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일연의 자취(4) 운문사와 인각사

인각사에 어머니를 모시고

2023-03-28     명계환
인각사 인근 산봉우리 높은 곳에 있는 일연 스님의 어머니 묘. ‘능골’이라 부른다. 묘의 2시 방향으로 인각사가 있다. 당신 외에는 후손이 없었던 스님이 높은 산봉우리에 어머니 묘를 잡은 이유가 궁금하다.

보각국사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의 찬자(撰者)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연 스님과 관련한 기록은 『고려사』 등에 일부 남아 있지만, 전체적인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스님이 입적한 후 인각사에 세워진 「보각국사비」이다.   

비문 가운데 주목하려는 부분은 그가 말년에 인각사에 머문 시기(1283~1289)의 행적이다. 일연 스님은 1283년(충렬왕 9) 개성으로 올라가 3월에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원경(圓鏡) 충조(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84년 인각사를 하산소(下山所, 국왕이 국사·왕사가 만년을 보내도록 지정해주는 사찰)로 정하고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이와 아울러 1277년 청도 운문사에서 집필을 시작한 『삼국유사』의 편찬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1289년 7월 인각사에서 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입적했는데,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는 이때 충렬왕에게서 내려진 것이다.

고려시대 왕사(王師)・국사(國師) 책봉의 목적은 국가와 불교의 상호 간 협조를 통한 국가 번영과 고려의 불교국가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당시 유력한 불교 종파에서 선출했던 만큼 불교 세력을 인정해주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몽골 침략기와 원나라 간섭기라는 국가 위기와 혼란의 상황에서 정치는 문란해졌으며 왕사・국사의 본래의 직임보다는 국왕이나 특정 권력자와의 관계에서 역할이 결정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치권력과 결탁한 자만이 영향력을 가지고 승정을 장악하며 구체적 활동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일연 스님이 국존이라는 승직을 받아들인 자세한 이유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인 인물이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국존이라는 승직까지 경험했던 일연 스님에게 국존의 위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인간적인 면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필자는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의 비문에서 찾았다. 그것은 일연 스님의 ‘효심’과 ‘대승보살행’이다.

 

일연 스님의 어머니 묘

일연 스님의 효심

일연 스님의 호 목암(睦庵)은 스님이 스스로 지은 자호(自號)다. 일연 스님이 목암을 자호로 삼은 이유는 중국 목주(睦州) 진존숙(陳尊宿)의 풍(風)을 사모했기 때문이다. 황벽희운(黃檗希運)의 법을 이은 진존숙의 속성(俗性)은 진씨(陳氏)이고, 휘(諱)는 도명(道明)이다. 그는 목주 용흥사에 살면서 문풍(門風)을 떨쳤는데, 1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할 정도였다. 또 밤이면 왕골로 짚신을 삼아서 곡식으로 바꾸어 어머니에게 보내줘서 사람들이 그를 진포혜(陳蒲鞋)로 불렀다.

어머니 봉양에 지극정성이었던 일연 스님이 진존숙을 사모해 목암으로 자호했던 이유는, 짚신 삼아서 어머니를 봉양했던 그의 효성에 감동해서다. 스님이 인각사를 하산소로 정하고 77세였을 때 96세의 노모를 모셨던 일은 유명한데, 그 내용이 다음처럼 비문에 있다.

“스님은 평소에 경련(京輦, 임금의 궁이 있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노모를 곁에서 모시기 위해 구산(舊山)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비는 그 사의(辭意)가 심히 간절했다. 임금께서 거듭 그 뜻을 어기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윤허하시고 근시좌랑(近侍佐郞) 황수명(黃守命)에 명해서 호행(護行, 보호해 따라감)하여 영친토록 하였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출가자로서 희유한 효심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다음 해에 노모께서 96세로 별세했다.”
 __ 민지, 「보각국존비」 중에서 

이처럼 일연 스님의 효성은 지극했고 또한 당시 고려 사회에 두루 알려진 일이었다. 이 밖에도 스님이 찬술한 『삼국유사』 가운데 「효선(孝善)」편을 주목할 수 있다. 「효선」편은 신라의 효행 사례만을 모아 수록한 편목이자 『삼국유사』의 마지막에 편재해 있어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이 편목에는 가난하고 외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자주 그려내고 있다(『삼국유사』 「효선」편 5조목 가운데 4조목). 「효선」편이 실리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일연 스님의 효성을 간과할 수 없다. 

인각사에 모셔진 일연 스님 부도. 본래 인각사 인근의 ‘부도골’에 방치됐었다. 옆으로 석불 좌상이 함께 있다. 

 

일연 스님의 대승보살행

그다음 일연 스님의 대승보살행을 주목해야 한다. 그가 대승보살행을 실현했다는 것은 보경사(寶鏡寺) 주지이자 통오진정(通奧眞靜) 대선사인 산립(山立)이 「보각국존비」 후면에 지은 ‘인각사보각국존비음기(麟角寺普覺國尊碑陰記)’에 잘 나타나 있다. 문도들은 다음과 같이 일연 스님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이유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다. 

“[일연 스님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그 이유를 살펴보면, 마치 바구미(곤충류)가 해혜(醢醯, 젓갈류 음식)의 냄새를 인하지 않고는 모여드는 자가 없는 것과 같다. 그 중요한 원인은 스님께서 상구보리인 실천 수행의 도덕이 고매하여 생사 거래가 마치 몽환과 같음을 증득한 후, 하화중생인 지・비・행・원(智・悲・行・願)으로 감득한 결과인 것이다.”
 __ 민지, 「보각국존비」 중에서 

여기서 지・비・행・원이란 대지(大智)의 대지문수, 대비(大悲)의 대비관음, 대행(大行)의 대행보현, 대원(大願)의 대원지장보살을 지칭함이다. 대승의 보살은 중생구제의 서원을 세우고 자기가 쌓은 선근공덕을 중생에게 남김없이 회향한다. 그래서 보살은 언제나 중생의 입장이 되어 자신을 버리고 헌신한다. 비문에는 일연 스님의 대승보살행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스님의 인간적인 면을 증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삼국유사』 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삼국유사』의 편찬을 마친 곳이 말년을 마무리한 인각사라고 했을 때 책에는 한 고승의 사상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 그리고 대승보살도의 행적이 다분히 스며 있다고 가정할 수 있겠다. 

일연 스님이 선승(禪僧)이었다는 것은 공통된 견해이지만, 『삼국유사』에는 ‘선적(禪籍)보다는 경전(經典)만을 수록’하고 있으며, 경문만을 인용하는 경우라도, 불교를 학문적으로 풀이하는 ‘교학(敎學)보다는 신앙을 이야기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마치 의식적으로 선적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짐작건대 선승들이 주고받는 선문답이나 선어록은 민중들에게는 좀처럼 와닿지 않는 어려운 분야로 인식했을 것이다. 

일연 스님은 학문에 대한 견해와 안목도 뛰어났다. 그의 비문을 보면 “[일연 스님이] 참선하는 여가(餘暇)에는 다시 장경을 열람하여 제가(諸家)의 장소를 연구하고, 곁으로 유서(儒書)를 섭렵하는 한편, 백가제서(百家諸書)를 겸수(兼修)하여 장소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되 그 연마한 묘용(妙用)이 종횡 무애했다”라고 하고 있다. 

스님은 교학 관련 서적에도 조예가 깊으며 다양한 인식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렵고 난해한 화엄의 교학보다는 관음·정토·미륵신앙이라는 쉬운 이야기로 내용을 전개한 점은 그의 마음이 민중의 마음속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선사의 모습을 보살행으로 승화해 회향시킨 것처럼, 『삼국유사』에서도 자신의 재지(才地, 지혜와 지위)를 숨기고 오로지 중생교화에 매진하는 대승의 실천자이자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일연 스님은 말년을 인각사에서 마무리하면서 ‘효심’과 ‘대승보살행’으로 항몽기의 고통과 혼란에 처해 있는 민중들에게 삶의 의지처로서 희망을 제시했다.  

「보각국존비」. 일연 스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으나, 훼손돼 형체를 알 수 없다.

 

사진. 유동영

 

명계환
어린 시절에 불교로부터 큰 은혜를 입어서 삼보에 귀의했다. 이후 불교환경NGO, 사찰종무원 등으로 종사했으며, 현재 동국대 불교무형문화연구소(인도철학불교학연구소)에서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