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 용이 나르샤] 용은 어떻게 제왕의 상징이 되었나
육룡이 ᄂᆞᄅᆞ샤
海東(해동) 六龍(육룡)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天福(천복)이시니 古聖(고성)이 同符(동부)ᄒᆞ시니
불휘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뮐ᄊᆡ 곶됴코 여름하ᄂᆞ니
ᄉᆡ미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그츨ᄊᆡ 내히 이러 바ᄅᆞ래가ᄂᆞ니 …
千世(천세) 우희 미리 定(정)ᄒᆞ샨 漢水北(한수북)에 累仁開國(누인개국)ᄒᆞ샤 卜年(복년)이 업스시니
우리나라 여섯 용이 날으시어 일마다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니 옛 성인이 똑같으시도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 성하도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기에 내를 이뤄
바다에 이르는도다 …
천 년 전에 미리 정하신 한강 북쪽에 오랜 덕을 쌓아 나라를 여시니 왕조가 끝 없도다
- 「용비어천가」 중에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한글로 지은 최초의 글 「용비어천가」이다. 조선의 창업을 기리는 서사시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와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에 새 나라 조선을 비유하며 왕조의 끝없는 번영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용비어천가」의 당당한 첫 문장, “해동 육룡이 ᄂᆞᄅᆞ샤”라는 문구는 자못 웅장하다. 이때의 여섯 용은 세종대왕의 6대조인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을 이르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첫 번째 왕이지만 조선을 세우기 이전의 4대 선조들도 모두 추존해 왕의 반열에 올리고 여섯 용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용은 다양한 상징을 갖는다. 우리에게 바다와 우물에 사는 용왕님은 너무나도 친숙한 존재다. 비를 내리고, 기기묘묘한 기상변화를 가져오며, 꿈에 나타나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예지한다. 전국 각지의 수많은 사찰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용 또한 중요한 문화상징으로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지켜왔다.
이러한 여러 상징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제왕의 상징’이다. 왕조시대 용은 임금과 동의어로 사용돼 임금과 관련된 모든 단어에는 ‘용(龍)’ 자를 붙였다.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顏)’, 어좌(御座)는 ‘용상(龍床)’, 임금의 눈물은 ‘용루(龍淚)’라고 했으며, 임금이 즉위하는 것을 용이 날아오른다는 뜻으로 ‘용비(龍飛)’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용은 어떻게 제왕의 상징이 됐을까?
수신(水神), 정치 권력을 얻다
제왕의 상징이 형성되기 이전, 그리고 불법의 수호자로서의 용 관념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용 신앙은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돼 왔다. 뱀과 악어 등의 파충류, 혹은 구름 같은 기상현상 등이 그 기원적 형태로 추정된다. 지역에 따라 그 최초의 신앙 형태는 각기 다르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공통점은 물과 관련이 있는 수신(水神) 성격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수렵채집의 단계를 지나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집약적인 집단 노동과 이를 통제하는 권력 계층이 생겨났다. 안정적인 곡물 재배를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이뤄지는 물의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적 사안이 됐다. 즉 물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치수(治水)의 능력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우두머리의 임무이자 정치적 권력의 원천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고 물을 관할하는 수신(水神) 신앙은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됐다. 이에 더해 물뿐만 아니라 천공을 날아다닐 수 있는 용의 능력은 하늘 뜻을 전달하는 매개자로서, 혹은 천명(天命)의 현시(現示) 그 자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드디어 용은 초자연적인 강력한 힘과 지고의 영적 존재로 숭배받았던 민간신앙을 토대로 인간 사회 내에서도 정치적 권력의 상징을 얻게 된 것이다.
건국 시조의 용손(龍孫) 신화
제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용 상징을 활용한 것은 그 역사적 연원이 매우 오래됐다. 중국의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시기부터 용은 정치적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돼 나타난다. 특히 건국 시조의 탄생 신화에서 이 같은 상징이 강조됐다. 중국의 고대 제왕인 염제는 인간 어머니와 신룡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요임금도 용의 자손이라는 신화가 전한다. 한고조 유방 역시 어머니가 교룡과 교합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백수건달과 다름없었던 자신의 출신을 지우고 천자의 권위를 얻고자 했다. ‘용(龍)’ 자를 연호로 쓰기도 했는데 한나라 선제(宣帝)가 사용했던 ‘황룡(黃龍)’, 동한 공손술(公孫述)의 ‘용흥(龍興)’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 모두 혼란한 사회였다는 점이다. 즉 정치적 카리스마를 얻기 위해 상징물로 용을 전면에 내세웠다.
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을 용손(龍孫) 신화에서 찾고자 한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 주몽은 해모수와 용왕의 딸 유화 사이에서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로 북부여를 건국했는데, 그는 하늘에서 내려올 때 다섯 마리의 용을 타고 내려왔다. 백제 무왕의 어머니는 서울 남쪽 연못인 남지(南池)의 용 사이에서 무왕을 낳았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는 계룡(鷄龍)의 옆구리에서 탄생한 알영을 부인으로 맞는다. 고려는 어떠한가. 고려를 개국한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서해 용왕의 딸과 혼인해 왕건의 아버지 융(隆)을 낳았다. 서해 용왕은 왕건의 조상신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건국 신화의 전통이 이어져 조선 개국을 노래한 서사시 「용비어천가」의 첫 문장 “육룡이 ᄂᆞᄅᆞ샤”가 탄생한 것이다.
용의 발톱을 보라
이제 용은 명실상부 임금의 상징이 됐다. 임금은 인간 사회의 정점에 있는 존재다. 임금과 한 몸이 된 용 역시 인간 사회의 위계 시스템에 편입됐다. 자연을 초월한 상상의 존재였던 용 역시 품계를 갖게 된다. 권력의 신성성을 가시화한 용 문양의 여러 요소 중에서 역대 제왕들이 가장 중시했던 것은 ‘용의 발톱(용조龍爪)’이다. 용의 발톱이 많을수록 그 위계가 높다고 여겨졌으며 대개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오조룡(五爪龍)이 황제의 대표적 상징으로 사용됐다.
중국 초기 유물에서 나타나는 용 가운데 발이 없는 뱀 형태의 용이 다수 보인다. 상나라 이후 용은 두 개의 발에 뱀과 같은 꼬리를 가진 것으로 표현되기 시작하며, 주나라를 거쳐 한나라 시기에 이르면 드디어 네 다리에 날카로운 세 개의 발톱을 가진 표현형식을 갖추게 된다. 송나라 시기에 이르면 용의 형태가 정형화된다. 이른바 용이 아홉 종류의 동물(낙타 머리, 사슴 뿔, 토끼 눈, 소 귀, 뱀 목덜미, 조개 배, 잉어 비늘, 매 발톱, 호랑이 주먹)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구사(九似)’ 원칙을 충실하게 반영한 용 문양이 도식화돼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이다. 황제의 상징인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이 출현한 것도 북송 말엽의 일이다.
당대 이후 황실에서는 용 문양을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규제했으나 민간에 용 신앙이 이미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원대에 이르러 용 문양을 황실에서만 쓸 수 있도록 하는 규제가 법제화된다. 몽골제국 제5대 칸이자 원나라의 시조인 쿠빌라이는 용 문양이 시중에서 판매·유통되는 것을 금지시켰고 이를 어길 시에는 엄중히 다스린다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령도 유명무실해지자 원나라는 1295년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 문양을 따로 제정하여 선포하고 이를 민간에서 사용할 경우 모반죄로 처형하기로 했다. 이때 제정한 ‘황제의 용’ 문양의 핵심이 다섯 발톱과 두 개의 뿔인 ‘오조쌍각(五爪雙角)’ 형태다. 이후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내내 다섯 발톱을 가진 오조룡은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 권력의 신성한 상징으로 전면 부상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용 문양을 사용한 왕의 복식인 용포(龍袍)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외교적 역학관계 속에서 조선의 왕들은 용의 문양에서 드러나는 위계질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 시기에 명나라 제도에서 친왕의 복식 제도가 오조룡복임을 확인하고 사조룡보다 한 단계 위인 오조룡복을 보내줄 것을 중국에 요청한 기록이 보인다. 이는 용 발톱의 숫자가 국제관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대변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궁궐에는 용이 산다
임금의 거처인 궁궐에는 용이 넘쳐난다. 임금의 의복에 용이 수놓아진 것은 물론이고 각종 기물과 건축 곳곳에서 용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건축의 영역에서 용은 다양한 모습으로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는 용에게 아홉 아들이 있다는 용생구자(龍生九子)설을 반영한 문화 전통이다. 즉 돌비석 아래에는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하는 거북을 닮은 비희(贔屭)가, 전각의 지붕 위에는 높고 험한 곳에서 먼 곳을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이문(螭吻)이 있다는 식이다. 이러한 건축 상징체계 속에서 전각의 위, 문 상단, 용좌, 문고리, 다리의 기둥에서 시작해 칼의 손잡이와 솥뚜껑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용들이 왕권을 호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단연코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용이 하나 있다. 조선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경복궁 근정전 천장에 있는 용이다. 중앙에 화염을 뿜어내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황룡 두 마리가 구름 속을 날고 있다. 이들은 각기 네 발을 활짝 펼치고 있는데 별과 같이 반짝이는 모습의 발톱 일곱 개가 눈에 들어온다. 무려 발톱이 일곱 개나 되는 칠조룡인 것이다. 조선 말 돌연 등장한 이 칠조룡에 대한 당시의 문헌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위태롭던 당시 조선이 다시 우뚝 서기를 바라던 염원으로 해석할 뿐이다.
유현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려사』 「예지(禮志)」 가례(嘉禮)를 통해 본 고려시대 국속(國俗)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암각화와 바위신앙, 의례 상징과 민속 분야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