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근대의 제주 불교

곽시쌍부槨示雙趺로 내보이신 근대 제주 불교

2023-02-28     한금순
관음사 들어가는 길
봉려관 스님이 수행했다는 관음사 해월굴(海月窟). 관음사는 해월당(海月堂) 봉려관 스님이 창건해, 근대 제주 불교의 서막을 알렸다. 스님의 존상을 모셨다. 

안봉려관 스님

제주 불교의 근대는 안봉려관(安蓬廬觀, 1865~1938) 스님의 관음사 창건으로 열렸다. 스님은 한라산 부처동산 능화봉에 올라 부처가 되려고 기도하다 절벽에 떨어졌다. 수천의 까마귀 떼가 스님을 구호했고 스님은 산천단에서 가사를 전해 받은 뒤, 1908년 관음사를 창건했다. 불래오름 존자암이 퇴락한 이후 이뤄진 관음사의 창건은, 가섭을 향해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신 석가모니의 사랑 표현과 다름 아닌 일이었다.

안봉려관 스님은 한라산 남쪽에 법정사와 법화사를, 제주도 동쪽에 불탑사와 백련사를, 서쪽에 월성사 등을 창건했다. 스님은 제주 불교를 중흥시킨 근대 제주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불상을 모셔오고, 스님을 초빙하고, 불구를 갖추어 가람을 구성하는 구법의 일을 그 자체로 실천했다. 창건 이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를 되풀이한 관음사는 오늘까지 제주 불교의 중심사찰 역할을 하고 있다. 안도월 스님, 오이화 스님 등이 근대 제주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텅 빈 광야에서 정진의 수레바퀴를 굴려온 결과다. 오늘은 과거의 저축이다. 영광은 잠깐이었고, 어려움을 견딘 힘이 오늘의 제주 불교에 이른 힘이다. 불안한 시대 속에서도 부처의 가능성을 믿어 부단히 정진해온 길이 근대 제주 불교의 길이었다.

관음사. 수차례에 걸쳐 화재와 재건을 반복했다. 
1936년 당시 초가집 형태였던 관음사 모습 

제주목사 이형상

제주도에는 이형상(李衡祥, 1653~1733)에 의해 무불(無佛)시대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인식은 이형상의 기록에 근거한다. 이형상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일 년여 제주에서 생활했다. 그는 제주뿐 아니라 부임하는 곳마다 향교 보수와 음사(淫祀) 철폐 등을 실천했다. 예(禮)에 입각한 유교적 질서로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념을 갖고, 유교식 제사 이외의 신당이나 사찰식 제사는 모두 예에 맞지 않는 음사로 취급해 공권력을 행사했다. 그의 추진력은 제주도 각 지역에 다양한 설화로 전해오며, 옥황상제도 어쩌지 못하는 힘을 가진 인물로 남아 있다. 

이형상은 제주에서 신당 129개소(당시 제주도의 리가 모두 129개로 제주도 전역의 신당을 파괴했다는 의미)와 사찰 5개소를 헐었고, 불상을 바다에 던졌으며 만수사와 해륜사를 부수고 관아를 세웠다. 그러고는 ‘이제 제주에는 불상이 없고 염불하는 자가 없어 불도의 재앙을 맞이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먼 땅에서 임금의 덕으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자화자찬한 이형상의 기록이 바로 제주도 무불시대의 근원으로 인용된다. 그러나 이형상의 파직으로 부임한 후임 목사 이희태는 바로 신당을 복원·설립했다. 이형상이 이 소식을 듣고 어리석은 행위라 탄식한 기록도 있다. 그럼에도 이형상 이후 제주는 무불시대를 맞이했다는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공권력이 문화를 인위적으로 바꾸려 강압하더라도, 문화는 줄기를 바꿔서라도 도도히 흘러간다. 조선시대에 ‘고려불교의 흥성을 부패의 일면’이라며 탄압했으나, 불교는 500년 동안 그 줄기를 이어왔다. 제주 불교와 다름이 무엇이랴. 탄압의 흔적을 옹이로 드러내며 이어지는 것이 문화일지어다. 

제주 불교는 이형상 전후 18세기경에는 한껏 위축됐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신앙 속에 살아 더욱 기승했다. 제주 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깊은 계곡에서, 고목 앞에서 두 손 모아 부처에 의지하는 세월을 살았다. 제주의 아가들은 “지장보살 지장보살” 호명하며 흔드는 ‘애기구덕’ 속에서 자라났고, 제주의 아버지들은 험한 파도 앞에서 관세음보살을 힘껏 불러 바다를 건너는 삶을 살았다. ‘아이코’ 싶은 일마다 관세음보살을 불러 호위를 의뢰하는 일상을 살아왔다.

제주 불교와 사찰은 조선시대 불교의 위상만큼 한껏 위축됐으나 부처님은 곳곳에서 호명받아 여전히 민중 속에 나투고 계시다, 1908년 관음사의 초가 법당을 필두로 다시 중흥되며 근대 제주 불교는 시작됐다. 

『탐라순력도』(보물) 중 「한라장촉(漢拏壯囑)」, 제주특별자치도 소장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사 이형상이 화공(畵工) 김남길에게 제주의 모습을 그리게 해서 만든 화첩이다. 「한라장촉」은 1702년  당시 제주도 모습과 주변 도서(島嶼)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고지도다.
『탐라순력도』(보물) 중 「건포배은(巾浦拜恩)」, 제주특별자치도 소장
1702년(숙종 28) 12월 20일, 문(文)·무(武) 등 관료 300여 명이 관덕정 앞과 건입포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 즉 조정을 향해 배례하는 모습과 제주 마을의 신당(神堂)을 불태우는 모습을 그렸다.

 

법정사 항일운동

1918년, 법정사 스님들은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목적을 주창하며 무력 항일항쟁을 거행했다. 주지 김연일 스님은 일제의 국권침탈의 부당함을 법회를 통해 법정사 신도들에게 교육했고, 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을 앞장세워 독립운동에 700여 명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강창규 스님은 참여자를 이끌어 중문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우며 기세를 드러냈다. 

김연일 스님은 3・1운동 참여자들의 3년 형보다 훨씬 무거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강창규 스님을 비롯한 법정사 신도와 지역의 많은 참여자는 옥고를 치렀다. 법정사는 불태워졌고 항일운동 참여자들은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700여 명이 참여하고 66명이 체포되는 등 제주도 내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었지만, 제주 불교는 이후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 옳다고 여기는 일에 인생을 걸었던 맑은 영혼들은, 미륵불이 도래하지 않은 부처 없는 세상에서 지옥의 지장보살로 고난을 감수했다.

항일 이력은 제주 불교를 일제의 통제와 관찰 대상이 되게 했다. 1924년에 이르러서야 제주 불교는 이회명 스님의 지원과 안봉려관 스님의 노력으로 관음사 법당 낙성식을 통해 불교 활동의 재개를 꾀할 수 있었다. 1만여 명 참석자의 열망이 뒷받침됐다. 이후 제주 불교는 이회명 스님에 의지해 활동했고, 스님은 제주 불교를 위해 헌신한 바가 컸다. 많은 제자가 이회명 스님을 스승으로 건당(建幢, 법맥을 이어받음)했고 많은 불제자가 수계를 받았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기념탑. 항일운동 발상지 법정사 터 인근에 기념탑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 세워져 있다.

근대의 제주 불교

1924년 일본인 제주도지사 마에다 젠지(前田善次)의 주도로 제주불교협회가 구성됐다. 이회명 스님이 제주불교협회 회장으로, 관음사 스님과 일제의 종교계 통제정책에 따라 도회 의원, 군수, 읍장, 은행 지배인, 법조인 등 제주도의 행정·사법·경제계 인사들과 신도들이 참여했다. 시내에 제주불교포교당을 건립해 불교부인회, 불교소녀단 등 신행 단체 활동의 장도 마련했다. 회원이 3,000여 명에 달했고 동리별로 30여 명의 대표를 둬 업무를 진행했다. 

제주불교협회 구성 이후, 제주불교포교당의 7일 정진기도, 성도일 기념 설법회, 염불 정진, 석가탄신일 행사, 불교소녀단의 학예회 등 신행 활동이 활발히 이뤄졌다. 제주불교협회는 재해와 재난 상황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도 수행했다. 제주도에 큰 수해가 발생했을 때는 대규모 추도회를 주도했고, 해상 조난자를 위한 수륙재를 주관하기도 했다. 제주불교협회 활동에 힘입어 제주도 전 지역에 사찰이 창건돼 갔다. 봉불식과 가사불사도 활발했다. 이회명 스님은 전도를 돌며 순회 포교를 실시했다. 

제주 불교는 서울 중앙에서 이뤄지는 불교 활동에도 함께해 조선불교학인대회에서 불교 개혁을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이제 명실공히 근대 제주 불교 활동이 움트는 시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일제는 항일운동을 결집했던 이력이 있는 제주 불교를 의심했는지, 관음사 인물들의 독자적 활동을 제한했다. 관음사의 주역이었던 안도월 스님을 1930년에야 포교 담임자로 허가하는 등 여전히 통제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종교계를 활용해 심전개발운동을 실시했고, 불교계는 정신계몽과 마음 밭[心田]을 가꾼다는 뜻에 따라 포교의 활성화를 의도했다. 제주 불교는 심전개발운동 이후 왕성한 사찰 건립 등 불교 활동 활성화라는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제주의 사찰들은 사찰령에 근거해 육지에 있는 대흥사·백양사·화엄사·기림사·위봉사를 본사(本寺)로 등록한 말사(末寺)의 위치였다. 제주도에는 본사에 해당하는 사찰이 없었다. 1939년, 오이화 스님은 본사 별로 흩어진 제주 사찰을 통합한 제주불교연맹을 결성했고, 이를 통해 제주 불교의 통합된 활동을 진행했다. 스님은 관음사 해월학원에서 공부한 제주 출신 스님이었고, 제주불교연맹의 성립은 ‘제주 불교가 스스로의 독립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1908년 관음사의 창건으로 시작된 근대 제주 불교 활동이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통제된 이후 가까스로 얻게 된 활동의 자유이기도 했다. 

제주불교연맹은 전도 순회강연을 실시했다. 강연은 제주읍에서 시작해 동부지역을 거쳐 서귀포에 이르고, 다시 서부지역으로 이어져 하귀까지 이뤄졌다. 전체 읍면을 대상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순회하는 대규모의 강연 활동이었다. 각기 본사가 다른 스님들이 함께 강사로 참여해 40차례의 강연을 시행했다. 심전개발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 불교사상 및 신앙생활, 시국 동향에 대한 강의 등이 있었다. 제주도 곳곳에 사찰이 창건되었고 신행 활동이 왕성해지는 풍요의 시기를 맞이했으며, 관음사 해월학원 이후 비로소 스님 교육을 위한 강원 운영까지도 시행할 수 있었다. 

관음사에 있는 봉려관 스님 공덕비

 

8・15 해방과 혁신활동

해방은 급격히 왔다. 제주 불교계는 친일을 적극 반성하고, 새로운 나라에서 제주 불교의 혁신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1945년 11월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를 개최했다. 제주도 사찰과 스님들이 대거 참여해 새로운 불교 활동을 결의했다. 관음사 오이화 스님과 이일선 스님의 제주 불교에 대한 열성은 새 나라의 건국이라는 부푼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근대 이후 처음으로 제주교구가 성립돼 제주도 교무원을 구성했다. 그간 육지부 사찰의 말사로서만 존재하던 제주 불교 사찰들이 독자적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했다. 제주도 승려대회에서는 사찰 정화, 의식 개혁, 불교전문강원 설립, 모범총림 창설 등에 관해 논의했다. 사찰 재산의 공공화, 대처식육의 금지, 사찰 재산 관리 등 한국불교의 수행 풍토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의도했다.

해방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희망은 ‘혁신된 불교’라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러나 제주 4·3항쟁으로 도처가 지옥이 되어버린 살상의 현장 속에서, 희망은 온데간데없이 처참하게 괴멸돼 정지됐다. 제주 불교의 중심인물들이 총살, 수장 등으로 희생됐고 사찰이 불태워졌다. 청정도량 관음사는 ‘관음사 전투’의 현장이 돼 아비규환 무간지옥이 됐다. 제주 사회의 전면적 처참함 속에 제주 불교도 온몸으로 함께했기 때문이다. 

관 밖으로 내민 부처의 두 발을 알아챘던, 한라산 자락의 눈 밝은 이들이 일군 근대의 제주 불교는 사라져 버렸다. 그 수행을 기억하며 흉내 내어 볼 새로운 수행자의 출현을 기다림은 미륵불의 도래를 기다리는 일이 되어 버렸다. 

현무암으로 조성한 관음사 문수보살상
관음사 보현보살상

 

사진. 유동영

 

한금순
제주 불교사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근대제주불교사』(경인문화사, 2013) 등이 있으며 제주 불교와 항일운동을 주제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