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대장경판의 인쇄

인경印經, 목판에서 한 권의 책으로

2022-09-28     해명 스님
먼지가 쌓여 있는 대장경 목판. 먼지의 두께만큼 세월의 깊이가 새겨져 있다. 불경이 새겨진 면 외곽에 각수(刻手) 표시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해인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돼 있으며, 해인사 팔만대장경 연구원에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고려대장경 및 제경판’(이하 대장경판)은 불교의 성보 또는 국보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닌다. 대장경판은 불교사적 의미는 물론 민족의 역사와 조상의 얼이 담긴 자랑스러운 민족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장경판은 나무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손실이 발생한다.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 손대지 않고 관리만 한다고 해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직접 만지고 인경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보존・관리가 이뤄진다. 역사적으로도 인경을 통해 마모되고 파손된 경판은 복각판을 제작해 대체하고, 대체된 경판은 같이 보관하며 계승해 왔다.  

인경을 하기 위해 목판을 꺼내고 있다. 사진 해인사 제공

 

인경에 필요한 도구

인경(印經)은 대장경판에 새겨진 경전을 먹을 이용해 한지에 인쇄하는 작업을 말한다. 인경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와 준비가 필요하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먼저 인경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물자와 인력을 확보한다. 인경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품은 한지와 먹이다. 전통 한지와 먹은 가격이 고가이기에 비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인경에 경험이 많은 인경장이 필요하다. 숙련되지 않은 작업자가 인경을 하게 되면 불필요한 자원과 시간의 소모가 생기게 된다. 숙련된 인경장이 인경을 해야 전통 한지와 먹의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 

숙련된 인경장은 인경할 때 필요한 전문 도구를 직접 제작해서 갖고 다닌다. 그 대표적인 도구가 마렵(馬鬣)이다. 마렵은 인경을 할 때 경판에 먹을 바르고 한지를 올린 후 일정한 힘과 압력을 가해 눌러 문지르는 역할을 하는 도구다. 사람의 머리카락과 밀랍을 이용해 만드는데, 모양은 그릇을 닦을 때 사용하는 매우 두툼한 스펀지처럼 생겼다. 

마렵은 만드는 기술이 보편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해인사 사하촌에 거주하는 인경장들만 알고 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만들기 어렵거니와 재료가 되는 머리카락을 구하기도 어렵다. 예전에는 행자들이 출가할 때 자른 머리카락을 받아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출가자가 줄어 머리카락 구하기도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인경에 필요한 도구와 준비물. 사진 해인사 제공 

 

인경 장소와 순서

물자와 인력이 준비되면 인경할 경전을 정하고 장경판전에서 경판을 꺼낸다. 장경판전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곳이기에 정해진 인원을 선발해 들어간다. 경판을 꺼내는 사람, 경판의 먼지를 털어내는 사람, 경판을 안전하게 포장하는 인원 등으로 소임을 정하고 장경판전 안에서 작업을 진행한다. 

경판을 보관 틀에서 꺼내면 오랜 세월의 무게만큼 먼지가 묻어 있다. 부드럽고 깨끗한 솔로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면 경판의 환한 얼굴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경판을 한지로 감싸고 충격 방지 포장재로 다시 한 번 감싸고 소량으로 박스에 담아서 밀봉한다. 이렇게 작업된 경판은 팔만대장경 연구원으로 옮겨 포장을 해체하고 경판 보관 틀 순서에 맞게 배치한다. 

경판을 관리하고 인경하는 팔만대장경 연구원은 해인사 내에 있으며 보안이 철저한 곳이다. 팔만대장경을 포괄적으로 관리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숙련된 인경장과 인경을 보조하고 교정보는 인원이 한 팀이 돼 인경을 하게 된다.  

경판 받침대에 경판을 고정하고 먹솔을 이용해 먹을 골고루 펴 발라준다. 오랜만에 먹물을 만나는 경판은 나무의 특성상 먹을 많이 먹는다. 그래서 본격적인 인경을 하기 전 경판의 앞뒤로 먹을 많이 먹여준다. 먹을 골고루 경판에 펴서 발라주고 한지를 한 번에 거침없이 경판 위에 올려준다. 한지를 올릴 때는 경판 중앙에 잘 맞춰야 하며, 망설이거나 한 번에 올리지 못하면 한지에 먹이 묻게 돼 깨끗한 결과물을 얻지 못한다.  

한지를 올렸으면 마렵을 이용해 일정한 압력과 방향으로 한지를 문지르는데, 압력이 부족하거나 어느 한 곳이라도 지나친다면 정확한 결과물을 얻지 못한다. 문지른 뒤에는 빠르게 한지를 경판에서 떼어 내야 한다. 시간을 지체하면 경판에 한지가 붙어서 찢어지기 때문이다. 

천천히 시간을 갖고 인경 작업을 할 수 없기에 숙련도가 중요하다. 경전이 인쇄된 한지를 옆에 있는 보조에게 전해주면 보조원은 경전이 인쇄된 종이를 꼼꼼히 살핀다. 인경이 잘됐는지 교정을 보는 중요한 역할이다. 글자가 정확히 모두 잘 보이는지 확인하고 먹이 부족하거나 많아서 흐리거나 뭉친 곳이 없는지, 먼지가 껴서 무슨 글자인지 확인이 안 되는 것 등을 식별한다. 

인경이 중요한 이유는 경판의 상태를 확인하는 가장 객관적이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전이 인쇄된 한지를 모아서 먹물이 마를 수 있는 건조 기간을 거치고 나서야 완전한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수 있다. 

글로 설명하는 일도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생명이 담긴 경전으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은 얼마나 더 어려운지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경을 마친 경전의 인쇄본

 

인경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지만, 대장경판의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마모되고 파손된 경판은 복각해서 교체하며 보존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해인사에 전승돼온 대장경판 인경은 현실적으로 전통을 지속·발전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국책사업이었을 만큼 규모나 물자, 예산이 많이 필요하고, 관리관청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대장경판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인경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를 관리하는 관청의 허가를 받는 등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관리 주체인 해인사가 국가를 대신해 보존·관리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지만, 경판의 보존・관리를 위한 인경을 해인사 자체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에도 해인사에서는 매년 작은 규모라도 인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해인사승가대학에 재학 중인 모든 스님에게 인경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특강으로 기획해 교육하고 있다. 또한 복각판을 이용해 인경을 직접 체험하며 절차와 방법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실습으로 인원을 선발하고 전문적인 인경장과 함께한다. 궁극에는 책을 만드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통이 끊이지 않게 기술을 전수하고 계승하는 일이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겠지만, 국가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해인사가 주체가 돼 역사와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인경 자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팔만대장경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부처님 말씀을 널리 전파하여 모든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리라. 쉽지 않은 인경 작업이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바르고 정확하게 인쇄하여 널리 펼친다면 이보다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해명 스님
해인승가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인 스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