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까대왕 2

2023-03-17     정찬주

 

아소까 대왕 2
저작·역자 정찬주 정가 18,000원
출간일 2023-03-21 분야 문학
책정보

판형_145*215mm|두께_20mm|328쪽|ISBN_979-11-92997-03-2 (1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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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유심문학상(소설 부문) 수상

한국-인도 수교 50주년에 탄생한 기념비적인 작품!
담마(Dhamma)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의 현신,
아소까대왕의 일대기를 담은 장편소설, 『아소까대왕』(전 3권) 출간!


한국과 인도가 수교를 맺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 반세기 동안 이어진 문화적·경제적 교류를 자축하고 앞으로의 상생을 도모하는 이 시기에, 양국 모두에게 매우 뜻깊은 책이 출간되었다.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에서 다시금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 융성케 하고, 외교 사신단을 통해 전 세계로 불교를 전했으며, 칼이 아닌 담마(Dhamma, 法)에 기대어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했던 왕.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상인 전륜성왕의 현신이라 불리는 아소까대왕의 일대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이 책은 한국문학의 거목이자 불교문학을 대표하는 정찬주 소설가가 칠십 년 생애를 바쳐 피워 올린 역작으로서 출간 전 연재 때부터 정찬주 문학의 백미라 불리며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았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 몽골제국의 칭기즈칸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소까대왕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와 당대 인도의 종교·문화·생활사, 나아가 불교가 인도를 넘어 세계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배경까지 아우르기 때문이다.

보통의 역사소설과 달리 이 책이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2,200여 년 전 대제국을 통치했던 ‘아소까’라는 인물의 일생을 통해 힘의 논리가 아닌 생명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평화와 공존을 위한 필수 덕목임을 재확인시켜 준다는 데 있다. ‘무엇이 개인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가?’ 갈수록 퇴색하는 이러한 삶의 가치 문제를 여전히 신중하게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가슴 한편에 존재를 향한 선의지(善意志)를 움켜쥐고 사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그 선한 마음을 꽃피우게 하는 잉걸불이 되어줄 것이다.

 

저자소개 위로

글 정찬주

오랜 기간,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명상적 산문과 소설을 발표해온 작가.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작가가 된 이래, 자신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변함없이 천착하고 있다. 호는 벽록(檗綠).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상명여대부속여고 국어교사로 교단에 섰다가 십수 년간 샘터사 편집자로 법정스님 책들을 만들면서 법정 스님은 저자를 재가제자로 받아들여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다. 현재 전남 화순 계당산 산자락에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짓고 2002년부터 자연을 스승 삼아 벗 삼아 집필에만 전념 중이다.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 『소설 무소유』, 『암자로 가는 길』(전 3권)을 비롯하여, 이 땅에 수행자가 존재하는 의미와 우리 정신문화의 뿌리를 일깨우는 수십 권의 저서를 펴냈다.

장편소설로는 인간 이순신을 그린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전7권), 『광주 아리랑』(전2권), 『천강에 비친 달』,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다산의 사랑』, 『칼과 술』, 『못다 부른 명량의 노래』, 『니르바나의 미소』, 법정스님 일대기 장편소설 『소설 무소유』, 성철스님 일대기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 『하늘의 도』, 『다불』, 『가야산 정진불』(전2권), 『만행』, 『대백제왕』,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추어라』, 조광조가 꿈꾼 나라를 다룬 『나는 조선의 선비다』(전3권), 『천년 후 돌아가리-茶佛』 등이 있다.

산문집 『행복한 무소유』, 『부처님 8대 인연 이야기』, 4백여 곳의 암자를 직접 답사하며 쓴 『암자로 가는 길』(전3권),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법정스님의 뒷모습』, 『불국기행』,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돈황 가는 길』, 『나를 찾는 붓다 기행』, 『공부하다 죽어라』, 『정찬주의 다인기행』, 중국 선(禪)유적지를 답사한 여행기 『뜰 앞의 잣나무』와 『행복한 중국 선여행』 등이 있다. 동화 『마음을 담는 그릇』, 『바보동자』, 『눈부처』 등이 있다. 행원문학상, 동국문학상, 화쟁문화대상, 류주현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위로

1장
첫 순행지 │ 산치 동산에서 │ 데비의 전생과 금생 │ 특사가 전한 소식
붓다의 제자 깟짜나 │ 짠다빳조따왕과 우데나왕 │ 적국을 탈출한 우데나왕

2장
아소까의 청혼 │ 특사단장의 보고 │ 꾸날라의 스승 
두 대신, 나라를 걱정하다 │ 다르마 왕비의 소원 │ 마힌다 탄생 │ 사문의 축원

3장
순행 정찰조의 수난 │ 해적 소탕 │ 납치된 군사의 생환 │
붓다의 제자 뿐나 │ 바히야 아라한 │ 데비, 상가밋따를 잉태하다

4장
두 대신의 모사 │ 특별 휴가 │ 아소까, 데비와 헤어지다
빈두사라왕 알현 │ 아소까와 수시마의 갈등 │ 딱사쉴라 소요

5장
수시마, 딱사쉴라를 떠나다 │ 독살당한 수시마 │ 왕권 탈취 │
아소까, 마우리야국 왕이 되다 │ 칼라따까 대신 환송연 │ 살해당하는 신하들

상세소개 위로

왜 아소까대왕을 읽어야 하는가?

세계사·종교사·불교사에 전무후무한 발자취를 남긴 군주이자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전 세계로 퍼뜨린 최고의 전법사
아소까대왕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이자 인도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였던 마우리야왕조(BC 317∼BC 180). 마우리야왕조의 제3대 왕인 아소까대왕은 즉위 9년, 선왕들의 숙원이었던 인도 남동부 깔링가국 정벌에 나선다. 보병 60만 명, 기병 10만 명, 코끼리부대 9천 명을 이끌고 남하한 아소까대왕은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돌아온 건 승리의 성취감이나 최강의 군주가 되었다는 자긍심이 아니었다. 대신 널브러진 수십만 구의 시체와 전장을 붉게 뒤덮은 피를 보며 그는 전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소까대왕은 더 이상 무력이 아닌 담마(Dhamma, 法)로 세상을 통치하리라고 선언한다.

“나의 군사들이여, 나는 오늘 애지중지하던 칼을 다야강에 버렸다. 칼은 결코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놀라지 마라. 나는 오늘 이후부터 칼 대신 담마로 세계를 정복할 것이니라. 담마는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담마를 공포하여 알려야겠다. 나는 사람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가르쳐야겠다. 그러면 사람들은 담마를 듣고, 담마를 따르게 되고, 그들 자신을 향상시키고, 담마를 받아들여 아주 달라질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나는 담마칙령을 공포해 왔고 많은 붓다의 가르침을 시달할 것이다.
- 『아소까대왕』 3권 중에서

불교에 귀의한 아소까대왕은 본격적인 담마 통치에 돌입한다. 수도 빠딸리뿟다성에 아소까라마(불교 사원)를 지어 날마다 6만여 명의 수행자들에게 공양하고, 잠부디빠(옛 인도 이름) 전역에 8만 4천 개의 절을 짓고, 삼보디(보드가야)와 룸비니를 비롯한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면서 가는 곳마다 석주와 탑을 세운다. 뿐만 아니라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밋따, 동생 비가따소까, 사위 악기브라흐마, 외손자 수시마를 출가시키고 전국에 담마 칙령을 공포해 백성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에 따라 생활하게 한다.

석가모니 붓다 시절과는 연대적으로 300여 년 정도 차이가 나는 아소까대왕 시절에도 불교는 이미 쇠락해 있었다.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 비해 대우받지 못했을뿐더러 석가모니 붓다의 흔적조차 희미해진 상황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더욱 열악해져서, 인도에서 불교는 종교로서의 지위를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동아시아를 비롯해 서구 유럽에 오늘날까지 붓다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소까대왕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각국으로 담마사절단(외교사신)을 보내 불교를 전파하고, 부처님 성지마다 석주와 탑을 세워 기록을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소까라마 3차 결집을 통해 최초로 빠알리어 삼장을 문자로 기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때 완성된 삼장이 스리랑카로 전승되어 붓다의 가르침이 원형에 가깝게 전승될 수 있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만약 아소까대왕의 담마 정책이 아니었다면 불교는 세계 종교가 되기는커녕 인도의 고대 종교로서 진즉에 소멸했을지 모른다. 오늘날 인도의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 점에서 아소까대왕은 세계사·종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더욱이 불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적 인물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은 성자라면, 아소까대왕은 붓다가 남긴 진리의 파편을 후대로 전한 담마의 보호자 혹은 전승자이기 때문이다.

99명의 이복형제를 숙청하고 왕좌에 오른 아소까,
잔인한 피의 군주에서 담마의 실천자로 거듭나다!


우리나라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인도에는 아소까대왕이 있다. 그만큼 인도 사람들에게 아소까대왕은 위대한 왕이요 성군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자비로웠던 것은 아니다. 왕조를 세운 할아버지 짠드라굽따, 정복전쟁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한 아버지 빈두사라의 기질을 물려받아 일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작은 새들이 까마귀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새들을 위해 까마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무엇이 잘못입니까? … 아버지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침략자나 죄인을 죽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새를 괴롭히는 까마귀는 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소까대왕』 1권 중에서

훗날 아버지 빈두사라의 뒤를 이어 왕권을 장악한 뒤 그가 보여준 행보에서도 철권통치자로서의 면모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대관식 전후로 자신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이복형제 99명과 수백 명의 신하를 모조리 숙청한 것도 모자라, 왕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전쟁의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절대로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오. … 고름 덩어리 같은 왕자들을 반드시 도려내고 말겠소.”

“나는 잠부디빠를 통일할 것이오. 선왕께서 이루지 못한 깔링가국부터 정복할 것이오.”
- 『아소까대왕』 2권 중에서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아소까대왕 역시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면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내면에는 절대군주로서의 냉정함 못지않은 자애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본성이 브라만 신분임에도 아지비까교 수행자와 불교 사문을 존경해 온 어머니 다르마 왕비, 사끼야족 후손으로서 어려서부터 불교 집안에서 자란 세 번째 부인 웨디사데비의 영향으로 알게 모르게 발현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목갈리뿟따띳사 사문, 부왕 시절 우연히 만난 우빠굽따 사문, 이복형이자 제1왕세자였던 수시마의 아들 니그로다 사문과의 인연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마침내 참혹했던 깔링가 전쟁이 끝나고, 칼이 아닌 담마로 세상을 통치하리라 선언한 후 아소까대왕이 보여준 행보는 그가 가진 선의지(善意志)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자못 보살의 자비행에 비견할 만하다. 담마의 통치철학으로 사람은 물론 동물과 식물까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두루 아끼고 보살폈기 때문이다.

왕은 두 가지 종류의 의료진료소를 짓도록 하였다. 즉 사람과 동물을 위한 의료진료소였다. … 사람과 동물에게 적합한 약초를 구할 수 없는 곳은 어디든지 약초를 가져다가 심도록 하였다. … 사람과 동물들의 이익을 위해 길을 따라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게 하였다.

여기(마우리야왕국)에서는 그 어떤 살아 있는 생명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여서는 안 된다. … 전에는 삐야다시 왕의 황실 요리실에서 매일 수백 수천 마리의 동물들이 요리를 위해 도살되었다. 그러나 이 담마칙령을 공포한 지금에는 단지 세 마리의 동물만이 도살되고 있다. … 이 세 마리의 동물들조차도 앞으로는 도살되지 않을 것이다.
- 『아소까대왕』 3권 중에서

이 책은 ‘아소까’라는 실존 인물이 잔혹한 피의 군주에서 자비로운 성군으로 탈바꿈하는 대전환 과정을 굵직한 사건과 주변 인물의 관계를 통해 극적으로 묘사한다. 역사적 사실(fact)에 작가적 상상력(fiction)을 불어넣음으로써 이야기 전개에 긴장감을 더하고,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인물의 심리 변화와 갈등,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펼쳐 보여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사료(史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동감과 현실감, 이것이 문학(소설)으로 역사를 읽는 묘미이며 또한 『아소까대왕』이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아소까와 석가모니 붓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간 시간,
30년-250일간의 순례를 거쳐 마침내 피운 창작의 꽃!


정찬주 소설가는 수십 편의 소설과 산문집을 펴낸 베테랑 작가이다. 그동안 법정 스님, 성철 스님, 수불 스님 같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을 소재로 한 불교소설과 다수의 명상적인 산문집을 집필해 왔다. 대표작으로 『시간이 없다』 『산은 산 물은 물』 『소설 무소유』 『인연』 『가야산 정진불』 『암자로 가는 길』 『선방 가는 길』 『불국기행』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이순신의 7년』(전 7권) 『나는 조선의 선비다』(전 3권) 같은 대하소설과 현대사의 비극인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광주아리랑』(전 2권) 같은 역사소설도 여러 권 펴냈다. 출간된 도서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찬주 소설가의 작가적 관심은 상당 부분 ‘불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찬주 소설가가 긴 세월 불교에 천착한 것은 우리 고유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형상화하는 작품이 한국문학의 주변부로 밀려난 현실을 돌아보며, 다시금 불교문학을 한국문학의 중심부로 회기시키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신념 때문이다. 『아소까대왕』 역시 그러한 작가정신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처음 책 구상을 시작한 이래, 저자는 30여 년간 15번(250여 일)이나 인도 순례를 다녀올 만큼 이 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도의 동서남북을 종횡하며 아소까대왕과 석가모니 붓다가 남긴 가르침의 흔적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바야흐로 혼신의 세월과 절절한 발원으로 탄생한 책이 바로 『아소까대왕』이다. 이에 문학평론가 윤재웅은 시리즈 3권 끝에 실은 해설에서 ‘칠십 년 생애를 바쳐 마침내 피운 창작의 꽃’, ‘정찬주 문학의 결정판이자 백미’라고 평했다.

“칠십 년 생애를 바쳐 마침내 피운 창작의 꽃! 평생토록 한국과 불교를 사랑한 작가가 이제 스스로 청산을 이룬 절대구경의 경지를 나는 여기에서 본다. … 나는 이 소설이 한국문학과 불교문학의 복합적 습합성을 추구한 작가의 작품들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믿는다.”
- 윤재웅(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총장)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All history is contemporary history).’ 이탈리아 역사가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의 말이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라기보다 현재의 관점에서 불러내고 해석한 과거라는 의미이다. 이 말에 빗대어 보면, 『아소까대왕』은 소설가 정찬주가 해석하고 재창조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역사다. 여기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 곧 생명중심사상을 삶의 제일 가치로 지향하길 바라는 불교작가 정찬주의 염원이 서려 있다. 옅어져 가는 인류애를 향한 그리움에서 비롯되어 진정한 평화와 공존을 향한 희망으로 써 내려간 결과물이 이 책, 『아소까대왕』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종교가 무성한 오늘날이지만, 현실은 인류가 소망하는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곳곳에서 발생하는 전쟁과 살상은 지구별의 생명과 평화를 무참히 훼손하고 있다. 국가이기주의가 난무하는 매우 위험한 세상으로 돌변하고 있는 까닭에 아소까왕이 더욱더 위대해 보이고 그립다. 이미 2,300년 전에 동물을 사랑하고 평화와 공존이란 통치철학으로 제국을 다스린 전무후무한 대왕이었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책속으로 위로

아소까는 앞으로도 빈두사라왕에게 자신의 능력을 더 많이 보여주어 인정받고 싶었다. 딱사쉴라와 웃제니 반란을 진압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반란이 일어나는 어느 변방이든 보내주기만 한다면 진압할 자신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빈두사라왕이 아직도 정벌하지 못한 나라가 남쪽의 잠부디빠에는 많았다. 이를테면 안다라국, 꽁까나국, 드라비다국, 말라꾸따국 등이었다. 잠부디빠 남쪽 바다 건너에 있는 땅바빵니국(스리랑카)도 명령만 내리면 복속시킬 자신이 있었다.
--- pp.40~41

“나는 해적촌에서 자고 싶네.” 호위대장이 말했다. “지난번에 우리 정찰조 군사들이 당한 곳입니다. 또 당할 수는 없습니다.” “대장은 생각이 짧소. 해적들을 몰살시켜 버리면 편하게 잘 수 있지 않겠소?” “예, 알겠습니다.” 아소까는 즉시 해적촌 소탕작전을 짰다. 한밤중까지 군사들을 촘촘히 횡대로 배치한 뒤 해적촌으로 들어가 불을 질러 해적들을 몰살시킨다는 작전이었다. “해적 가족, 짐승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시오.”
--- p.164

“대왕님, 왕궁 의원이 곁에 있사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소까야, 나는 나를 안다.” 옆에 있던 우두머리 왕궁 의원이 당황했다. 빈두사라왕의 ‘나는 나를 안다’라는 말이 ‘나는 곧 죽을 것이다’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소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소까를 만나서 정신이 돌아왔는지 빈두사라왕의 목소리는 웅얼거리지 않고 입 밖으로 나왔다. “너는 수시마 형을 도와야 한다.”
--- p.237

아소까왕은 어금니를 물었다가 놓았다. 다섯 명의 왕자들을 제거한 것으로 왕실의 질서가 잡히리라고 판단했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소까왕이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물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왕권에 불복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역모죄에 해당합니다. 사실이라면 극형으로 다스리셔야 합니다. 교활한 위인들이 있는 한 왕실은 늘 안온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겠소. 편히 떠나시오. 나는 고름 덩어리 같은 왕자들을 반드시 도려내고 말겠소.”

--- pp.311~312

추천사 위로

“칠십 년 생애를 바쳐 마침내 피운 창작의 꽃! 평생토록 한국과 불교를 사랑한 작가가 이제 스스로 청산을 이룬 절대구경의 경지를 나는 여기에서 본다. … 나는 이 소설이 한국문학과 불교문학의 복합적 습합성을 추구한 작가의 작품들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믿는다.”

- 윤재웅(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