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 소확행#] 영화·드라마 속 그 사찰
영상미 뿜뿜·눈물샘 자극했던 그때 그곳
시원했던 바람이 변심했다. 찬바람이 늦가을 공기와 몸을 섞는다. 가을이 뒷걸음질 치고, 겨울이 성큼 얼굴을 들이민다. 꽃과 나무를 찾아 사찰을 찾던 계절이 흘러간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느낄 저 절은 어떤 주제를 갖고 찾아야 할까?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영상미 뿜뿜했던, 우리의 눈물샘 자극했던 그때 그곳은 어디일까? 영화와 드라마 속 그 사찰로 떠나본다.
소 그리고 외계+인과 헤어질 결심
노인과 30년간 땅을 지키며 산 소 한 마리가 있다. 노인은 팔순, 보통 15년을 산다는 소는 마흔 살. 행여 소가 아플까 봐 논에 약도 치지 않는 고집쟁이 무뚝뚝한 노인과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고삐 잡히면 노인과 함께 길을 나서는 무덤덤한 소는 서로 ‘헤어질 결심’을 한다.
늙어 죽은 소를 묻은 노부부가 극락왕생을 발원한 곳이 봉화 청량사다. 최고의 작품상 등을 휩쓴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초반 부분은 영화가 끝나면 다시 되새김질 되면서 눈물샘을 자극한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청량사에 이르면 작은 산이지만 빼어난 청량산의 웅장한 맛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워낭소리>에서 소를 위해 정성을 올리던 석탑 ‘삼각우총(三角牛塚)’에 서 볼 일이다. 세 개의 뿔을 가진 소의 무덤이라고 하니, 인생의 도반이던 소를 묻고 극락왕생 빌던 노부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려나….
“서래 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라는 거, 진작에 알았어요.”
법고를 사이에 두고 눈빛을 교감하는 두 사람이 있다. 바위산에서 떨어져 죽은 남편의 용의자가 된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와 이를 수사하는 형사 해준(박해일)이다. 둘의 관계는 여기에서 ‘헤어질 결심’을 한다. 의심과 헤어져 관심으로 바뀐다. 설법전 계단을 우산 쓰고 나란히 걸으며, 서래는 해준의 거친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준다. 해준은 법당에서 눈물을 터뜨린 서래에게 손수건을 건넨다.
송광사 종고루에서 찍은 장면은 촬영감독과 탕웨이가 꼽은 ‘최고의 한 장면’이 됐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제75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헤어질 결심>은 N차 영화가 됐다. ‘두 번, 세 번 볼수록 더 잘 보이는 영화’란 뜻이다. 여주 탕웨이가 이 영화를 찍으면서 템플스테이를 체험하며 발우공양도 하는 등 한국 절에 흠뻑 빠졌다는 후문이 있는데…. 탕웨이가 반한 한국의 절이 <헤어질 결심> 촬영지인 조계총림 순천 송광사다. 남주 박해일은 영화 <나랏말싸미>에 이어 송광사와 두 번째 인연을 맺었다.
송광사는 임금의 스승 국사(國師) 16명이 나온 고찰이다. 한국불교 스님의 맥[승맥・僧脈]을 잇고 있기에, 세 가지 보물 불법승(佛法僧) 가운데 승보사찰(僧寶寺刹)로 불린다.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1932~2010) 스님이 정진하던 불일암도 가깝다.
오래전부터 외계인이 그들의 죄수를 인간의 몸에 가뒀다면? 외계인 죄수들과 우리나라 도사들이 한바탕 대결을 펼친다면? 이 ‘기발한 상상’이 영화에서 실현됐다. <암살>, <도둑들>로 ‘쌍천만’ 흥행을 일으킨 최동훈 감독이 7년 만에 내놓은 복귀작 <외계+인>이다.
<외계+인>의 주인공 얼치기 도사 무륵(류준열)이 액션과 도술을 펼친 곳이 천불천탑과 와불로 유명한 화순 운주사다. 다른 도사와 한바탕 도력과 무력을 겨루는 무륵이 “반야바라밀” 주문을 외우며 자신을 도울 우왕과 좌왕을 등장시킨 곳이 ‘X’가 선명한 탑으로 즐비한 운주사 경내다. 마고할미가 치마에 돌을 담아 천불천탑을 쌓았다는 설, 국운이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으려 한 국사 도선 스님이 쌓았다는 설, 와불이 일어나면 운주사가 수도가 된다는 설…. 온통 ‘믿기 힘든 이야기’가 서린 사찰인 만큼 ‘기발한 상상’을 펼치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도깨비가 고백하니 대길이 추노하더라
“내가 계속 살았으면 좋겠어, 너와 같이….”
이 대사를 읊조리는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tvN 드라마 <도깨비>의 도깨비 김신(공유)이 검을 뽑아달라며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에게 부탁하면서 했던 아픈 고백이다. 지은탁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은 무로 돌아가야 하지만, 사랑하는 지은탁과 더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시청자들을 울렸다. 하얀 눈이 내린 이곳에 선 두 사람,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 이 숲길이 평창 월정사 전나무숲길이다.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사실 <도깨비> 촬영 전부터 유명했다. 800년 수령의 전나무 1,800여 그루가 빼곡하게 숲을 이룬 길이다.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선재길에 포함되면서 더 사랑받는 트레킹 코스이자 순례길이다.
그뿐만 아니다. <도깨비>는 안성 석남사에도 등장한다. 도깨비 김신과 저승사자 왕유(이동욱)의 전생이 밝혀져 두 인물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의 장면을 석남사에서 찍었다. 도깨비가 저승사자를 만나러 돌계단을 오르는데, 여기가 석남사 대웅전에 오르는 돌계단이다. 고려 광종 때 국사 혜거 스님이 중창한 석남사는 대웅전과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이 일품인 도량인데, 사찰 입구에서 대웅전까지 이르는 돌계단이 명품이다.
사실 석남사는 도깨비, 저승사자와 인연 전에 구미호와도 인연이 깊다. SBS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의 주인공 대웅(이승기)이 구미호(신민아)를 깨우는 장면을 석남사에서 촬영했다. 대웅이 ‘천보사’의 삼신각 안 그림 속 여우에게 아홉 개의 꼬리를 그려주자 500년간 그림에 갇혔던 구미호의 봉인이 풀린 것이다.
강렬한 OST와 가수 임재범이 부른 〈낙인〉 그리고 “언년아~” 대사 등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KBS 드라마 <추노>는 한 사찰에서만 찍지 않았다. 좌의정 이경식(김응수)이 도망친 노비를 잡는 추노꾼 대길(장혁)에게 오천 냥을 내걸며 송태하(오지호)를 잡으라고 지시한 곳이 여주 신륵사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에서 언년이를 사이에 두고 피할 수 없는 추노가 시작된다. 대길이 말을 타고 송태하를 쫓던 곳은 화순 운주사, 대길이 일행이 뛰어다니던 산이 달마산, 언년이가 절을 올리던 해남 도솔암을 찾은 대길은 후에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고자 한 송태호와 함께한다.
2009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에 쫓기던 천명공주가 국선 문노를 찾아 나서는 장면이 봉화 청량사에서 촬영됐다. 이렇게 국민에게 큰 사랑을 받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사찰이 있을까? 다른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사찰이 주연급 조연이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띵작’으로 꼽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구례 천은사에서 찍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기에 고졸한 목조건축이 필요했을 터다. 수홍루는 애기씨 고애신(김태리)과 약혼자 김희성(변요한)이 마지막으로 작별한 곳이고, 보제루는 일본군이 고애신의 식솔들을 괴롭힐 때 고애신이 검은 실루엣으로 등장한 장소다.
199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다녀가 유명해진 안동 봉정사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극락전이 있는 도량이다. 그리고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주경중 감독의 <동승>이 촬영된 영산암이 봉정사의 산내암자다. 주 감독이 3년간 수많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물색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자 ‘한국의 10대 정원’으로 꼽히는 도량이 영산암이다. 마당의 소나무와 배롱나무 그리고 화초가 서로 무심한 듯 어우러진 이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암자를 영화 <나랏말싸미> 역시 촬영지로 택했다. 더 있다. 영화 <생활의 발견>은 춘천 청평사, <달마야 놀자>는 김해 은하사, <인사동 스캔들>은 강화 정수사,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진도 쌍계사, <봄날은 간다>는 삼척 신흥사, <짝패>는 청주 관음사, <무사 백동수>는 용인 금련사, <무신>은 합천 해인사와 충주 미륵세계사, <공주의 남자>는 예천 용문사….
뇌리에 깊이 박힌 한 명장면은 추억을 소환하고, 추억에 엉긴 감정은 저절로 발길을 재촉한다. 천혜의 자연과 고즈넉한 공기, 핏속에 흐르는 익숙함과 친근함, 전설같은 이야기가 서린 그곳은 은은한 매력을 풍긴다. 그래서다. <도깨비> 김신의 대사처럼 주제를 갖고 만난 사찰과 함께한 순간은 모두 눈부시다.
“너와 함께한 시간이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