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역사: 사찰로 온 헤라클레스] 예적금강과 팔금강

도량의 호법신장, 팔금강도

2023-10-28     김경미

번幡, 도량을 장엄하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힘의 원천이었으며, 오랫동안 우리의 삶과 문화를 지탱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전래된 불교가 그러한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부처가 계신 절을 찾아 지친 영혼을 달랬고 기도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같은 야외 의식에 많은 사람이 모여 가족의 안녕과 행운을 발원했다.

이 법회에는 법을 펼치기 위해 부처와 여러 보살 및 권속(眷屬)이 봉청(奉請)되고, 신성한 의식을 호위하는 불교의 호법신장(護法神將) 역시 그 자리에 참석했다. 금강역사, 사천왕, 팔부중 같은 호법신은 삼국시대부터 사찰의 문이나 탑(塔)을 수호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의례의 발전으로 104위 신중(神衆)까지 등장한다. 이들 104위 신중에는 『화엄경』 「세주묘엄품」에 나오는 39위 신중 일부와 천부중, 대예적금강, 사보살, 팔금강, 위태천, 천룡팔부 등 여러 신들이 등장한다. 

세종 2년 “기신재와 추천재를 수륙재로 합해서 설행하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1420년 8월 22일)에 나온다. 영산재나 수륙재 같은 불교의례가 15세기 전반에는 성립됐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야외에서 진행되는 재의식에는 괘불(掛佛)을 중앙에 놓고 번(幡)을 걸어 도량을 장엄(裝嚴, vyūha)한다. 도량을 장엄하는 번은 의식이 이뤄지는 법당 안팎을 청정하고 신성하게 한다. 번을 통한 도량 장엄은 의례와 결합해 경전의 구성과 내용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듯 재현하기도 한다. 

도량장엄번은 오여래번(五如來幡), 칠여래번(七如來幡),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幡), 사보살번(四菩薩幡), 대예적금강번(大穢跡金剛幡), 팔금강번(八金剛幡), 십이지번(十二支幡)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도량장엄번은 상·중·하단의 위계에 따라 배치되며, 존상의 모습을 직접 그리거나 명호만을 적은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의식에는 범패(梵唄)가 함께한다. 번은 눈을 통해, 범패는 소리를 통해 도량을 청정하게 하고 도량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보호한다.

 

불교의례에서 예적금강과 팔금강

팔금강은 예적금강과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으로서 신중으로 모셔져 있다. 팔금강이 불교를 보호하는 호법신장이라는 특징은 의례를 통해 분명하게 전달된다. 벽암각성(碧巖覺性)의 문도인 지선(智禪)이 각 사찰에서 거행하는 불교의식 절차를 정리한 『오종범음집』(1661)에 팔금강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의식집 중 불보살 등을 도량에 모시는 보청(普請)의식을 살펴보자. 상단 예불 의식인 ‘영산회작법’에서 괘불을 걸기 전, 사(四)보살과 팔금강을 청해 도량을 장엄하고 위호하게 했다. 사보살은 금강권보살, 금강색보살, 금강애보살, 금강어보살을 말한다. 

팔금강과 사보살을 의례에 청하는 절차는 1570년 안동 광흥사에서 간행된 『금강반야바라밀경 변상』에서도 볼 수 있다. 첫머리에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금강경을 설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바로 제2~5판의 상단에 <옹호(擁護)>라는 도상과 함께 팔금강을 봉청하는 팔금강이 묘사되는 <청금강(請金剛)> 도상이 이어진다[도판 1].

[도판 1] 광흥사 간행 금강경 변상도,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죽은 사람을 위한 구복의식과 재난구제 성격을 지닌 ‘금강회상(金剛會上)’에서, 『금강경』을 독성하거나 예배할 때 팔금강과 사보살이 봉청돼 경을 독송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 활발히 간행된 의식집을 통해서도 팔금강이 사보살, 대예적금강 등이 함께 도량장엄번으로 배치되는 배경을 볼 수 있다. 조선 18세기 의식집 『범음집』 (1721), 『작법귀감』(1827)과 『석문의범』(1931) 「신중작법」 상단에서 104위 신중의 명칭과 봉청하는 순서가 확인된다. 『석문의범』 상단에서는 대예적금강, 팔금강, 사보살, 십대명왕을 차례로 부르고 있다. 이들은 신중으로 함께 각각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저는 성품에 탐욕이 많았으나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이 몸을 관하는 수행을 해 신령한 광명이 안으로 응집해 지혜의 불을 이루었습니다. 이로부터 모든 부처님이 저를 화두(火頭)라 이름하셨고, 화광삼매(火光三昧)의 힘으로 아라한이 되었기에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실 때 저는 역사(力士)가 되어 친히 마귀들을 항복받았습니다.”

- 『능엄경』 중에서

예적금강은 여러 개의 팔을 가지고 음탕한 마음을 변화하여 지혜의 불로 나타내므로 화두금강(火頭金剛)이라고도 한다. 얼굴은 셋이며, 얼굴마다 눈이 세 개다. 손에는 각각 다른 물건을 쥐고 있다. 팔금강을 데리고 불법을 위호하고 중생을 교화시키는 명왕으로 악(惡)을 없애는 힘을 지녔다[도판 2]. 『작법귀감』 104위 신중 상단에서 제일 처음 예적금강이 봉청되고, 바로 다음에 팔금강을 청한다. 

[도판 2] 서울 흥천사 대예적금강번, 조선 후기, 사진 김경미
얼굴 세 개에 각각 세 개의 눈이 있다.

『작법귀감』에서 팔금강은 청제재금강, 벽독금강, 황수구금강, 백정수금강, 적성화금강, 정제재금강, 자현신금강, 대신력금강 순서대로 봉청된다. 팔금강의 명칭은 경이나 의궤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이러한 팔(八)금강은 팔대보살이 팔대명왕으로 화현(化現)하고, 다시 금강으로 나타난 도상이다.

[표] 팔대보살 → 팔대명왕 → 팔금강으로 화현하는 과정   

팔대보살이 변한 팔대명왕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마두명왕, 미륵보살의 화신인 대륜명왕, 허공장보살의 화신인 군다리명왕, 보현보살의 화신인 보척명왕, 금강수보살의 화신인 강삼세명왕, 문수보살의 화신인 대위덕명왕, 제개장보살의 화신인 부동명왕, 지장보살의 화신인 무능승명왕으로 보통 분노하는 모습이다. 

명왕이 금강으로 변하면서 ① 청제재금강(靑除災金剛), ② 벽독금강(碧毒金剛), ③ 황수구금강(黃隨求金剛), ④ 백정수금강(白淨水金剛), ⑤ 적성화금강(赤聲火金剛), ⑥ 정제재금강(定除災金剛), ⑦ 자현신금강(紫賢神金剛), ⑧ 대신력금강(大神力金剛)이 됐다.

『석문의범』의 「신중작법」에는 팔금강의 임무를 밝혀놓았다. 청제재금강은 중생이 지은 전생의 재앙을 없애주는 금강신으로, 금강성자의 분신이라고 하며 동방(東方) 신이다. 백정수금강은 보장(寶藏)을 주재하여 번뇌를 없애주는 서방(西方) 신이다. 황수구금강은 모든 공덕을 주재하여 소망을 성취시켜주는 중앙(中央) 신이다. 적성화금강은 부처님을 보면 몸에서 빛을 내고 바람처럼 달려가는 남방(南方) 신이다. 정제재금강은 자비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지혜로써 재난을 없애준다. 자현신금강은 굳게 닫혀 있는 마음의 깊은 곳을 파헤쳐 중생들을 깨우쳐준다. 벽독금강은 중생들의 모든 독을 없애준다. 대신력금강은 사물에 맞춰 중생을 조절해 지혜를 성취하게 한다는 뜻을 지닌다. 

『석문의범』에 의하면 팔금강은 동쪽은 홀수인 1·3·5·7번째 금강을 두고, 서쪽은 짝수인 2·4·6·8번째 금강을 둔다. 

 

불화 속의 팔금강

팔금강을 불화로 그리면 ‘팔금강도’가 되고, 의식을 위한 도량장엄번으로 만들면 ‘팔금강번’이 된다. 팔금강은 조선시대 불화나 괘불도에서 화면 안의 권속을 외호하는 듯 가장자리에 표현되기도 하며, 따로 한 폭씩 그려지기도 한다. 각기 한 폭씩 그려지는 것은 도량장엄번으로 영산재, 수륙재와 같은 야외 의식에서 괘불 주위에 걸렸다. 팔금강은 금강역사처럼 몹시 화난 얼굴에, 음영을 뚜렷하게 표현한 근육질의 몸을 하고 도끼·금강저·보검·여의주·창 같은 무기를 들고 있다. 

팔금강이 괘불 안에 그려진 것으로 <김룡사 영산회 괘불도> (1703)[도판 3]를 살펴보자. 영산회 괘불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한 장면으로, 부처가 단독으로 나타나거나 여러 권속이 부처와 함께 표현되기도 한다. 

[도판 3] 문경 김룡사 영산회 괘불도(보물), 1703년, 출처 문화재청
괘불의 양 끝 가장자리에 팔금강이 위치한다.

<김룡사 영산회 괘불도>에서 팔금강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설법을 듣기 위해 가득 모인 청중을 위호하는 듯 화면 양 끝에 세로 일렬로 표현됐다. 석가모니를 비롯해 십대제자, 팔부중, 사천왕, 팔금강, 천인 등 영산회의 장면을 구현한 그림이다. 팔금강은 부처의 세계가 구현된 신성한 도량을 수호하고 있다. 김룡사 괘불도는 수원(守源)을 포함한 6명의 화승이 그렸는데, 이들은 다른 작품활동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팔금강은 머리에 보관을 썼으며, 뒤로는 광배 대신 타오르는 화염이 표현돼 있다. 얼굴에는 귀걸이 같은 장신구를 했으며, 벌거벗은 상체는 근육질의 다부진 몸을 보여주고 있다. 손 모양을 보면 2위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6위는 보검을 지물(持物)로 들어 부처님과 권속을 외호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도량장엄번이 정립되기 전의 신중작법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한다. 

괘불 의례의 발전과 함께 의식집이 널리 보급되면서 팔금강은 도량장엄번으로 많이 제작됐다. 통도사에 소장된 괘불과 팔금강번이 대표적이다.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도판 4]은 1767년에, <팔금강번>[도판 5]은 1736년에 그려져 팔금강번이 시기적으로 30년 정도 앞선다. 그런데 괘불탱을 조성한 기록을 남긴 「개성괘불기」에 따르면, 1766년 법회를 하다가 이전의 것이 바람에 찢어져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즉, 1736년에 조성된 팔금강번은 이전의 괘불과 함께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판 4]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보물), 1767년,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 및 제공
[도판 5] 통도사 팔금강번(보물), 1736년,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 및 제공
[도판 5] 통도사 팔금강번(보물), 1736년,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 및 제공

<김룡사 영산회 괘불도>에서는 팔금강이 화면 안에서 부처와 권속을 외호했다면, 통도사의 경우 석가모니 부처는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에 홀로 봉안되고 팔금강은 각각 제작돼 도량장엄번으로 역할 했음을 알 수 있다. <개심사 팔금강번>(1772) 역시 비슷한 형식이며, 이런 형식은 18세기 전반에는 일반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까지 이어지면서 근대까지 전국에 걸쳐 확인된다. 1917년에 제작된 서울 <미타사 도량장엄번>[도판 6]은 <미타사 아미타여래괘불도>를 1915년에 조성한 후, 다시 몇 년간 재원을 마련한 뒤 조성했다. 

화면 윗부분에 순서와 명칭이 한글로 표기됐는데, ‘좌일 벽독금강, 좌니 백정수금강, 좌삼 정제재금강, 대신력금강, 우일 청제재금강, 우니 황수구금강, 우삼 적셩화금강, 우사 자현신금강’이다. 

[도판 6] 미타사 팔금강도, 1917년, 미타사 천불전, 사진 김경미
[도판 6] 미타사 팔금강도, 1917년, 미타사 천불전, 사진 김경미

서울 <봉원사 팔금강도>[도판 7]의 경우, 그림의 제목이 일정한 곳에 있지 않고 화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명호는 대부분 확인이 가능하다. <봉원사 팔금강도>의 명칭은 ‘청제재금강 좌일(靑除災金剛 左一), 백정수금강 좌이(白淨水金剛 左二), 정제재금강 좌삼(定除災金剛 左三), 자현신금강 좌사(紫賢神金剛 左四), 황수구금강 우일(黃隨求金剛 右一), 벽독금강 우이(辟毒金剛 右二), 적성화금강 우삼(赤聲火金剛 右三), 대신력금강 우사(大神力金剛 右四)’로 미타사와는 다른 순서를 보인다. 명칭은 같더라도 순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또한 이들 팔금강도의 화면 윗부분에는 고리가 있어, 고리에 매달아 사용한 번화(幡畵)의 기능도 보여준다.

[도판 7] 봉원사 팔금강도, 조선 후기, 사진 김경미
[도판 7] 봉원사 팔금강도, 조선 후기, 사진 김경미

괘불과 도량장엄번은 의식을 위해 제작하는 의례용 불화이다. 제작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하므로 수많은 사람의 간절한 발원으로 탄생한 커다란 원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팔금강은 호법신중으로 많은 의식에서 위력을 과시하며 도량을 장엄하는 가장 큰 임무를 수행했다. 

도량장엄번은 끈에 매달려서 바람에 날리면서 쉽게 훼손됐지만, 어쩌면 기도하는 이의 순수한 마음과 신심(信心)을 싣고 날아 부처님께 다가가 소원성취가 되지 않았을까. 

 

참고문헌
석찬, 『석문의범』, 1935
국립문화재연구소, 『영산재』, 민속원, 2003
김경미, 「영산재 의식집의 어산을 통해 본 경상도 괘불」, 
『한국괘불의 미: 경상지역』, 국립문화재연구원, 2022

 

김경미
「조선 전반기 티베트계 명양식 불교미술 영향연구」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의 전통사찰 등재 추진위원회’ 책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조선 불화와 세계 종교 유산을 연구하며, 고려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