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아, 어디 있느냐
제월당 통광 대선사 유고집
저작·역자 | 제월 통광 | 정가 | 25,000원 |
---|---|---|---|
출간일 | 2023-09-15 | 분야 | 불교 |
책정보 |
판형 신국판(152×225mm)|두께 24mm 312쪽 | 양장본 ISBN 979-11-92997-88-9 (03220) |
입적 이후 10년,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는
한국불교 대강백 제월 통광 스님의 마지막 문장
한암 중원, 탄허 택성 대종사로 이어지는 강맥을 이어 각성 스님, 무비 스님과 함께 ‘탄허 3걸’로 칭송받아 온 우리나라 불교 대표 강백, 제월 통광 스님. 오직 수행 정진과 후학 양성에 출가인으로서의 삶을 바친 스님은 또한 역사 속 큰스님들의 수행처로 알려졌으나 폐허가 된 지리산 칠불사를 복원하여 다시금 ‘동국제일선원’으로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글을 물으러 찾아오는 이들에게 항상 환희심을 내어 친절하고 곡진하게 가르쳐 주셨다는 스님. 아쉽게도 더 이상 글을 물을 수도, 법문을 청할 수도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스님이 생전 남기신 글들을 책으로 엮을 수 있게 되었다.
경전과 고승어록을 역해한 몇몇 서적만을 남기신 스님. 하지만 이 유고집만큼은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힘을 주어 꾹꾹 눌러 쓴 유고를 묶은 것이니, 스님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염원이 모여 간행된 통광 스님의 ‘첫 저서’라 할 수 있다.
말기 암으로 인해 삶의 끝자락에 선 한 인간의 ‘솔직함’과 불법을 향한 ‘절절함’, 생명에 대한 절체절명의 도전 속에서도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한 선사의 ‘강직함’이 문장마다 녹아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허둥지둥한 삶을 차분하게 식혀 줄 차 한 잔의 향기가 문장에 배어 있으니 책을 읽다 보면 스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이 책은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도 불법에 의지한 삶을 살라는 ‘대강백의 진심 어린 당부’, 그 자체이다.
제월당 통광 대선사 霽月堂 通光 大禪師(1940~2013)
1940년 지리산 칠불사 인근 의신 마을 출생. 1959년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如幻) 대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여, 1963년 동산(東山) 대종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같은 해 범어사 강원을 졸업하였으며, 수선안거 이래 10하안거를 성만했다.
1975년에는 동국역경원 연수원을 수료하였고, 1977년 탄허 대종사로부터 전법, ‘제월(霽月)’이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이후 1978년부터 약 20년간 지리산 칠불사를 복원 중창하였다.
1987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한 스님은 제13교구 쌍계사 본말사 사암연합회장(1997~ 1999), 쌍계사승가대학 학장(1998~2012), 제13교구 본사 쌍계사 주지(1999), 대한불교조계종 역경위원장(2007~2009)을 역임, 1999년부터는 지리산 칠불사 회주로 머물며 수행 정진, 후학을 지도해 왔다. 스님은 지난 2013년 9월 6일 지리산 칠불사 아자방에서 입적하셨다.
역서로 『고봉화상선요・어록』, 『초의다선집』, 『증도가 언기주』 등이 있다.
제1부 불이문
1. 토끼 뿔을 그리며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 선고 | 불법의 바다로 | 칠불사 | 문수와 보현 | 일없이 졸고 있는 납자
2. 선과 차의 세계
3. 계를 지키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다
4. 마음아, 어디 있느냐
5. 부처님의 마음과 부처님의 말씀
6. 전법게
7. 제법무아인데 무엇이 있어 윤회하는가
8. 생사는 본래 없는가
9. 무엇을 깨달았다는 거냐
제2부 금강문
1. 화두의 문
2.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쓸 것인가
3. 청학동을 찾아서
4. 산정에 오르는 길
5. 기도를 통해서도 견성오도할 수 있을까
6. ‘이 뭣고’, 『선가귀감』을 중심으로 선을 생각하다
생명에 대한 절체절명의 도전 속에서도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한 선사의 자전적 기록!
한암 중원, 탄허 택성 대종사로 이어지는 강맥을 이어 각성 스님, 무비 스님과 함께 ‘탄허 3걸’로 칭송받아 온 제월 통광 스님. 입적하실 때까지 오로지 수행 정진과 후학 양성에 힘써 온 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강백으로서 글을 물으러 오는 이들에게 항상 환희심을 내 친절하고도 곡진하게 가르침을 주셨다고 전한다. 그런 모습에 절로 존경심이 우러났다는 주변의 스님들은 통광 스님을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여 자비와 원력으로 점철된 도인’이라 하였다.
지난 2013년 유명을 달리하신 스님께 더 이상 글을 물을 수도, 법문을 청할 수도 없는 지금, 다행스럽게도 스님께서 남기신 유고가 있어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통광 스님은 경전과 고승어록을 역해한 몇몇 서적만을 남기셨을 뿐, 당신 스스로가 ‘저자’인 책을 내보인 적이 없으셨으니, 이 유고집은 스님의 삶과 뜻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염원이 모여 간행된 통광 스님의 ‘첫 저서’라 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도 오연하게 선 주인공
불교는 죽음을 우회하거나 기피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존재가 의심스러운 절대자에게 구원을 간청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관념이라 하여 현실에서 밀쳐내 버리지도 않는다. 당당하게 직시하고 그 결과를 수용한다. _ 본문 중에서
‘오연(傲然)’, 이 단어는 ‘태도가 거만하거나 그렇게 보일 정도로 담담하다’라는 뜻이다. 이 책의 소개글에서 저자를 ‘죽음 앞에서도 오연하다’ 한 것은 글에 비친 스님의 모습이 말기 암이란 생명에 대한 절체절명의 도전에 처했음에도 매우 담담하기 때문이다.
스님의 말마따나 ‘죽음을 안다, 이해한다, 깨닫는다고 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도리어 오랜 수행을 통해 죽음과 맞닥뜨려 보고 나서야 온몸으로 체득하는 금강의 지혜를 갖추어 비로소 삶과 죽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일생 또한 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는 스님의 말씀은 그래서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불제자로서 죽음을 ‘당당하게 직시하고 수용하는 것’, 그것은 수행자로서의 삶과 원력이 빚어낸 어떤 경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도 병에 걸려 고통을 겪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암이 동반한 물리적인 고통마저 지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글 한 편 써내려 가는 것마저 고통스럽다’는 스님의 문장이 눈가에 어른거리는데, 그럼에도 왜 스님은 펜을 든 것일까? 그건 아마 불자들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투병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판단했다. 병에 이기고 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병이라는 상황을 맞아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과정을 불자들에게 알려야 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_ 본문 중에서
‘통증이 심해지면 생각조차 잘 나지 않기 때문에 이 작업이 내겐 무척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알아주면 고맙겠다’는 스님의 고백 속에서 신체의 고통보다 더 깊은 절절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대강백이자 선사라는 위치에서 느끼는 단순한 의무감이 아니다. 눈앞에 죽음을 둔 인간임에도 회향의 순간 한 치의 이기심도 발동해선 안 된다는 것, 회향마저도 보살도를 향해야 한다는 스님의 의지와 다름없다. 마지막 순간에도 대중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는 의지, 그것으로 스님은 죽음 앞에 의연한 자세로 글을 써내려 갔다.
생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를 고마워하며 평생 쌓아 놓은 불법을 확인하고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_ 본문 중에서
삶의 끝자락에서 꾹꾹 눌러 쓴
깨달음의 문장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투병일기가 아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순간에도 놓을 수 없는, ‘삶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 불법에 의지한 삶을 살라’는 대강백의 진심 어린 당부, 그 자체이다. 그래서인지 스님의 글에서는 그 흔한 고통의 묘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고통마저 불은이라 여기는 선사의 기개가 엿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정체절명의 재앙이겠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이것 또한 불은(佛恩)이자 가피가 아니겠는가. 내 몸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불보살의 뜻이 있을 것인즉, 나는 그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_ 본문 중에서
통광 스님이 불제자로 산 50여 년의 세월도 그렇다. 후학들을 위한 강의나 대중을 위한 법회를 할 때도, 쌍계사승가대학 학장, 쌍계사 주지, 대한불교조계종 역경위원회 위원장 등의 소임을 볼 때도, 폐허가 된 칠불사를 복원할 때도 오직 불법에 의지한 원력 그것 하나만으로 나아간 삶이었다.
스님의 그러한 행(行)을 곱씹으며 우리는 제1부 ‘불이문’의 아홉 걸음을 지나, 제2부 ‘금강문’의 여섯 걸음을 마무리한다. 그 열다섯 걸음 속에 새겨진 스님의 당부는 오직 깨달음을 향해 닿아 있다. 스님은 ‘장부일대사(丈夫一大事)’,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이상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선을 그어 말한다. 이미 ‘지금 이대로가 곧 부처’인 우리가 삶 앞에 우왕좌왕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큰 발원으로 용맹 정진하면 ‘우리 인생에서 못 할 일은 없다’는 것, 이것이 사바세계의 우리에게 전하는 스님의 마지막 선물이자, 숙제일 것이다.
“너의 본래면목을 말해 보라. 듣고, 보고, 읽은 것 말고 네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일러 보라.”
이것이 무엇인가? 줄여서 ‘이 뭣고’ 화두를 들고 8년만 궁구해 보라.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다시 8년을 더하면 된다. 우리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이 문제는 일생을 걸어도 좋을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_ 본문 중에서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하지만 참다운 즐거움은 작은 희생과 인고를 치르지 않고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수행하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이 문제는 일생을 걸어도 좋을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시간은 참 무심하여 스님께서 입적하신 지도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눈앞에 도래한 죽음마저 불보살의 가피로 여기며 마지막 순간까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 수행자 통광,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주저앉지 말고 함께 장부일대사를 해결하자며 손을 뻗은 스승 통광. 그런 스님이기에 우리는 스님을 참 스승이라 일컬으며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우리와의 인연은 잠시 멈추었지만 스님이 살다 가신 지리산과 칠불사, 그리고 이 책에 담긴 스님의 삶과 정신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른길을 밝게 비추어 줄 것이다.
일없이 졸고 있는 무위(無爲)의 납자(衲子)는 더 이상 닦을 것 없이 물소리 들으며 환희하는 내 모습이다. 일없이 졸고 있는 납자에게 어찌 죽음 따위가 올 것이며, 설혹 죽음 따위가 온다 한들 이 납자를 쓰러뜨리겠는가. 한 마디 더 보태는 것이 뱀의 다리를 그리는 꼴이겠으나 내 마음은 이미 또 다른 마을에 가 있다.
山窮水盡疑無路 산과 물이 다하여 길이 없는가 싶더니
柳綠花紅又一村 버들 푸르고 꽃이 붉게 핀 마을이 또 하나 나타나네.
그 마을은 오랜 고향처럼 친숙한, 내 마음속의 마을이었다. 나는 병고 속에서도 평온한 마음을 되찾은 것이다. _ 본문 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떠날 때가 오는 법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殺佛殺祖)’는 막다른 벽에 내몰리는 때가 오는 법이다. 선(禪)은 이처럼 부처도 떠나고 조사(祖師)도 떠나는 절대 고독의 세계이다. 절대 고독이지만 외로움에 지치지도 않고 오연(傲然)하게 서 있는 주인공을 보면서 나는 묻는다. “너는 누구냐?” 하고. 이 글은 그런 의문에 대한 나의 대답인 셈이다. _ 17쪽
불교는 죽음을 우회하거나 기피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존재가 의심스러운 절대자에게 구원을 간청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관념이라 하여 현실에서 밀쳐내 버리지도 않는다. 당당하게 직시하고 그 결과를 수용한다. _ 24쪽
죽음을 안다, 이해한다, 깨닫는다고 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오랜 수행을 통하여 죽음과 맞닥뜨려 보고 나서야 온몸으로 체득하는 금강의 지혜를 갖추어 비로소 삶과 죽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이것이 불교의 참다운 매력이다. 내가 살아온 일생 또한 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_ 28쪽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와 있었다. 나는 내 투병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판단했다. 병에 이기고 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병이라는 상황을 맞아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과정을 불자들에게 알려야 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_ 31쪽
무학사로 나를 찾아온 한 처사가 회향(回向)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저 역시 회향을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하듯 병원의 병상에 누워 수액 주사 바늘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떠나는 방식은 절대 용납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히말라야나 사하라 사막 같은 극한지에 가서 그냥 사라지는 방식으로 회향하고 싶습니다.”
무슨 뜻인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지만 말렸다.
“그러지 마라. 더 큰 고통이 있을지도 모르고 현지의 또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지도 모르지 않느냐. 멋진 회향을 위해 다른 중생에게 고통을 주어서야 되겠느냐.”
그러자 처사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이기적이었다고 반성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회향은 어렵다. 앞으로 내가 쓰는 글은 그 준비 과정 중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갓 태어날 어린아이를 위해 어머니가 강보를 마련해 두는 것처럼. _ 32쪽
나는 길거리(事)에 있으면서도 집안일(理)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집안일을 돌보면서도 한편으로 길거리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 불자의 일이 사찰의 당우를 짓는 일로 궁극이라 하겠는가. _ 49쪽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정체절명의 재앙이겠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이것 또한 불은(佛恩)이자 가피가 아니겠는가. 내 몸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불보살의 뜻이 있을 것인즉, 나는 그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_ 56쪽
초의 선사가 다도를 선양하는 데 그쳤다면 굳이 우리의 관심을 끌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선사는 제법불이의 선 사상을 바탕으로 침체된 조선 후기의 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켜 오늘날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_ 84쪽
세상이 제아무리 변하고 뒤집어질지라도 생사를 벗어나는 도리를 깨달아 고통에서 헤어나려는 중생들의 염원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일찍이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위해 가르침을 베풀었던 한 남자의 큰 가르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함께 그가 걸었던 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뒤따라가려는 후학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큰 깨달음, 큰 가르침, 그리고 큰 행함은 일체이다. _ 102~103쪽
윤회는 열반을 가로막는 번뇌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에 따른다. 윤회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주체는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이고, 삼봉 정도전 같은 비판자들에게 주어야 할 대답이다. _ 137~138쪽
‘즉시성불도(卽時成佛道)’.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는 중생들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는 것(명심견성)은 곧 부처님의 도(佛道)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는 곧 평생에 걸쳐 내가 이르고자 했던 세계, 내 마음이 가 있던 세계였다. _ 146쪽
생사는 현상(相)이다. 상은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임제 스님은 모든 사물을 본질(體)과 현상(相), 그리고 작용(用)의 삼요(三要)로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마음은 존재의 본질이자 현상이고, 또한 작용이다. 그리고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현상은 이 마음의 거울에 스쳐 가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어찌 집착할 것인가? _ 148쪽
노파심에서 부연하자면 ‘안다’와 ‘깨닫는다’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강도가 형법 조항을 잘 알지만 성인군자가 되지는 못하고, 환자가 귀동냥으로 자기 병에 관해 유식하지만 의사가 되지 못하는 것도 ‘안다’는 것, 지식의 한계 때문이다. _ 166쪽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정답은 물론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싯다르타 태자는 부왕의 간곡한 만류와 신하들의 그럴 듯한 설득에 지지 않고 용감하게 속세의 인연을 끊어 버렸다. 대각을 이룬 후에 그들을 다시 만나 제도하겠다는 원을 가지고. _ 201쪽
굳이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지만 그 이름에 연연하여 분별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이름을 붙이자니 그렇게 된 것일 뿐 원래 그 자리는 언어도단이라 이름 붙일 것도,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많은 성인과 철학자들이 사유 끝에 여기에 도달하여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면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진리의 자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불교는 출발한다. 이에 대한 의구심을 갖거나 회의(懷疑)하는 사람은 우선 그것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_ 234~235쪽
문제는 자신의 마음 자리를 여실하게 보려는 자세와 의지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발보리심을 거듭 강조하는 원인이 여기 있다. 부처님은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 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도 부처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이 얼마나 고달픈 인류에게 던지는 거대한 희소식인가. _ 242쪽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는 불자의 원이다. 그러나 그 원을 간절히 실천하려고 작심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면 다른 일들도 저절로 형통할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괴로운 일들이 너무나 많다. 오죽하면 부처님도 사고팔고(四苦八苦)라 했겠는가.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에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하는 고통,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원수와 만나는 고통 등 중생의 몸이 온통 괴로움을 담는 그릇과 같다고 했다. _ 263쪽
“너의 본래면목을 말해 보라. 듣고, 보고, 읽은 것 말고 네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일러 보라.”
이것이 무엇인가? 줄여서 ‘이 뭣고’ 화두를 들고 8년만 궁구해 보라.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다시 8년을 더하면 된다. 우리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이 문제는 일생을 걸어도 좋을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_ 2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