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삼재 그리고 부적] 입춘과 부적 이야기
부적, 악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다
동양의 부적과 한국의 처용 부적
입춘의 세시풍속을 살펴보면 새봄을 맞이하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조정에서는 문무백관이 모여 입춘하례(立春賀禮, 입춘절 축하 의례)를 하고 임금으로부터 춘번자(春幡子)라고 하는 머리 장식을 하사받았다. 집마다 햇나물로 입춘채(立春菜)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고 집 안을 단장한 후 복을 기원하는 글귀를 붙였다. 입춘이 한 해의 첫 절기이니만큼 무사히 일 년을 지내고 복을 구하는 풍속이 성행했다. 그 방식은 다양해서 굿을 하거나 부적을 붙이는 등 집마다 나름의 의례 전통이 있었다. 입춘이 절기로서의 성격을 거의 잃어버린 지금도 이러한 기복 행위는 현재진행 중이다. 재앙을 쫓고 복을 구한다는 양화구복(禳禍求福) 행위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부적(符籍)을 들 수 있다. 부적은 귀신을 물리치고 재액을 예방하는 그림이나 글씨를 말하는데 넓게 본다면 종이에 쓴 글씨·그림 이외에도 신통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주술적인 물건[呪物]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은 인류 사회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인간 보편의 문화 요소다. 그중에서도 한·중·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전통에서는 종이를 이용한 방식이 널리 쓰였다(‘부적符籍’이라는 명칭 자체가 문서를 뜻하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주부呪符, 부주符呪, 혹은 부록符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동양의 부적은 특히 도교의 종교 전통과 관련이 깊다. 누구나 한 번쯤은 도교 도사들이 부적을 날려 귀신을 퇴치하는 이야기를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교의 교파 가운데에는 부적과 주문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치료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부록파(符籙派)가 있었다. 동한 시기의 태평도와 오두미도, 후대의 영보파, 상청파, 정일도 등이 이에 속한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기 도교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도사들이 주문·부적 사용에 열중했다는 점이다. 이는 불교를 의식한 포교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불교와의 종교·문화적 습합이 이뤄진 후대에는 불교와 도교 양측 모두 부적 사용이 일반화됐고 이러한 종교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부적 전통 전체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은 아니며, 불교·도교의 전래 이전에도 한국에는 고유한 부적 문화가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처용 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었는데 신라 왕의 조정에서 정사를 도왔다. 어느 날 역신(疫神)이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알게 됐는데, 그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 나왔다. 처용의 의연하고 여유로운 모습에 오히려 겁을 먹게 된 역신은 용서를 구하며 앞으로 처용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이후로 온 나라 사람들은 처용 그림을 문에 붙여 사귀(邪鬼)를 물리쳤다고 한다. 전염병 귀신을 물리치는 부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처용의 생김새와 의복, 처용의 노래와 춤은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국가 의례 전통에 포함돼 전승됐다. 민간에서도 탈춤과 부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처용은 지금의 달마대사 부적만큼이나 인기 있는 부적이었던 셈이다.
화재부(火災符)와 질병부(疾病符)
부적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제작된다. 때문에 부적의 종류는 너무나도 다양하다.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동안 인간이 겪을 법한 각종 사건에 특화된 각종 부적이 존재하며, 병 치료 부적의 경우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병증과 관련한 부적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이러한 특정 목적을 갖고 제작된 부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화재를 예방하는 화재부(火災符)와 질병의 치유를 기원하는 질병부(疾病符)를 꼽을 수 있다. 온통 목조 건물뿐이었던 전통 시대에 화재는 자칫 큰 피해를 불러올 수도 있는 중대한 재난 중 하나였다. 2001년 경복궁 근정전 중수공사 때에 지붕 용마루 밑에서 육각형 은판과 붉은 종이가 발견됐다. 두 유물의 공통점은 ‘수(水)’ 자 문양을 주요 모티프로 한다는 점이다.
먼저 붉은 종이 유물의 경우 그 크기는 세로 44.3cm 가로 38.4cm 정도의 크기로, 한가운데에 ‘水’ 자가 크게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용(龍)’ 자 1,000여 자가 가득 메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은 군주를 뜻하기도 하지만 물과 바다를 상징하기도 한다. 즉 이 유물은 수신(水神)의 대표 격인 용의 신령함으로 화재가 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부적인 것이다. 육각 은판은 한 개의 폭이 3.6cm, 두께가 0.25cm인데 각 모서리에 ‘水’ 자를 돌려가며 새겼다. 이 역시 화재를 막는 부적으로 같은 유물이 근정문과 홍릉 침전 등에서도 발견됐다.
화재막이 부적은 당연히 민간에서도 애용됐으며 지금도 주변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화재부의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물을 뜻하는 글자인 ‘水’ 혹은 ‘海’, 수신(水神)을 상징하는 ‘龍(용 용)’이나 ‘龜(거북 귀·구)’를 사용해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火’ 자를 ‘水’ 자가 빙 둘러싸서 불기운을 포위해 버린다는 의미를 나타내거나, 혹은 ‘水’ 자를 거꾸로 써서 물이 쏟아지는 의미를 담는 경우가 많다. 목조 건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지붕 부근이나 화재가 자주 일어났던 곳에 붙이는데 현대에 와서는 전기·가스난로에 붙이기도 한다.
질병부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민간에서 가장 많이 의지했던 부적이다. 과거 질병부 사례를 살펴보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는 점, 유감주술적 원리를 적용한다는 것, 그리고 질병의 원인을 병귀(病鬼)에 의한 것으로 인식해 이를 쫓아내 치유를 도모한다는 공통된 특징이 보인다. 유감주술(類感呪術)은 어떠한 현상에 대한 모방을 통해 유사한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눈병이 난 경우에 그에 대한 처치를 부적의 그림에 적용함으로써 부적 주인의 눈병을 낫게 한다는 원리다. 이러한 논리에서 환자의 얼굴을 그려 넣고 눈에 못을 박아 대신 시침(施鍼)하는 효과를 도모하는 부적이 만들어지게 된다.
질병의 원인이 병귀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부적의 사례는 매우 많다. 두창(천연두)신이 떠나가라고 말을 그리거나, 아예 말에 타고 떠나는 두창신을 표현한 부적이 대표적인 사례다. 병귀를 퇴치하는 방식은 이처럼 달래어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보다 과격한 방법도 있다.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를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로 데리고 가서 눕힌 뒤 그 모양을 부엌칼로 그리고 그 환자 그림의 급소에 부엌칼을 꽂아 놓는다. 말하자면 말라리아 귀신을 부엌칼로 위협하여 쫓아내는 것이다.
삼재 막는 호랑이와 매
화재부나 질병부처럼 특정 목적으로 주문 제작된 부적이 있는가 하면 여러 재난에 두루뭉술하게 사용하는 부적도 있다. 삼재부(三災符)가 그 대표적인 예다. ‘세 가지 재난’이라는 뜻의 삼재는 문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가장 일반적인 삼재론은 수재(水災)·화재(火災)·풍재(風災)다. 화재 대신 한재(旱災, 가뭄)나 황재(蝗災, 병충해)를 포함하기도 한다. 혹은 호환(虎患)·흉년(凶年)·시환(時患, 전염병)으로 삼재를 지칭하기도 한다. 요컨대 삼재는 어떠한 특정 재난을 지칭한다기보다 만물을 천지인으로 아울러 말하는 것같이 세상의 모든 재난을 ‘3’이라는 숫자에 담아 표현한 개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자연 재난의 삼재론과 결을 달리해 명운론(命運論)의 측면에서 삼재를 말할 때가 있다. 이때의 삼재는 출생년의 12지지(地支)를 따라 매겨지므로 12년 주기로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 된다. 명운론적 삼재론에서 신자진(申子辰)년생은 인묘진(寅卯辰)년, 인오술(寅午戌)년생은 신유술(申酉戌)년, 사유축(巳酉丑)년생은 해자축(亥子丑)년, 해묘미(亥卯未)년생은 사오미(巳午未)년에 삼재가 든다고 본다. 이때 삼재년은 3년간 지속되는데 들어가는 해를 들삼재[入三災·입삼재], 두 번째 해는 눌삼재[滯三災·체삼재], 마지막 해는 삼재가 나가는 해라 하여 날삼재[出三災·출삼재]라고 부른다. 한 번 삼재가 들면 연속으로 3년간 고난의 시간이 펼쳐지므로 이에 대한 액막이가 필요한데 가장 대중적인 방법 중 하나가 삼재부인 것이다.
삼재부의 이미지에는 대표적으로 호랑이와 매가 등장한다. 호랑이는 용맹함을 상징하는 대표적 맹수로 산군(山君, 산신령)이라고 여겨지는 신성한 동물의 대표 격이다. 때문에 혼례 때 신부가 타는 가마 위에 덮는 호랑이 가죽과 호랑이 발톱으로 만든 노리개는 대표적인 호부(護符, 신불神佛의 힘이 있어 재액을 면하게 해주는 부적) 중 하나였다.
삼재부로는 호랑이보다 매의 그림이 더 널리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삼재부에 그려지는 매의 도상적 핵심은 머리가 셋이라는 점이다. 각각의 머리는 삼재의 재앙을 하나씩 전담해 동시에 이를 쪼아버려 순식간에 삼재를 소멸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머리 셋 달린 매 상징의 기원이 명확하지 않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비슷한 도상으로는 조선시대 군기(軍旗) 중의 하나인 주작 깃발을 들 수 있다. 주작은 남쪽 방위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주작기는 남쪽에 배치된 군대를 지키는 깃발이다. 추측건대 불[火]과 양(陽)의 상징으로 음(陰, 귀신)을 쫓는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상징 구조에서 주작은 삼재를 소멸하기 위해 매서운 발톱과 부리를 가진 매로 대치됐을 것이다. 후대에는 호랑이와 매가 결합한 더욱 강력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전통시대 우리 문화 속 부적은 인간사의 거의 모든 고통에 대응되었기에 그 종류와 표현 양상은 대단히 다양하다. 이 글에서는 그 가운데 일부만 살펴보았다. 이러한 부적들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히곤 한다. 시각적 표현물로 그 예술성을 논하기도 하고, 종교적 심성을 읽기도 하며, 열악한 의료지식과 무지몽매함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이 가운데 모두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의미를 취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심성인 복을 비는 마음일 것이다.
유현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려사』 「예지(禮志)」 가례(嘉禮)를 통해 본 고려시대 국속(國俗)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암각화와 바위신앙, 의례상징과 민속 분야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