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생_카라바조
[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삶은 이중적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삶 속에는 자랑스러운 성취만큼이나 작지 않은 실수와 과오가 중첩된다. 때로는 그 과오가 삶 전체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기도 하고, 그 과오로 인해 죄책감으로 그늘진 하루하루를 살기도 한다. 그 와중에 그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고도 해보고, 타협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번번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다시 어두운 뒷골목으로 끌고 들어가기 일쑤이다. 그 순간 예술은 그런 인간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고, 새로운 상상과 성찰을 통해 전혀 다른 시점에서 세상을 보게 만들어준다. 가령 오직 신만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인간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전환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냥 신 앞에 엎드려 빌면서 심판과 단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참회하고 과거와 결별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예술은 그 행위 자체로 누군가에게는 삶의 구원이 되기도 하고, 또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여기 자기 작품을 반성문 삼아 끊임없이 자신을 단죄하려 한 남자가 있다.
병든 바쿠스 혹은 카라바조
그 남자는 바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이다. 그의 이름부터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미켈란젤로 부에나로티와 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뒤에 붙은 ‘다 카라바조’는 카라바조 지역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카라바조는 그가 태어난 아니 정확히는 페스트 때문에 잠시 피신한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아마도 카라바조 생전에 미켈란젤로와의 경쟁을 의식한 듯한 그의 기법들은 이 이름에서부터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카라바조’라는 이름은 미술사에 문외한이었던 필자로서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아마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를 통해서 카라바조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소설 도입부에서 루브르 박물관 관장 자크 소니에르가 괴한의 습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전시돼있던 카라바조의 그림을 벽에서 떨어질 때까지 잡아당겼는데, 그 그림이 뒤로 넘어진 소니에르를 덮쳤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그저 유명한 화가려니 하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전시된 <병든 바쿠스>(1593~1594)를 직접 보고서야 비로소 카라바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 속에는 팽팽한 긴장과 불안이 묻어난다. 특히 이 <병든 바쿠스>라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위태로움에 대한 묘사는 가히 독보적이다. 그림 속 바쿠스는 병색 짙은 얼굴색을 하고 있으며, 파리하고 메마른 입술 사이로 번지는 어색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울 정도로 불안함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쿠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더러운 손으로 포도 넝쿨을 움켜쥐고 있다. 선명하게 보이는 손톱의 때는 사실적이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다. 여기에 머리 위에 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월계관이 안쓰러움을 더할 뿐이다. 그림 속 바쿠스는 병에 걸린 것이 분명한데, 악화하는지 회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카라바조 자신을 병든 바쿠스로 묘사했다고 짐작할 뿐이다.
오만과 재능
카라바조는 종교 개혁 운동이 한창이던 1571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난다. 카라바조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밀라노를 덮친 페스트로 인해 아버지를 잃게 되면서 카라바지오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홀어머니와 형제들 사이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18세가 된 카라바조는 기회를 얻기 위해 로마로 향한다. 당시 로마는 매너리즘 풍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가 밀라노에서 가져온 그림들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한다. 로마로 간 처음 5년여 동안 카라바조는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푼돈을 받고 잡일을 도와주거나 그림을 파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와중에 카라바조는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40여 점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품 거래상인 발랑탱으로부터 거래를 제안받고,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 그림들이 당시 교황청에서 유력 성직자였던 프란체스코 델 몬테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후원까지 이어지게 된다. 카라바조는 델 몬테의 주선으로 다양한 제단화를 의뢰받게 되고 성 마태 연작을 시작으로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제단화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1601)와 <성 바울의 회심>(1600~1601)을 작업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카라바조는 명성을 얻고 주목받지만, 여전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박질이나 하면서 방탕한 삶을 계속 이어간다. 심지어는 항상 칼을 품고 다니면서, 자신의 화풍을 따라 하는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다짜고짜 칼로 난도질해대기를 일삼았다. 폭행과 기물파손, 살인 등으로 경찰 수배만 총 17번, 수감은 7번을 당했다고 하니 족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더 놀라운 건 여섯 번의 탈옥 기록이다. 수감만 됐다 하면 뇌물을 쓰든 어떤 방법으로든 감옥에서 벗어난 것이다. 잠시 고위 성직자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얼마 안 가 다시 거리의 부랑자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페스트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고, 더 이상 카라바조의 악행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교황 바오로 5세로부터 ‘반다 카피탈레(banda capitale)’, 즉 발견하는 즉시 처형하라는 처분을 받게 된다.
그 후 카라바조는 이 수배를 피해 달아나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를 거치면서 무려 4년 이상의 도피 생활을 한다. 이미 명성이 높은 카라바조의 그림을 얻으려는 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으며 도피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결국 수감과 탈옥을 반복하다 자신이 이미 사면된 사실도 모른 체 토스카나 지방의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나이 38세였고,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란 중이다.
‘테네브리즘’ 속의 예술과 현실
카라바조는 르네상스 이후 별다른 발전이 없었던 ‘매너리즘’ 시대를 종식하고 1600년대 바로크 시대를 연 선구자이다. 그는 특유의 명암처리 기법인 ‘테네브리즘(Tenebrism)’을 활용해 작품의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는데, 이 기법은 후에 렘브란트와 루벤스 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그가 작업한 수많은 종교화는 이 기법을 통해 카라바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재탄생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생전에 많은 종교화를 의뢰받았지만,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나 하층민들의 삶에 주목해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는 가톨릭교회로부터 많은 성화 제작 의뢰받고서 성서 속에 등장하는 성스러워야 할 인물들의 모델을 뒷골목의 건달들이나, 도박꾼들, 매춘부들로 교묘하게 바꿔치기한다. 물론 카라바조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다윗과 골리앗’ 같은 작품에서는 아예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과 현재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기법상의 밝고 어두움만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조차도 상상 속 성스러움과 현실의 비루함을 대비하고 교차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라바조의 작품 속 명과 암 혹은 성(聖)과 속(俗)의 대비는 실제 그의 생애를 은유하듯 묘하게도 겹친다.
“겸손이 자만을 이긴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왼손에 움켜쥔 채 서 있다. 오른팔로는 골리앗으로부터 빼앗은 칼을 들고 서 있고, 골리앗의 머리를 든 왼팔은 뻗은 채로 골리앗의 최후를 확인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다윗은 어렸을 적 카라바조의 모습이고, 목이 잘린 골리앗은 세파에 찌들어 흉측하게 변한 성년이 된 카라바조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도 않는다. 그저 슬프고 측은한 눈빛으로 골리앗의 머리를 응시할 뿐이다. 달리 보자면, 어린 카라바조가 나이 든 카라바조를 단호함과 연민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작업할 무렵, 이미 죽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말미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스스로 선고를 내리는 듯하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 최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카라바조의 작품에는 유독 이른바 ‘참수’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1607)을 비롯해서 <세례요한의 참수>(1608),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1598~1599) 등이 대표적이다. 거친 그의 성정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오만함과 폭력성 그리고 광기로 점철된 자신의 현실과 단호한 단절을 원하는 그의 내면이 투사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나온 삶에 대한 고해성사이자 발로참회일 것이다. 그림 속 다윗의 오른손에 쥐어 쥔 칼등에는 카라바조의 마지막 참회처럼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겸손이 자만을 이긴다.”
(Humilitas Occidit Superbiam)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