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과 ‘책의 날’

10월 11일, 책의 탄생을 기념하다

2022-09-28     주일우

책의 비가(悲歌)

‘책의 날’은 책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면서 기울어가는 운명에 대한 비가(悲歌)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책은 읽어야 하는 무엇, 혹은 고리타분한 어떤 것, 기껏 좋게 봐도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즐기는 습관의 대상이다. 하지만 책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누린 혜택과 영광은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의 경우와 비교할 수도 없다. 

생명은 차이와 반복을 거쳐 느리게 진화하는데, 인간은 책으로 문화적 진보의 빠른 길을 찾았다. 그것이 넘쳐 인류가 만든 것이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우리는 책을 기리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예고된 파국을 막는 일도 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책에 고마움을 분명하게 표시할 날을 골라 ‘책의 날’을 정했다. 그날이 생일이든, 제삿날이든 분명하게 가릴 수 있다면 까다롭지 않았을 텐데 쉽지 않았다. 

책의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고 탄생의 기록은 희미하다. 책의 몰락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책은 죽지 않았고 디지털의 형태로 액체가 되어 틀에 맞춰 몸을 바꾼다. 지금까지 인류의 학술적, 예술적 성취를 담은 책은 여전히 세상의 사랑을 받고 있다. 책의 제삿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책의 날’을 정하는 것은 책의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날을 꼽는 수밖에 없다. 어떤 날이 기념할 만할 날일까?

 

세계 책의 날과 한국의 책의 날

1995년,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4월 23일을 ‘세계 책의 날’로 정했다. 1616년, 스페인의 세르반테스와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날이 4월 23일이다. 또 기독교의 축일 중 하나인 ‘성(聖) 조지의 날’이기도 하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여러 기독교 국가에서 크리스마스만큼 중요한 축제가 열렸던 날이다. 

특히 카탈로니아에서는 소년은 소녀에게 장미를 선물하고, 소녀는 소년에게 책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얼마나 오래된 전통인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짐작건대 아주 오래된 전통은 아닐 것이다. 백 년 전만 해도, 장미야 어떻게든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책은 구하기 쉬운 물건이 아니었을 테니까. 

늘어놓고 보면, ‘책의 날’을 고른 이유가 약간 옹색하다. 돈키호테와 햄릿이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양의 두 문호만을 기려 날을 고른 것이 마뜩잖고, 그렇다고 카탈로니아의 작은 전통이 전 세계로 넘치지도 않았다. 

물론, ‘책의 날’을 고른 사람들도 고민했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시작한 책의 역사가 네모난 종이의 한 쪽을 엮어 만든 코덱스로 바뀐 것은 언제일까? 일일이 베껴 써야 했던 책은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나무에, 혹은 금속을 주조해서 인쇄한 책이 등장한 때는 언제일까? 동양에서는 금속활자를 발명한 사람이 분명치 않으니, 서양에서 금속활자를 만들고 보급한 구텐베르크를 기념하는 것은 어떨까? 그의 생일이 분명치 않은데, 고향인 마인츠에서는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해서 축하한다. 조금 더 고민했으면, 다른 날을 택하지는 않았을까? 우리나라의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유네스코보다 더 일찍 비슷한 고민을 했다. 10월 11일을 ‘책의 날’로 골라 1987년부터 기념했다. 아하,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오래도록 이야기해 왔기에 날짜로 정해서 박은 것 아닌가? 대한출판문화협회는 1986년 제25차 상무이사회에서 ‘책의 날’을 제정하기로 결정하고 학계, 서지학계, 언론계, 도서관계, 출판계를 망라해서 ‘책의 날 제정위원회’를 만들었다. 최준, 유재천 (이상 학계), 안춘근, 이경로 (이상 서지학계), 이중한 (언론계), 천혜봉 (도서관계), 임인규, 권병일, 김언호, 김병익, 노양환 (이상 출판계)이 위원을 맡아 날짜를 물색했다.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날, 용비어천가를 출판한 날, 세계 최초 금속활자 주자소가 설치된 날, 고려시대 국자감 서적포가 설치된 날 등이 거론됐다. 실록과 책에 기록된 것들을 근거로 날짜들이 비교적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해를 넘겨 개최된 자문위원회에서 팔만대장경 완성일인 10월 11일과 고려 국자감 서적포 설치일인 4월 11일로 후보가 좁혀졌다.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했다. 학계, 출판계, 문인, 언론계, 관계, 정계, 단체, 예술계, 종교계, 실업계, 법조계, 도서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55%가 10월 11일을 선호했다. 안타깝게도 이 숫자만 남아 있고 선호의 이유가 분명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날  

대한출판문화협회는 1987년 창립 40주년을 맞이해 10월 11일을 ‘책의 날’로 선포했다. 기록에 따르면 1251년 9월 25일에 팔만대장경이 완성됐는데,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10월 11로 정한 것이다. 함께 발표된 ‘책을 받드는 글’은 문학과지성사 김병익 대표가 쓰고 서울대 철학과 김태길 교수가 손을 보탰다.

책은 마음의 밭을 갈아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슬기의 높이를 돋군다. 우리는 책으로 좁은 울을 넘어서 오랜 때와 먼 곳을 보고 뛰어난 삶과 만나며 올바른 길을 찾는다. 우리 겨레가 일찍부터 우리의 것을 지키며 아름다움을 가꾸어 온 것은 책을 사랑하여 그 가르침을 몸으로 살아 온 얼을 이어 받음으로써이며, 우리나라가 이제 밝은 빛을 좇아 먼 앞날로 바르게 나아갈 것을 믿음은 우리 모두 책에 대한 바람을 탄탄히 다지고 그 보람을 옳게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책의 가없는 뜻을 알리고 크나큰 고마움을 기리도록 우리의 자랑인 팔만대장경이 나온 시월 열하룻날을 책의 날로 받든다.

이렇게 정해진 ‘책의 날’ 상징탑이 국립중앙도서관 마당에 건립됐고 한국출판문화 1,300년을 기리는 전시회도 열렸다. 한국출판공로상과 출판유공자 표창이 ‘책의 날’에 열린다. 팔만대장경은 중세 동아시아에서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기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대장경 중에서 가장 꼼꼼히 교정을 보아 완성한 걸작이다. 팔만대장경의 완간을 기념하는 우리의 ‘책의 날’이 유네스코의 ‘책의 날’보다 의미가 깊어 보인다.

경판을 새기는 작업은 텍스트를 고정하는 것인데, 이제 디지털 시대를 맞이해 텍스트의 유동성이 커진다. 서른다섯 번째 맞이하는 ‘책의 날’은 고정된 텍스트의 영광을 딛고 떠도는 텍스트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날이 돼야 한다. 

박제된 책의 운명은 기울고 있지만, 몸을 바꾼 책은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인류가 절멸하지 않는 한, 그 모양이 어떻게 변하든 책은 우리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책의 날’을 계속 기념할 것이다. 

 

주일우
대한출판문화협회 부회장, 서울국제도서전 대표. 이음출판사에서 책과 잡지를 기획하고 만들면서 서울국제도서전을 통해서 책의 축제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