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당간 강릉 삼척] 강릉 이모저모
강릉으로 가는 고갯길, 대관령
‘아흔아홉구비’ 대관령
옛적에는 서울에서 강릉에 가려면 멀고도 험한 태백산맥의 주요 고개인 대관령(832m)을 통과해야 했다. 그나마 대관령이 한계령(1,004m), 두문동재(1,268m), 통리재(770m), 백복령(780m)보다 넘기 쉬웠기에 원주와 강릉을 잇는 통로로 사용됐다.
한국인 대부분은 대관령과 강릉에 얽힌 추억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산’ 하면 설악산이 연상되고, ‘바다’ 하면 대관령 너머의 강릉이 떠오를 정도이니, 강릉과 대관령이 한국인의 정서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어떤 이에게는 수학여행지로, 어떤 이에게는 신혼여행지로,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곳곳에 봉인돼 있을 것이다.
강원도는 드높은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데다 겨울이 길고 추우며 눈이 많이 내리다 보니 자연히 외부와 고립됐다. 그로 인해 너와집, 설피, 동태, 감자, 메밀전병, 올챙이국수 등 독특한 생활 풍경과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강원도는 높은 산세로 교통도 불편하고 위험한 곳이다 보니 예로부터 대관령 산신에게 비는 풍속이 있었을 만큼, 대관령은 강릉 시민 및 영동 지방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고개였다.
‘대관령’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에 처음 나타난다. 왕건이 928년에 이 고개를 넘어 김순식을 투항시키고 왕씨 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높고 험준한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으로 불리다가, 영동 지방의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의 대관령(大關嶺)이 됐다고 한다.
강원도는 대관령 마루를 기준으로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로 나뉜다. 황병산·선자령·노인봉·발왕산으로 둘러싸인 대관령은 약 13km로 이어진 고위평탄면으로, ‘아흔아홉구비’라 불릴 정도로 많은 굽이가 있다. 이곳의 연평균 기온은 7℃ 안팎으로, 남한에서 가장 낮아 연중 서늘한 기후를 유지한다. 그 결과 여름철의 고랭지 채소 재배가 가능하고 소와 양의 사육을 위한 초지가 펼쳐져 있다. 산록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용평스키장이 있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주요 경기가 펼쳐지기도 했다. 대관령을 분수령으로 한 물줄기 또한 만만치 않아 동쪽으로는 오십천, 서쪽으로는 송천의 한 줄기를 이룬다.
강릉의 옛 지명
강릉(江陵)은 원주(原州)와 더불어 ‘강원도(江原道)’라는 도명을 이룬다. 강릉은 동예[濊]의 소국 도읍지로, 기원전 129년에 위만조선에 속해 있었다. 313년에 고구려가 점거하고 하슬라(何瑟羅) 또는 하서량(河西良)이라 불렸다(『삼국사기』, 「지리지」). 창녕의 <진흥왕척경비>에 하서아(河西阿)라 한 것으로 보아 4세기 말에는 신라 영역으로 편입됐고, 5세기 중후반 장수왕의 삼척 공격과 함께 고구려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초 지증왕 대에는 다시 신라의 변경 하슬라주(何瑟羅州)로 등장한다. 경덕왕 대의 한화(漢化) 정책으로 지명을 명주(溟州)로 바꾸어 신라 9주 5소경 중의 하나가 됐으며,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김주원의 후손들이 이 땅을 다스렸다.
명주라는 지명과 관련해 강릉 지역의 수호신 범일국사(梵日國師)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권3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조에 의하면 굴산조사(崛山祖師) 범일이 당나라에 유학했을 때,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잘린 한 사미 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범일이 중국 당나라로 넘어갔을 때 명주(明州)에서 관음신앙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영향으로 신라에도 정취보살(正趣菩薩) 신앙이 전래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명주(明州)는 지금의 영파(寧波)로 738년에 월주(越州)에서 분리됐다고 한다. 명주에는 황제의 명으로 건축된 유서 깊은 사찰인 개원사(開元寺)가 있었다. 개원사는 신라, 일본 등 각국의 스님들이 모여 교류하던 곳이었다. 그곳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개국사와 같은 곳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강릉의 옛 지명 명주(溟州)와 당나라의 명주(明州)는 분명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음을 가지며, 범일국사의 활동지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후삼국시대에는 명주 호족 김순식이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순식이 됐다. 지명은 고려, 조선을 거치며 임영(臨瀛), 동원경(東原京), 명주, 하서부(河西府), 명주도독부,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로 바뀌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렬왕 대인 1308년에 강릉대도호부가 되며 ‘강릉(江陵)’이라는 명칭이 처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중부에도 같은 지명의 도시가 있는데, 그 어원에 의하면 강릉은 ‘강에 면해 있으며(地臨江), 근처에 높은 산이 없고(近州無高山) 모두 언덕으로 이루어졌다(所有皆陵阜)’고 했다. 이 입지 조건은 강원도 강릉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대관령 산신당(위)과 성황사(아래). 성황사에 모셔진 범일 스님은 활을 메고 말을 탄 장군의 모습이고, 산신당의 김유신 장군은 산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뭔가 뒤바뀐 모습인 듯한데, 이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제관들이 산신당에서 제를 지낸 후, 국사성황사에서 다시 지낸다(위). 이후 만신이 성황신을 모시는 굿을 한다(아래). 제와 굿이 끝난 후 신목잡이가 신목을 찾으러 산으로 간다.
강릉의 불교문화재
강릉시는 강원 영동지방의 중심도시로, 동쪽의 동해를 제외하고 남쪽으로는 동해시와 정선군, 서쪽으로는 평창군과 홍천군, 북쪽으로는 양양군에 접한다. 강릉시는 강원도 내 지정문화재의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데, 빗살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등의 선사유물부터, 문묘대성전(보물)·향현사(강원도 유형문화재)·강릉향교 등의 유교문화재도 많이 산재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한송사지 석불상 2점(국보·보물)·대창리 당간지주(보물)·수문리 당간지주(보물)·굴산사지 부도탑(보물)·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낭원대사 오진탑(보물)·낭원대사 오진탑비(보물) 등이 있다. 한편 범일국사와 관련해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가 있으며, 대관령국사성황신을 위한 읍치성황제도 눈여겨볼 만하다. 범일국사가 창건했다는 신복사 터에는 삼층석탑과 함께 그 탑을 향해 단정하게 앉아 있는 석불좌상이 남아 있다. 이 좌상은 상호가 매우 원만하며,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국보) 앞의 공양보살상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추정되는 보물 강릉 굴산사지 승탑, 범일의 제자인 낭원대사와 관련한 탑과 탑비도 중요한 불교문화재다.
강릉의 문인들
강릉은 풍부한 문화유산과 함께 전국 10대 관광권인 설악산권에도 속할 만큼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천연기념물로 주문진읍의 800년 된 은행나무,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심었다는 연곡면 삼산리 소나무가 마을의 수호목으로 추앙받고 있다.
서쪽에 대관령이 있다면 동쪽에는 그 유명한 경호(鏡湖, 경포호)가 있다. 유천(楡川) 등의 작은 물줄기가 흘러들어 형성된 드넓은 경포호에 어울리는 새는 다름 아닌 고니(백조). 경포호의 잔잔한 수면을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헤엄치는 고니를 시조(市鳥)로 정한 강릉 시민들의 혜안에 경의를 표한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慈親鶴髮在臨瀛)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身向長安獨去情)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 떠 있는 곳 저녁 산만 푸르네(白雲飛下暮山靑)
- 신사임당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읊은 시로 전해진다. 오죽헌(烏竹軒)은 신사임당의 친정이자 이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곳으로 교육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성지였다. 이들 모자는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한 명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한 명은 그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이자 문인, 예술가로 역사의 한 장면에 자리한다. 또한 오늘날 오만 원권과 오천 원권 지폐에 모자가 나란히 얼굴을 올리고 있다. 오죽헌 입구의 풍성한 모란과 담장 안의 율곡매, 율곡송, 배롱나무는 강릉을 대표하는 모자를 연상시키는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강릉시에 산재한 초당두부집은 힘들게 대관령을 넘어온 여행자의 빈속을 달래준다. ‘초당(草堂)’은 허난설헌과 허균 남매의 부친인 허엽(許曄, 1517~1580)의 호이다. 남매가 부친보다 유명세가 더 있다 보니 소개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아무튼 초당두부는 허엽이 강릉부사로 재임할 때 천연 간수인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게 하면서 탄생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만든 순두부(초두부)는 뭉게구름 모양으로 엉기며 맛과 품질이 뛰어나다고 한다. 허난설헌과 허균 역시 조선을 대표하는 문학가이니 강릉, 참 대단한 곳이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영동지방의 행정·문화·교통·교육 등의 중심지로 발전해온 강릉은 오늘날 청춘들에게 무한한 낭만을 주는 관광도시로 여름 피서철은 물론 일 년 내내 여행자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경포대, 정동진역, 오죽헌, 강원도 지역의 가장 품위 있는 사대부가로 일컬어지는 선교장 등의 유명 관광지에 더하여, 2010년대의 커피 유행과 더불어 유명해진 안목해변의 카페들과 주문진의 커피 거리도 전국의 커피 애호가를 불러 모은다.
사진. 유동영
계미향
「한국 고대의 천축구법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겸임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을 거쳐 현재 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으로 있다. 천축구법승과 중국구법승 등 고대 스님들의 대외 교류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며, 저서로 『고려 충선왕의 생애와 불교』, 『한국 고대의 천축구법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