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조지훈 ‘고사’
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고사(古寺)
_조지훈(1920~1968)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조름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리(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조지훈 시집, ‘풀잎 단장’, 창조사, 1952)
[감상]
목어를 두드리다 상좌스님은 잠이 들었습니다. 부처님은 말이 없어 미소지으시고, 은사스님은 “고놈 참” 하면서, 혼자서 예불을 모십니다.
부처님은 말 없이 미소만 지으시는데, 서녘 하늘에선 노을이 상상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상상의 나라의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망치소리가 까마귀 울음이 되어 울려 퍼지자 겨우 목숨을 지탱하던 모란꽃이 툭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이러한 늦은 봄, 부처님오신날도 지나고, 마음이 부드러운 봄바람에 조을고, 행복이 우리 몸과 마음의 넉넉함 속에 열매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