다. 게가 물고기를 끌고 올라가려고 하는 듯하다. 이 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은 모두 물과 뭍을 오간다. 그러나 물고기는 뭍으로 갈 수 없다. 그래서 게가 동료인 물고기를 힘써 이끌어 도솔천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 아닐까?
제자들이 도솔천에 태어나셨을 것이라 믿었던 설봉당 스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하다면 그 옆에 세워진 설봉당대사 탑비를 보자.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은 매우 전통적인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형식이다. 이 거북은 마치 주인이 돌아오자 오래 기다렸다는 듯 같이 놀자고 공을 물고 온 강아지처럼 부도밭은 찾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이해 준다. 자세히 보면 턱수염 같은 것이 내려와 있는데, 이 수염과 목 사이에 구멍을 뚫어 입체적으로 만든 흔적이 보인다. 돌 조각에서 이처럼 작은 구멍을 낸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인데 조각가가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눈을 돌려 설봉당 스님 탑의 왼쪽(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보면 조선시대의 유교식 비석 형식으로 세워진 탑비를 볼 수 있는데, 맨 위에 ‘벽하대사사리탑’이라 쓰여 있다. 설봉당 스님과 마찬가지로 대흥사 13대 종사의 한 분이신 벽하당(碧霞堂, 1676~1763) 스님의 탑비다. 기단의 정면과 지붕 앞뒤에 각각 용의 얼굴을 조각했으며, 또 기단의 네 모퉁이, 지붕의 네 처마와 용마루 좌우 끝에 용의 머리가 새겨져 모두 13마리의 용이 있다. 그런데 기단부의 왼쪽 옆에만 새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노닐고 있다. 용들이 삼엄하게 지키는 가운데 새가 한가로이 주변을 거니는 것이 꼭 악어 위의 악어새처럼 아슬아슬해 보인다. 어쩌면 겉으로는 엄격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애로웠던 벽하당 스님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벽하당 스님의 사리가 모셔진 탑은 그 옆에 세워져 있다. 탑비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유행한 달걀 모양의 둥근 몸체를 가진 탑이다. 그런데 세부 조각은 독특한 개성을 담았다. 심플한 몸체와 달리 지붕은 지붕골과 처마, 막새기와, 그리고 처마 끝의 용머리 장식까지 조각됐다. 팔각형의 몸체 받침에는 돌아가며 꽃과 동물들이 새겨져 있는데, 앞서 설봉당 스님 탑에서 본 게와 물고기도 보이고, 용의 얼굴, 꼬리가 긴 공작 같은 새도 보인다. 그 아래로 이들 탑을 받치고 있는 네모난 기둥에는 모퉁이마다 거북이, 자라, 물고기, 용 같은 동물들이 마치 탑 위로 기어오르는 것처럼 조각돼 있다.
이처럼 스님 탑에 동물을 많이 새기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동물들과도 대화를 나눴다는 것처럼 이 스님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는 의미일까? 혹은 자비로운 분임을 동물들도 직감적으로 알고 모여들 정도였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리라.
낭암·이봉·응운·금하대사 승탑과 비
부도밭에 세워진 다섯 개의 탑비 중 세 번째 비의 주인공은 낭암(朗巖, 1761~1838) 스님이다. 이 탑비는 부도밭의 맨 앞 열, 그것도 가운데 있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며, 특히나 밝은색 돌에 새겨져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 비석도 설봉당 탑비처럼 거북이가 받치고 있는데 목이 짧고 더 동글동글하면서 마치 자신이 모시고 있는 비의 주인공인 낭암대사가 그리운 듯 고개를 뒤로 돌려 슬픈 눈으로 비석을 올려다보는 모습이다. 부리부리한 눈망울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다.
이 비석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비문이 행서로 쓰인 점이다. 보통 비문은 예서나 해서로 또박또박 쓰여 잘 읽을 수 있도록 하는데, 여기서는 다소 휘갈겨 쓴 행서체다. 드물게 행서체의 비석이 있기는 하지만, 낭암대사 탑비는 조금만 더 휘갈겼으면 초서라 할 만큼 갈겨썼다. 이렇게 빠르게 써나간 글씨체가 시원시원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마 정자체로 쓴 글씨보다 이런 행서체를 돌에 새기는 것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부드러운 붓질의 빠른 속도감을 딱딱한 돌에 조각으로 옮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뛰어난 각수(刻手)의 솜씨 덕분에 마치 종이에 휘갈겨 쓴 것처럼 필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낭암대사 탑비에 속하는 탑은 보이지 않는다. 근처에 ‘응화탑’이라는 탑과 아무것도 안 쓰인 탑이 하나 있는데, 둘 중의 하나가 낭암대사 탑일까? 그런데 응화탑은 탑비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고, 아무것도 안 적힌 탑이 바로 옆에 있어 더 관련이 있어 보인다. 더구나 탑비의 탑신을 보면 마치 수석을 올려놓은 것처럼 자연적으로 울퉁불퉁한 돌이다. 이렇게 수석 같은 돌만 떡하니 올려놓으니 마치 선문답을 하는 것 같다. 낭암대사 탑비의 파격적인 빠른 서체를 생각해 보면 이 수석 같은 탑이 낭암대사의 탑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한다.
설봉당 스님 탑처럼 해학적인 모습의 동물, 물고기가 새겨진 탑도 여러 기가 있고, 이 밖에도 개성이 넘치는 탑들이 많다. 오른쪽 맨 앞에 자리한 이봉당(离峯堂) 스님의 탑은 몸체가 마치 연잎밥처럼 연잎으로 감싼 듯 잎맥이 드러나 있고, 그 받침도 연잎으로 감싼 듯 자연스럽다.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응운 스님의 탑은 마치 뒤에 세워진 부도가 자신 때문에 가려질까 일부러 기울어진 것처럼 비스듬히 세워져 재밌다. 금하(錦河, 1696~1739)선사의 비는 비석 몸체가 정사각형에 가까운 것이 특이한데, 그래서 비명도 정면과 측면에 ‘금하대선’과 ‘사행적비’라고 나눠 쓴 것이 파격적이다.
내려가기 전에 옆에 있는 부도암의 「미황사 사적비」를 보는 것도 잊지 말자. 1692년에 세워진 이 비는 현재는 터를 돋워 부도암을 세우느라 땅 밑에 푹 꺼져 있는 모습이지만, 거대한 비석의 위용은 가려지지 않았다. 특히 비석을 받치고 있는 바위는 자연 암반인데도 마치 거북이와 꼭 닮아서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하다. 왜 여기에 비를 세웠는지 짐작게 한다. 이 비석에는 미황사의 창건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 역사가 담겨 있다. 내려오는 길에는 서부도전에도 들러보면 좋다. 가운데 세워진 고압당 스님의 탑은 설봉당 스님의 탑처럼 게와 물고기 등의 조각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어 꼭 봐야 한다.
이처럼 오래전 입적하신 스님들의 부도를 둘러보면 왠지 그분 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내려오는 기분이다. 좋은 시각의 언어로 된 설법을 듣는 것도 복을 심는 것이니 그래서 또한 부도밭인 것일까?
사진. 유동영
주수완
불교미술사학자이자 우석대 경영학부 예술경영전공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인도 및 실크로드에서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불교미술 도상의 발생과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 『불꽃 튀는 미술사』, 『미술사학자와 읽는 삼국유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