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팔공산] 달구벌 천도 계획과 송림사

2022-11-30     김남수
 칠곡 송림사 5층 전탑(보물)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전탑이다. 여러 번 중수를 거쳤으며 사리장엄구가 봉안돼 있었다. 사진 유동영

감은사와 송림사

팔공산 서쪽 자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칠곡 송림사(松林寺)가 위치한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한 근거는 남아 있지 않다. 송림사의 창건과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 5층 전탑(塼塔, 벽돌로 쌓은 탑)이다. 우리나라는 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남아 있는 몇 개의 전탑 중 하나가 송림사 5층 탑이다. 몇 차례 보수와 중수를 거친 것으로 보고 있다.

5층 전탑이 주목받는 이유는, 탑의 건립 시기와 탑 안에 모셔졌던 사리함과 장엄구(이하 사리장엄구)를 통해 송림사의 창건과 위상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보호하는 함과 장엄한 유물을 통칭한다. 송림사 사리장엄구는 높이 67mm, 폭 142mm로 감은사에 모셔진 사리장엄구와 크기와 높이, 양식이 거의 비슷하다. 감은사는 통일신라를 이룩한 문무왕이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세우기 시작해,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한 사찰이다. 

송림사 사리구(舍利具)와 유리로 만든 장엄물(보물)
5층 전탑 안에 모셔져 있었다. 사리구의 크기와 형태가 감은사지와 비슷해, 송림사의 창건을 추측게 해준다.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사진 정승채

 

달구벌 천도

감은사와 송림사의 창건 시기가 비슷하다면, 송림사의 창건은 신문왕 재위 기간(681~692)이 된다. 송림사의 창건을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신문왕 시절 벌어졌는데, 바로 ‘달구벌 이도(移都) 계획’이다. 

왕이 달구벌로 이도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王欲移都達句伐 未果).

『삼국사기』에 나오는 짧은 문장이다. 신문왕은 689년, 신라의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고자 했다. 아버지인 문무왕 시절 삼국을 통일한 해가 676년이니, 10년 직후의 일이다. 수도 이전이 국가의 큰일이기에 준비 기간이 꽤 됐을 것이다. 즉, 신문왕은 즉위 직후부터 수도 이전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신문왕이 수도 이전 계획을 세운 이유는 경주라는 도시가 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해 통일 이후의 수도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귀족 세력과의 갈등 등 여러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광개토왕이 평양 천도를 앞두고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세웠듯이, 삼국 시기에는 수도를 옮길 때 미리 사찰을 건립하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송림사의 위치가 김천, 구미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점도 주목한다. 경주와 대구에서 반도의 중앙으로 나가기 위해 이곳을 거쳐야 한다. 송림사의 창건과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없고 유물의 제작 시기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지만,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 계획’은 팔공산 자락에 있는 송림사의 위상을 재고(再考)하게 한다. 

사리장엄에 함께 봉안된 공양품들.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1. 이상훈, 「칠곡 송림사의 입지조건과 창건배경」, 『한국고대사탐구』 18호, 2014년
2. 박정현, 「제작 기술로 본 송림사 사리장엄구 제작 시기 연구」, 『야외고고학』 제38호,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