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에 어린 겨레의 염원 - 철원 도피안사와 석대암
[마음속에 담아둔 절]
역사의 봄은 아니 오고
강이라면 보통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모래사장, 강변의 수초와 버드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강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강이 우리 국토에 한 곳 있다. 바로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평지에서 푹 꺼진 협곡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평지에 서 있을 때는 거기에 그런 강이 있는지 전혀 가늠이 안 되는 강이다.
원래 서울과 원산 사이를 잇는 약 160km 길이의 낮고 긴 골짜기를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이라 부른다.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지형으로 예부터 물길이 생기고 사람들이 오간 자연통로였다. 추가령은 북한 북강원도 세포군 삼방리와 대곡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는 599m이다. 대관령(832m)보다 현저히 낮은 고개지만 백두대간 동서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다. 물은 낮은 곳을 따라 흐르니 자연히 물길이 생겨 한탄강이 생겨난 것이다. 서울-원산 간 철도도 이 골짜기를 따라가며 철로를 놓았다.
한탄강은 좁은 협곡을 쉴 새 없이 돌아가며 흐르기에 큰 여울이 많다. 그래서 한문으로는 ‘漢灘江’이라 부른다. 한강의 예에서처럼 ‘한’은 크다는 뜻이고 ‘탄’은 여울이라는 뜻이다. 한탄강은 보통 30m 아래 협곡을 흐르는 강이지만 길이는 136km에 달한다. 북한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철원군, 연천군을 지나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부처가 머물 곳을 정하다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종교적 이적은 시대를 초월해서 출현한다. 철원군에도 그러한 유물이 있으니 분단의 폐허 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이다.
도피안사는 나지막한 화개산에 있다. 도피안(到彼岸)이란 깨달음의 저쪽 언덕,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갔다는 의미다. 화개산(花開山)도 꽃이 피었다는 뜻이니 바로 연꽃이 피었다는 말이다. 이 도피안사 창건은 신라 말 도선국사(827~898)와 얽힌 설화가 있다. 『유점사본말사지』 「개화산 도피안사 사적기」에는 이런 기록이 실려 있다.
“도선국사가 철불을 철원 수정산의 안양사에 봉안하려고 승려들과 함께 이운하던 중이었다. 암소의 등 위에 불상을 싣고 지름길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철원읍 화지리 암소고개에 이르렀다.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렸고 길을 찾지 못해 지친 승려들과 암소가 고갯마루에서 쉬는 참이었다. 이때 암소 등 위의 불상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도선국사를 비롯해 승려들은 몹시 당황해 철불을 찾았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도선국사가 낙담한 채로 일행들과 함께 길을 떠나 지금의 도피안사터에 이르렀는데 뜻밖에도 사라진 철불이 이곳에 앉아 있었다.
도선국사는 결국 이 자리에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이 절을 8백 비보사찰 중 하나로 삼았다. 산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듯 유약한 형상이라 석탑과 철불로 약점을 보완하여 국가의 내실을 굳게 다지었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철조 좌대까지 있는 철불은 이 도피안사 철불이 유일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철불의 등에 8행 139자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철불로 알려진 것은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이다. 858년에 조성됐는데 도피안사 철불처럼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청정한 불법 진리 자체를 상징한다고 해서 법신(法身)이라고도 한다. 선종은 참선을 통해 부처님의 본래 경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에 당연히 비로자나불을 중요하게 모시게 된다. 구산선문 중에서 가장 먼저 선문을 세운 가지산문 보림사에서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한 이후 모든 선종 계통 사찰에서 비로자나불상을 모시게 된 것도 이런 연유다. 도선국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곡성 동리산문 혜철국사의 제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선종의 가풍대로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도피안사로 모시게 됐다고 하겠다.
장흥 보림사 철불보다 7년 늦은 865년에 조성된 도피안사 철불을 모신 사람들은 조정의 유력자도 아니고 지방의 호족 세력도 아니다. 철불 등 뒤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철원지역에 거주하던 신도들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이다. 그 발원에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거나 풍년을 빌고 질병의 퇴치를 원하는 세속적인 내용이 없다. 오로지 중생들이 긴 어둠을 깨치고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면서 이 불사에 동참했는데 그렇게 인연을 맺은 거사(居士, 남자 신도)가 1,500명이라고 했다. 한 지역에서 1,500명의 남자가 모였다는 것은 거의 모든 남자가 동참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들은 또한 금석(金石) 같은 굳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불사에 힘써 힘든 줄을 몰랐다고 했다. 얼마나 올곧고 바른 신심인가.
그래서일까? 도피안사 철불은 높이가 91cm에 불과하다. 불상의 크기에서 오는 위엄이나 권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평이하고 친근한 민간인의 인상을 풍기면서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은 기개 있는 선사의 풍모와 오버랩된다. 이 모습이 당시 어지러운 난세를 살아가던 철원지방의 백성들이 참된 수행의 길을 걷고자 발원했던 모습은 아니었을까? 철불과 함께 세운 삼층석탑도 보물이다. 높이 4.1m인데 누가 보아도 기단부가 특이하다. 보통 신라석탑에서 보는 사각의 이중기단이 아니라 팔각의 연화좌대다. 연화좌대 위에는 대개 불보살상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삼층석탑을 대신 올려놓은 모습이다.
초기의 탑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상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부처님을 상징하기도 했기 때문에 연화좌대 위에 탑을 올렸다고 보면 된다. 다만 흔히 보던 석탑의 모습이 아니기에 어색하게 보일 뿐이다.
지장보살의 원력은 다함이 없네
철원군에는 중생들에게 이적을 보인 불보살상이 한 분 더 있다. 심원사에 모셔진 석조지장보살상이다. 지금 심원사는 철원군 동송읍 상노1리 72번지에 있지만 원래의 심원사는 연천군 신서면 하내산리 35-4번지, 보개산(877.2m) 산중에 있는 큰 절이었다. 고구려 보장왕 6년(647) 영원조사가 창건했을 때는 영주산 흥림사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성덕왕 19년(720)의 일이다. 이 지역의 유능한 사냥꾼 이순석이 친구와 함께 보개산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황금빛 멧돼지를 발견하고 즉시 화살을 날려 맞혔다. 화살을 맞은 멧돼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등성이를 뛰어 올라갔다. 두 사람은 멧돼지의 흔적을 끝내 못 찾고 어느 샘물가에 이르렀는데 샘물 속에서 돌로 만든 지장보살상을 발견했다. 왼쪽 어깨에는 이순석이 쏜 화살이 박혀 있었다. 두 사람은 크게 참회하고 출가했고 이순석은 3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지장보살님을 뵌 곳에 돌 축대를 쌓고 절을 창건했다. 물론 지장보살님을 법당에 모셨고 이때부터 석대암(石臺庵)은 지장기도 도량으로 명성을 날렸다. 살아 있는 지장보살님이 계시다고 하여 생(生)지장보살 도량이라고도 부르게 됐다.
1907년 의병 300여 명이 심원사 인근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의 고의적인 방화로 심원사는 250칸 건물과 1,602위의 불상이 다시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스님들의 원력으로 심원사도 중건됐고 석대암도 중수했다.
1935년 또 한 번의 이적이 있었다. 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한규설(1848~1930) 대감의 부인 박선심화 보살과 동생 박대선화 보살이 화응 스님을 모시고 남편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석대암에서 100일 기도를 올렸다. 100일 기도 끝나기 3일 전 법당이 갑자기 환해졌다. 화응 스님이 불이 난 줄 알고 급히 법당으로 가보니 지장보살님 왼쪽 어깨 부분에서 상서로운 광명이 뻗치고 있었다. 종을 쳐 대중을 깨웠고 두 자매도 달려와서 신비한 광경을 보고 크게 감격했다.
두 자매는 심원사 주지와 상의해 화산경원(華山經院)을 지어 스님들의 공부를 돕기도 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통도사 월하 스님과 태고종 종정을 지내신 덕암 스님이 바로 이 화산경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8·15해방과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은 심원사에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공산정권하에서 심한 핍박을 받던 심원사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자 석대암 지장보살님은 1948년 서울로 반출되어 행방이 묘연해졌다. 심원사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일부 비석과 승탑만 남은 폐허가 됐다. 그 터도 국군의 통제 지역이 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1955년 4월 화산경원에서 공부했던 김상수, 김상기 두 스님이 지금의 철원 심원사를 창건하고 무당이 모시고 있던 지장보살님을 1959년 재판을 통해 다시 찾아와 법당에 모셨다. 이후 철원 심원사는 다시 지장기도 도량으로서의 명성을 되찾았다. 심원사터는 민간인 출입이 가능해지자 원래의 심원사라는 의미로 ‘원심원사’라 부르며 다시 중건되기 시작했고 석대암도 다시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석대암은 보개산 최고봉인 환희봉(877.2m) 바로 아래에 있다. 원심원사에서 2.5km를 올라가야 하는 지점이다. 석대암의 표고가 641m이니 꽤 높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지장보살님이 빠져 있었다는 샘터가 아직 그대로 있다. 환희봉은 지장봉이라고도 부른다. 지금 심원사에 모셔진 지장보살님은 전해지는 내용대로 왼쪽 어깨에 상처가 있다. 보살상 좌대 양쪽으로는 조그만 금빛 멧돼지가 놓여 있다. 물론 이 조각상은 사냥꾼 이순석에게 금빛 멧돼지로 나타나 보였던 지장보살님을 상징한다.
보통 불보살상에 대해서 상호가 원만하다거나 위엄이 있다거나 미소가 좋다는 등 여러 가지 평가를 하지만 심원사 지장보살님은 그런 평가와 거리가 멀다. 지나치게 평범하고 소박하다. 머리도 소녀가 단발을 한 듯한 모습이다. 결코 잘생기거나 뛰어난 보살상은 아니다. 금빛 찬란한 개금도 없다.
그러나 소박하기 때문에 더 친근하고 우리의 이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한 평범함 속에 여러 이적을 보이시니 여기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을까? 어느 중생이나 다 지장보살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