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 스님의 신심명 강의
중도연기의 눈으로 본 깨달음의 노래
저작·역자 | 도법 지음 | 정가 | 17,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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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2-06-19 | 분야 | 종교(불교) |
책정보 |
두께_18mm|296쪽|2도| |ISBN_979-11-92476-09-4 (03220) |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이상을 꿈꾸는 현실주의자 도법 스님이
중도연기의 눈으로 읽는
지금 바로 ‘이해, 실현, 증명’되는 <신심명>
“지극한 진리(깨달음)는 어려울 것이 없네. (지도무난 至道無難)
오직 분리하여 가려냄을 꺼려 할 뿐. (유혐간택 唯嫌揀擇)”
중국 선종 3조인 승찬 대사가 대중들이 알기 쉽게 선(禪)의 요체를 풀어쓴 <신심명>의 첫 구절이자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또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구절이기도 하다. 146구 584자라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안에는 깨달음은 거창하고 신비로운 무엇이 아니라 분별과 집착을 벗어나면 가능한 것이라는 가르침이 녹아 있다. 바로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다.
《도법 스님의 신심명 강의》는 도법 스님이 <신심명>을 읽고, ‘중도연기’의 시각으로 풀어 쓴 것이다. 글자에 얽매이기보다는 그 구절에 담긴 의미를 중심으로 <신심명>을 새롭게 옮기고, 그 구절에 담긴 가르침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오롯이 자신의 눈으로 풀어내었다. 이를 통해 무엇이 깨달음이고, 어떻게 해야 그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는지를 살폈다.
지은이 도법(道法)
1949년 제주에서 태어나, 17세가 되던 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가했다. 66년 금산사에서 출가하여 69년 해인사 강원을 거쳐, 이후 13년 동안 봉암사와 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선 수행을 했다. 87년엔 금산사 부주지를 맡았고, 90년엔 청정불교운동을 이끈 개혁 승가 결사체 선우도량을 만들었다. 95년부터 실상사 주지를 맡아 인간화 생명살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98년 실상사 소유의 땅 3만 평을 내놓고 귀농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98년 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기존의 총무원과 정화개혁회의로 나뉘어 다툴 때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분규를 마무리 짓고 미련 없이 실상사로 내려갔다.
99년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하면서 귀농운동 차원을 넘어 생활협동조합・대안교육・생명평화운동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2004년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은 후,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후 5년 동안 3만 리를 걸으며 8만 명의 사람을 만나 생명평화의 가치를 전했다.
2010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 본부장 등 종단 소임을 맡아 다툼 없고 평화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내다가 2017년 실상사로 내려와 다시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와 마을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현재 지리산 실상사 회주이자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붓다, 중도로 살다》 《화엄경과 생명의 질서》 《길 그리고 길》 《화엄의 길, 생명의 길》 《내가 본 부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지금 당장,》 등이 있다.
∙ 머리글 : 나의 고백, 〈신심명〉과의 인연
∙ 들어가는 이야기
∙ 중도연기의 눈으로 〈신심명〉을 읽는다
신심명 강의
01・02.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03. 제대로 끼워야 끝까지 어긋나지 않는다
04. 분별에서 벗어나야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05. 창과 방패로는 무엇도 얻지 못한다
06. 한 걸음만 어긋나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
07. 내 눈으로 보는 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08. 취하고 버리면 무사태평하지 않다
09. 쫓지도 말고 안주하지도 마라
10. 하나가 그대로 모든 것이다
11. 멈추려고 할수록 풍파가 일어난다
12. 피는 꽃은 피는 꽃대로, 지는 꽃은 지는 꽃대로 아름답다
13. 쌀 씻어 밥 짓는 일이 곧 깨달음의 실천
14. 손등 없는 손바닥과 손바닥 없는 손등
15. 말과 생각에 구속되지 말라
16.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곳
17. 모든 문제는 근본을 잘라내야 해결된다
18. 오직 있는 그대로 보라
19.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면 길이 열린다
20. 밤하늘의 달과 호수의 달을 함께 즐겨라
21. 말의 길, 생각의 길이 끊어진 자리
22.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밖에서 구하지 마라
23. 하나도 둘도, 좋음도 나쁨도 없는 자리
24. 삶의 문제를 만드는 건 단견뿐
25. 무지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해결된다
26.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27. 양극단이 떨어진 상태가 해탈이고 열반이다
28. 소리 없는 귀, 귀 없는 소리
29.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내 삶을 이루는 한 요소
30. 온전한 텅 빔은 인드라망과 같다
31. 참된 진리는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32. 바른 길이 아니면 서둘러도 더디다
33. 어느 하나만 옳다고 하는 것은 단견이다
34. 훌훌 털어버리면 해결된다
35. 꽃이 빛나면 그대도 빛난다
36. 단견을 버려야 실상을 마주할 수 있다
37. 어떤 멋진 길도 스스로 걸어야 내 길이 된다
38. 이름 없는 풀꽃도 꽃이다
39. 세상을 경이로운 현장으로 만드는 건 삶의 실력이다
40. 조작하지 않으면 시비는 생기지 않는다
41.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42. 편안하고 좋기만 한 인생은 없다
43. 바다는 인연 따라 출렁일 뿐
44. 그대가 우주이고, 우주가 그대다
45. 본래 없는 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46.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47. 참된 앎의 등불을 밝히면 어둠은 사라진다
48. 조작하는 마음 내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
49. 한 톨 먼지 안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
50.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
51. 진리는 말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2. 움직임과 분리된 멈춤은 없다
53. 분리된 것도 아니고 하나인 것도 아니다
54. 정해진 길은 없다
55. 붓다만큼 밥도 귀하고 똥도 귀하다
56. 흔들림 없는 삶이 곧 무사태평
57. 실상은 흐르는 물과 같다
58. 밥이 오면 입을 열고 잠이 오면 눈을 감는다
59. 꽃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어야 핀다
60. 너와 내가 함께 가야 하는 길
61. 그대가 나이고, 내가 그대다
62. 단단히 마음먹고 앎을 실천으로 옮겨라
63. 행위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64. 영원 그대로 순간이다
65. 진리는 있는 곳도 없고, 없는 곳도 없다
66・67. 한 톨 먼지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
68. 있음에 의지한 없음, 없음에 의지한 있음
69. 중도가 아닌 어떤 것도 지키지 말라
70. 일체와 분리된 하나, 하나와 분리된 일체는 없다
71. 삶과 죽음은 서로 의지하여 있다
72. 시작이 곧 완성이다
73. 중도의 길을 가라
∙ 부록 : 도법 스님의 수행 이야기
불교 수행의 기본
간화선 수행의 기본
깨달음은 신비로운 무엇이 아니다
분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될 뿐
중국 선종의 3조인 승찬 대사의 <신심명>은 146구 584자라는 짧은 분량이지만 팔만대장경과 1,700공안을 압축하여 담았다고 평가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특히 중국불교에서는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된 이후 저술된 것 가운데, ‘최고의 문자(文字)’로 꼽히며 선문(禪門)에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 여겨진다. 이 짧은 글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심명>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분별하거나 집착하여 차별하지 않는 것, 바로 중도(中道)의 자세다. 나와 남, 미움과 사랑, 있음과 없음, 옳고 그름 등의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도를 깨우치는 것이고, 말과 분별에서 벗어난 그곳에 바로 ‘깨달음’이 있다고 말한다.
《도법 스님의 신심명 강의》는 내 삶과 세계를 살리는 진리로서의 불교를 강조해 온 도법 스님이 <신심명>을 읽고 새롭게 풀어쓴 책이다. 그동안의 강설서들이 각 구절의 문자적인 의미에서부터 <신심명>의 가르침을 풀어나간 것과 달리, 도법 스님은 글자나 용어의 세세한 뜻에 매이기보다는 ‘중도연기’의 입장으로 <신심명>을 새롭게 풀었다. 한자의 의미를 중심으로 한 우리말 번역 대신 단번에 읽고 이해․실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각각의 구절을 옮기고, 쉬운 비유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설명으로 <신심명>의 핵심 가르침을 알려준다. 붓다의 가르침 중 핵심은 ‘중도연기’라고 여기는 스님의 시선으로 읽고 풀어낸 이 책을 읽다 보면 깨달음은 도달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무엇이 아니라 누구나 언제든 실현시킬 수 있는 경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확철대오’라는 허수아비 눈이 아닌
‘상식의 눈’으로 읽은 <신심명>
지난여름, 실상사에서는 대중 스님들이 뜻을 모아 안거 기간 동안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바로 실상산중 ‘승가연찬’이다. 그리고 그 공부 모임의 첫 주제가 바로 <신심명>이었다. 그러나 도법 스님이 이때 <신심명>을 처음 접해본 것은 아니었다. 선방이나 강원에서 공부할 때면 반드시 접해 보는 책인 만큼, 도법 스님 역시 20대 때 <신심명>을 처음 만났다.
하지만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청년 시절의 스님에게 <신심명>의 가르침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큰스님들은 물론이고 여러 경전과 선어록 등등에서 치열한 정진으로 확철대오해야 한다고 하는데,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라고 정반대의 말을 하는 <신심명>의 내용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50년 만에 다시 읽은 <신심명>은 달랐다. 이미 ‘확철대오’라는 허수아비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좌절을 겪었고, 이후 전통이나 권위 등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에 그 내용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 속에는 치열하게 수행한 소수의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신비로운 경지로서의 깨달음이 아닌, 누구나 바로 이해하고 현재의 삶에서 실현할 수 있는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이 책에는 도법 스님이 공부하면서 이해하고 느낀 <신심명> 이야기를 담았다. 스님 스스로 공부한 기록이기에 경전, 어록 등 다른 참고자료 대신, 오직 ‘상식의 눈’으로 읽으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이 책의 부제가 <신심명>을 ‘알려준다’는 의미가 아닌, ‘읽는다’는 의미의 ‘중도연기의 눈으로 본 깨달음의 노래’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통해 누구나 <신심명>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도록, 그래서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중도,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분리해서 취하거나 버릴 것은 본래 없다. 본래 없는데 본인이 조작하여 이것저것을 분리하고 좋다, 나쁘다 차별하며 아우성을 치고 아수라장을 만들고 있다. 참되게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허망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래서 승찬 스님은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 없네.”라고 〈신심명〉의 첫머리에 못 박았다. 승찬 스님의 이 말씀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헛소리인가, 왜곡되었는가, 과장되었는가? 거듭거듭 물어보고 스스로 답해보라. 그렇지 않다. 적재적소에 잘 맞아떨어지는 매우 정확하고 명료한 진실이다.
중도적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고 공부하면 놀라운 결과를 얻는다. 같은 내용을 《중론》에서는 “적멸희론, 희론(62견)이 고요히 사라진다.”라고 표현했다. 보통 희론이 사라진 상태를 불교에선 열반이라고 한다. 중도적으로 문제를 직시하고 다루면 바로 열반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정법의 등불을 밝혀온 역대 붓다를 위시로 한 스승들께서도 우리가 참되게 알아야 할 참된 진리, 참된 자신의 참모습을 ‘중도연기’, ‘유아독존’, ‘법성원융’, ‘연기 공’, ‘본래붓다’, ‘무상대도(無上大道)’, ‘본래면목’, ‘일심법계(一心法界)’, ‘불이세계(不二世界)’,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 ‘존재의 실상’, ‘즉심즉불’, ‘심즉시불(心卽是佛)’, ‘평상심도(平常心道)’, ‘유식무경(唯識無境)’, ‘중도실상(中道實相)’, ‘팔불중도(八不中道)’ 등으로 표현하여 같은 뜻을 드러내고 있다. 옛 스승들은 한마디로 인생(불교) 공부를 중도적으로 하기만 하면 진리는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격’이라고 말하고 있다. 승찬 스님이 “어려울 것 없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 본문 41~42쪽
사람들은 우리가 보고 듣고 먹고 걷고 하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자체가 참된 최고의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신 본인이 믿고 있는 삼매니, 깨달음이니, 신통이니 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찾아 헤매 다니고 있다. 한번 물어보자. 눈으로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깨달음・삼매・신통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열이면 열, 눈이 먼 상태에서 누리는 삼매보다는 마음껏 자유자재로 푸른 하늘을 보는 것을 택할 것이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면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진짜 기적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상식을 확고히 하여 흔들림이 없는 삶이 되도록 하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날마다 좋은 날, 무사태평의 삶이 현실이 된다.
그동안 죽자사자 매달려온 것이 있다면 직접 확인해보라.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기적 같은 일상을 내어주고 매달려온 그것이 과연 그럴 만한 것이었는지. 길은 분명하다. 중도, 있는 그대로를 참되게 잘 알고 받아들이고 잘 활용하고 사는 길이 붓다의 일생이었다. 그 삶을 무사태평의 삶이라고 한다. 우리가 갈 길도 그 길임에 틀림이 없다. 참된 길, 그 길이 영원히 새로운 길이다.
— 본문 63~64쪽
삶의 문제를 다루는 그대의 태도는 어떤 방식인가? 우리는 보통 부정적인 습관을 하나하나 없애는 쪽에 치중한다. 예컨대 자만심을 없애기 위해 자만심을 알아차리고, 후회하고, 없애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물론 틀린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이 있다. 일상적으로 평소 만나는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든 내 앞에 있는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 순간 나는 바로 겸허한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자만심은 저절로 사라진다. 자만심을 다 없앤 뒤에 겸허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겸허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 자만심은 저절로 사라진다. 내 안의 번뇌를 모두 없애기 위해 애쓰는 것과 지금 당장 해탈열반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지만, 실제 삶의 과정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삶의 뿌리에 주목하고 다루는 태도, 이것이 승찬 스님이 말한 “귀근득지”다.
— 본문 100쪽
깨달음은 참된 앎(반야)을 뜻하고 그 앎은 지금 바로 순간순간 삶으로 실천(바라밀)되어야 할 내용이다. 그런데 깨달음이 너무 심오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먼 훗날에야 이룰 수 있고, 나아가 깨닫기만 하면 놀라운 신비와 기적이 펼쳐지는 것으로 설명되고 이해된다. 이에 더하여 ‘불교는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불교에 입문할 때부터 그 많아진 모든 것을 다 공부해야 불교를 제대로 하는 것처럼 말하니 그야말로 막막하기 그지없다. (중략)
붓다의 입장은 너무나 명료하고 확고했다. 내용이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붓다는 우리들이 문제 삼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참모습인 중도실상에 대한 무지와 착각의 병 때문에 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병에 대한 ‘응병여약’으로써 가르침을 설하였다. 그렇지만 수많은 붓다의 가르침은 사실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힌 전도몽상의 허망한 소견에서 깨어나도록, 벗어나도록 하고자 함일 뿐, 그 어떤 다른 사연도 말하지 않았다.
붓다가 뜻한 바를 한마디로 옮기면 “전도몽상인 ‘양극단의 길’을 버려라. 있는 그대로의 길인 ‘중도’의 길을 가라.”이다. 그러면 바로 분명해진다. 복잡하고 어려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 본문 105~107쪽
내가 사는 극락전 마당에는 수십 종의 풀꽃이 피어 있다. 작고 소박한 풀꽃들이다. 누구는 선택받고 누구는 버림받는 일이 없다. 모두 다 꽃으로 인정받고 존중받는다. 차별과 다툼이 생길 이유가 없다. 여실지견, 주의를 기울여 들여다보면 종류도 대단히 다양하고 더 아름답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장에서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야 그 삶의 품격이 높아진다. 풀꽃 밭 사고방식이라야 일상의 아름다움, 일상의 신비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진정 삶의 품격과 만족이 높아진다. 저절로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최고라고 하는 일승(一乘)은 어느 하나도 차별하지 않는 풀꽃 밭의 사고방식이다. ‘마음에 드네, 안 드네’ 하는 양극단에 빠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적재적소에 맞게 잘 쓰는 풀꽃 밭의 사고방식이 최고의 수레다. 그 사고방식으로 삶을 다루는 그 순간 양극단의 마음인 ‘좋네, 나쁘네’, ‘마음에 드네, 안 드네’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발붙이지 못한다. 그 자리, 그 상태 그대로 편안하다. 홀가분하다. 그럼 충분하지 않은가. 이 사실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한가. 다른 것을 더 찾으려고 하는 것을 스승께선 “소 타고 소 찾는 바보짓이다.”라고 하셨다.
— 본문 166~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