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복신미륵과 돌하르방’을 찾아서
제주를 지키는 석상
제주를 하나의 색으로 표현하라면 ‘돌색’이다. 표준색표에도 명시되지 않은 ‘돌색’으로 표현한 이유는 명암이 천차만별인 제주의 돌을 하나의 색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까닭이다. 거친 돌과 함께 살아온 제주인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돌은 제주의 삶과 역사, 예술과 문화 그 자체다. 화산폭발의 열기에 의해 숨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돌 위로는 바람도 머물다 가고, 사람도 머물다 간다. 모두 객(客)이요, 돌이 주인인 셈이다.
제주에는 지천으로 널린 흔하디흔한 돌이지만 제주민들은 이를 소중히 여겼고, 일상생활과 의식 곳곳에 안녕과 기원의 마음을 담았다. 제주에서 돌은 또한 경외(敬畏)의 대상으로, 육지부와는 다른 독특한 석상 문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돌 문화는 화산섬으로 이뤄진 제주도가, 돌과 밀착된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석상 제작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섬이라는 한정되고 폐쇄적인 자연환경은 독특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제주의 석상 문화 중 대표적인 동·서 자복과 제주읍성 앞의 돌하르방을 소개하고자 한다.
복신미륵, 동자복과 서자복
제주시 제주읍성을 중심으로 성 밖 동쪽과 서쪽에 각각 두 기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 석상은 복신미륵(福神彌勒), 자복미륵(資福彌勒), 미륵, 돌미륵, 미륵부처, 미륵보살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두 기의 복신미륵상은 1971년에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됐다. 현재까지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세웠는지’에 대한 확실한 답이 없다.
‘차양이 빙 둘린 너부죽한 모자를 썼고 커다란 입, 오뚝한 코, 지그시 다문 입, 인자하게 내려다보는 눈매’ 등 자비로운 불상의 모습이 일품이다. 몸에는 예복을 걸쳤고, 두 손은 가슴에 정중히 모았는데, 그 소맷자락이 유난히 선명하다. 서복신미륵은 ‘하반신 일부가 생략된 채 기석(基石)으로 받쳐졌다’고 여러 고서에 기록됐다.
제주읍성 동쪽의 동자복(東資福)은 만수사(萬壽寺, 일명 동자복사·東資福寺) 터에 세워져 있다. 지금은 제주항이 들어선 옛 건입포(建入浦, 건들개) 동쪽 언덕 위에 자리한다. 오랫동안 개인주택 뒤뜰에 방치돼 있다가, 2010년경 제주시에서 이 주택을 매입한 뒤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읍성 서쪽 편의 서자복(西資福)은 해륜사(海輪寺, 일명 서자복사·西資福寺) 터에 있다. 현재 용담1동 동한두기 마을이고, 옛 대옹포(大甕浦, 한독잇개) 입구이다.
1435년(세종 17) 관부의 화재로 모든 문적이 소실돼 만수사와 해륜사 창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미루어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나긴 세월 폐사된 채 방치되다시피 했던 두 사찰 건물을, 1703년경 제주목사 이형상이 헐어 관아로 삼았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사찰의 종교적인 기능을 상실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해륜사의 경우,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 해남 대흥사의 ‘해륜포교소’로 다시 출발했다. 1960년대 ‘용화사(龍華寺)’로 변경됐다가, 2010년에 ‘해륜사’ 이름을 다시 되찾았다.
동자복과 서자복은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에 의해 민속학적 관점으로 처음 소개됐다. 옛 사찰 터 경내에 자리하고 있어서 복신미륵의 기능은 물론이고, 옛 제주읍성 밖의 동·서에서 성안을 마주하고 있는 형상이라 성안 수호의 기능도 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서자복 곁에는 남근을 상징하는 높이 75cm, 둘레 100cm로 종의 ‘동자불’ 같은 작은 기자석(祈子石)이 놓여 있다. 복신미륵과는 다른 화강암 재질이며, 아들 낳기를 바라는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의 습합을 보여준다.
동자복과 서자복은 형태에서도 제주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불상 양식보다는 투박하면서도 토속적인 석상에 더 가깝다.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린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조각 형태가 그리 정교하지는 않다. 둥그스름하고 평평한 얼굴에 온화한 표정, 툭 튀어나왔으나 부드러운 이중구조의 눈매, 납작한 삼각형 코와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술 표현은 간결하면서도 특징적이다.
동자복은 신장 286cm, 얼굴 길이 161cm, 몸체 길이 125cm, 몸체 둘레 422cm로 장대한 편이다. 동자복의 경우, 기단석이 묻혀 있어서 실제 크기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본다. 서자복의 경우는 신장 273cm, 얼굴 길이 135cm, 몸체 길이 138cm, 몸체 둘레 315cm로, 동자복보다 약간 작다. 신장의 차이는 있지만, 동자복은 몸체 하단이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길쭉한 삼각 모양을 하고 있어 큰 덩치와는 달리 조금 왜소하게 느껴진다. 반면 신장은 약간 작지만 몸체가 거의 직사각 형태인 서자복은 탄탄하면서도 우람하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는 동자복은 여성, 서자복은 남성으로 인식된다는 기록도 있다. 제주읍성을 사이에 두고 제주목의 동·서를 마주하며 천년의 사랑을 나누는 미륵불의 간절함이 제주목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어느 시인의 글에서 ‘불심(佛心)과 애심(愛心)’의 인연의 끈을 영원히 이어나가고자 하는 ‘제주민심’ 또한 느껴진다.
두 미륵의 법의는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 형태이며 소매가 넓은 장삼(長衫)을 입었으나, 그 위에 가사(袈裟)를 걸치지는 않았다. 게다가 법의(法衣) 자락의 주름선 표현이 아예 생략돼 몹시 단출하면서도 정감 어린 모습이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보개(寶蓋)는 고려시대 미륵불처럼 각지지 않고 둥글다. 몸체와 재질이 다른 점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때 새로 만들어 덮어씌운 것으로 보인다.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석상은 하체 표현이 아예 생략되고 없다. 양손은 손바닥을 선정인(禪定印) 자세로 가지런히 펴서 가슴에 대고 있다.
언제 제작됐을까?
만수사와 해륜사는 ‘자복사(資福寺)’로 통칭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 “해륜사는 일명 서자복인데 주의 서쪽 독포구에 있다. 용연이 있는 포구다. 만수사는 일명 동자복인데 건입포 동안(東岸)에 있다”라 하여 해륜사는 서자복사, 만수사는 동자복사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사찰과 미륵이 ‘동서자복’ 또는 ‘동서미륵’으로 불려오며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기문의 「고려시대 자복사의 성립과 존재 양상」(민족문화논총 49, 2011)에 따르면, 자복사는 고유 명칭이 아니라, 읍인의 복을 구하는 절이라는 의미로 고려시대에는 보통명사로 통용된 개념이다. 동서자복사도 특정 사찰 이름이 아니라 복을 기원하기 위해 동서에 세워진 고려시대 도량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다. 고려시대 제주에 많은 사찰이 세워졌는데, 자복사는 각 행정단위의 치소까지 설치됐다고 전한다.
수년간 제주의 석상문화를 연구한 황시권 박사는 “동자복·서자복의 제작 시기 파악을 위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형태상으로는 두 불상 모두 맨 위의 보개, 얼굴과 몸체, 하체를 대신한 높은 기단으로 나눠 세 개의 암석을 이용해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형상을 크게 조성하기 위해서 3~4개 내외의 큰 암석을 이어 붙여 완성하는 고려시대 석불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동자복과 서자복의 제작 시기는 비슷한 것으로 보이나, 전체적인 균형감이나 옷 주름, 선 처리 같은 조형적 완성도에 비춰보아 동자복이 더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한다.”
제주의 수문장 돌하르방
제주를 찾는 여행객이 제주 곳곳을 돌아보며 정겹게 많이 볼 수 있는 석상이 돌하르방일 것이다. 다양한 동작의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독특한 돌 문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돌하르방의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제주의 삼읍성(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성문 앞에 세워져 수문장의 역할을 하던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옛 문헌에는 ‘옹중석’으로 기록됐는데, ‘옹중(翁仲)’은 진시황 때의 장수인 완옹중(阮翁仲)을 가리키며, 그의 용맹스러움을 기려 성문 앞이나 궁궐 앞에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서도 길가에 세워지는 석상, 무덤 앞에 세워지는 석상 등을 모두 ‘옹중석’이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제주의 성문 앞에 세워졌던 옹중석을 지금의 돌하르방으로 보는 게 보편적이다.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해서는 몽골에서 기원했다는 북방전래설,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기원했다는 남방전래설, 그리고 제주도의 자생적인 조형이라는 점을 일부 포함한 육지전래설 등이 있다. 북방전래설이나 남방전래설을 논하기에 앞서 육지에 유사한 형태로 남아 있는 장승·벅수와의 친연성과 영향 관계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제주도에 남아 있는 45기의 석상을 1971년 제주도 민속자료로 일괄 지정할 때 통일됐다. 우석목· 무석목·벅수머리·두릉머리·옹중석 등 지역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것을 ‘돌하르방’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명명해 지정했고, 제주의 대표 이미지로 홍보되어 그 이름이 일반화됐다.
돌하르방은 제주목에 24기, 대정현과 정의현에 각각 12기씩 총 48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제주읍성의 성문 입구를 꿋꿋이 지켜왔던 돌하르방은, 일제시대 ‘읍성철폐령’에 의해 제주성이 허물어지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 중 제주목의 1기는 분실됐고, 가장 마지막까지 있던 제주읍성 동문 밖의 8기 중 2기는 1960년대에 서울의 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주도에는 45기가 남아 있다.
돌하르방의 현재 위치를 살펴보면, 제주목 하르방은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 4기, KBS 제주방송총국 정문 2기, 제주시청 중앙현관 앞 2기, 삼성혈 입구 4기, 관덕정 앞과 뒤뜰 2기씩 총 4기, 제주목 관아 입구 오른쪽 뜰 안 2기,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앞 2기, 제주돌문화공원 내 1기 등 총 21기가 있다. 대정현 하르방은 대정현성 동문 터 4기, 대정현성 서문 터 4기, 대정현성 남문 터 4기에 총 12기가 있으며, 정의현 하르방은 성읍민속마을 동·서·남문에 각 4기씩 총 12기가 산재해 있다.
제주 삼읍성의 돌하르방은 벙거지 형태의 모자, 하반신이 생략된 형태의 묘사, 손의 표현 등에서 조형적인 공통점을 보인다. 더 세부적인 부분으로 들여다보면 전체적인 분위기, 얼굴, 동세 표현 등에서 삼읍성 각각의 독특함도 나타난다. 삼읍성 돌하르방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벙거지 형태의 모자나 부분적으로 표현된 옷 착용 모습에서 당시 무인 복식에 나타나는 모자인 ‘전립(氈笠)’과 의복인 ‘동다리’, ‘전복(戰服)’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돌하르방의 주 기능이 성문 앞을 지키는 수문장, 즉 무인상이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돌하르방의 코와 관련하여 많은 일설이 제주에 전한다. 해외여행이 자율화되기 이전인 1970~1980년대 제주는 국내에서 가장 각광받는 신혼여행지였다.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따라, 관광지마다 신혼부부가 줄을 서서 코를 만지며 사진 찍는 게 흔한 풍경이었다. 또한 오래전부터 ‘돌하르방의 코를 빻아 가루를 내서 먹으면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인이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도 하며, 이와는 정반대로 ‘임신한 여인이 가루를 내서 먹으면 태(胎)가 지워진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제주 삼읍성의 돌하르방은 복원 정비된 정의현성의 돌하르방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져 있다. 다행히 기록이나 증언을 통해 흩어져 있는 돌하르방의 원위치를 부분적으로는 파악하고 있다. 제주 역사문화를 연구·공유하는 일각에서는 ‘돌하르방 제자리 찾기 운동’을 통해, 돌하르방의 가치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성문을 지키던 본래의 기능을 못 하고 흩어져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또한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는 2기의 돌하르방은 문화재로 지정도 받지 못한 채, 타향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유동영
김현정
중어중문학(석사)·문화예술경영학(석사)을 전공하고, 제주 역사문화 공유 단체인 사단법인 질토래비(‘길안내자’ 의미의 제주어)에서 상임이사·수석연구원을 역임하고 있다. 제주 관련 고서 연구 및 제주의 곳곳을 답사하며 다양한 제주의 역사문화를 방송과 지면으로 소개하고, 강의 및 탐방 진행, 스토리텔링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