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진리의 바다, 대大장경
13세기 대한민국에 구축된 ‘구글’
팔만대장경이란?
국보로 지정된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팔만대장경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불교 대장경판이자 당대 목판 인쇄술의 결정판이다. 하여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팔만대장경은 13세기 고려로 쳐들어온 몽골 군대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막아내고자 거국적으로 기획·조성됐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팔만대장경의 공식 명칭은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다. 서기 918년에 건국돼, 936년부터 1392년까지 한반도 전체를 지배했던 고려왕조가 만든 대장경 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대장경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장경(藏經)’은 불교의 교조인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한 경전이라는 의미이며 장경판은 그 경전들을 나무에 새긴 활판(活版)을 가리킨다. ‘대(大)’라는 수식은 불법(佛法)의 탁월성과 신성성을 꾸미는 말이기도 한데, 일단 양적으로 굉장히 방대해서 그렇다. 경판의 개당 가로 길이는 68cm에서 78cm. 일렬로 쭉 이으면 한반도 남단 부산에서 북단 신의주까지의 직선거리다. 정말 커서, ‘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은 왜 ‘팔만대장경’이라고 할까? 간명하다. 경판의 총 수량이 8만여 개여서다. 으레 부처님이 생전에 남긴 말씀을 팔만사천(八萬四千)법문이라고 한다. 중생의 세세한 번뇌를 일일이 치유해주려니 총량이 이렇게나 많아진 것이다. 더불어 그것들을 통째로 기록하려니 8만 개 이상의 나무판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8만 4,000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은유적인 ‘시크릿 코드’에 가깝다. 4성제 8정도 12연기에서 보듯,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4의 배수를 중요시했다.
고려대장경이 아닌 팔만대장경이란 고유명사로 일반화된 이유도 궁금하다. 우선 ‘팔만(八萬)’이라는 숫자가 지닌 중량감에서 기인할 것이다.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으로 방대함은 곧 위대함과 직결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또 다른 고려대장경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1세기 거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교장(敎藏, 속장경)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한 당사자인 몽골의 침략으로 다 불타 없어졌다. 팔만대장경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려대장경이고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빛나는 고려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대략 8만 1,000여 개인데 정확한 숫자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원래는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일본인 서지학자 오다 간지로(小田幹次郞)가 정한 8만 1,258판이었다. 1962년 국보로 지정할 때도 이 수치가 반영됐다. 그러나 2000년 이래 10여 년간 문화재청과 해인사 등의 공동 조사를 통해 오다의 조사 때는 누락했던 경판이 추가로 드러났다. 빠졌던 경판 94장을 보태면 8만 1,352판이 된다. 8만 1,258판이든, 8만 1,352판이든 어쨌거나 어마어마한 양이기는 하다.
팔만대장경의 구성
앞서 밝혔다시피 ‘대장경(大藏經)’은 불교 경전 전부를 가리킨다. 꼭 부처님 말씀만을 수록한 것은 아니다. 불교학의 체계는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으로 이뤄진다. 경장은 부처님이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직접 설법한 내용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과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망라한 것이다. 논장은 부처님이 설파한 경과 율에 관한 역대 고승들의 주석(註釋)이다. ‘삼장’이란 ‘세 개의 광주리’라는 의미를 가진 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Tripitaka)’를 한문으로 번역한 말이다. 그리하여 유네스코에 등재된 고려대장경의 국제적 학명(學名)은 ‘트리피타카 코리아나(Koreana)’.
팔만대장경의 전체 틀은 「대승(大乘)삼장」, 「소승(小乘)삼장」, 「보유잡장(補遺雜藏)」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편집에는 편집하는 주체의 관점과 소신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맨 앞쪽에 배치된 대승삼장은 한국불교가 지향해온 대승불교에 관한 내용이다. 보살행 곧 보현행원(普賢行願)으로 상징되는 대승불교적 깨달음의 세계와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소승삼장은 동남아시아에서 흥한 소승불교에서 받드는 주요 경전의 집합이다. 부처님이 열반한 직후 가장 먼저 발생해 초기불교의 교리로 확정된 것들이다. 소승불교는 대승불교에 대한 폄칭(貶稱)이며 요즘은 초기불교로 표현하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보유잡장은 대승삼장이나 소승삼장과 달리 뚜렷하고 정연한 체계가 없다. 부록과 비슷하며 남은 이야기들을 쓸어 담았다. 잡다한 경전들, 고승들의 전기와 여행기, 불교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사서류, 경전 목록까지 끼워 넣었다.
팔만대장경에는 총 1,538종의 불교 경전이 들어 있다. 책으로 엮으면 6,805권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대장경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동일하고 아름다운 서체로 기록돼 있다. 전체 팔만대장경을 분류하는 단위는 ‘함(函)’이다. 편찬된 종의 순서에 따라 여러 권의 책을 지정된 상자인 함에 보관하는 형식이다. 1,538종의 경전을 함 단위로 차곡차곡 나누어 집어넣었다.
함차(函次)는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를 따랐다. 천자문의 첫 글자인 ‘천’에서 이름을 따온 천함(天函)으로 시작해 마지막 639번째인 동함(洞函)에서 끝내고 있다. 경전의 권수, 설명, 위치, 배경, 번역자의 이름, 나라 이름도 포함돼 있다. 한편 제경판(諸經板)이란 대장경을 보완하기 위해 해인사가 별도로 직접 후원해 제작한 목판들이다. 총 5,987판. 역시 해인사에 보관돼 있다.
가장 완벽하고 권위 있는 대장경판
팔만대장경 목각 경판과 제경판은 당대 최고의 인쇄 및 간행 기술을 보여준다. 양적인 규모뿐만 아니라 정확성과 재생산성의 측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각각의 판목은 체계적이고 세심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제작 이후 760여 년이 지난 판본을 완벽하게 찍어낼 수 있을 만큼 우수한 내구성을 확보하고 있다.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 가운데 가장 정확한 판본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해인사는 불경 연구와 교육을 위한 자료로 고려대장경 목판을 여러 차례 인쇄해왔다. 그 결과, 해인사는 불교 교육과 함께 지식 교육의 본거지로 우뚝 섰다.
고려대장경은 최우수의 표준 원전 비평 연구판으로 자리했다. 당시 고려대장경 판각을 총괄 지휘했던 수기대사(守其大師)는 고려의 초조대장경과 중국에서 편찬된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 거란본대장경본(契丹本大藏經)의 내용을 엄밀히 비교·대조했다. 아울러 이들의 오류를 정정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권위 있는 대장경판을 만들어냈다.
다른 모든 목판 대장경의 경우 훼손되거나 소실됐지만 팔만대장경만큼은 유일하게 오늘날까지도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1237~1248년에 제작된 후, 약 7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완벽하고 아름다운 인쇄를 할 수 있다. 당대의 국내외 고승들은 자신의 학문을 펼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참조했다. 완전한 형태로 아시아 전역에 퍼져나가, 동아시아의 불자와 학자들에게 원전(原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듯 팔만대장경은 그때까지 연구된 불교학의 모든 것을 전부 모았다. 그래서 거대하다. 경판을 모두 인쇄하면 무려 16만 장이 넘는다. 『화엄경』이든 『금강경』이든 『반야심경』이든 『원각경』이든 『사분율』이든 『전등록』이든 다 들어 있다. 어떤 경전을 보고 싶으면 몇 번째 경판의 어느 부분을 보거나 인쇄하면 된다는 색인도 확실하다. 동시에 이들에 대한 당대 스님들의 연구와 해석도 모조리 결집했다. 그야말로 불교학의 모든 것이다. 물론 직접 팔만대장경을 인쇄한 책을 본 적이 없고 교과서에서나 그 이름을 들었을 현대인들에게는 구시대의 유물로만 인식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이든 고려대장경이든, 이름만으로는 그 효용과 값어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을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구글(Google)’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13세기 대한민국에 구축된 불교 포털사이트로 정의할 수 있다.
참고문헌
_ 유네스코와 유산 홈페이지
_ ‘해인사 장경판전’ 진현종,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들녘
장웅연
작가이자 뮤지션. 연세대 철학과 졸업. 『나는 어제 개운하게 참 잘 죽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등 여러 권의 불교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