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습니다] 뻥튀기 장수
한 3년 전 일이었나보다. 그해 가을, 햅쌀이 나올 즈음 잘못 간수해 바구미가 생긴 묵은쌀을 햇볕에 내다 널고 체로 쳐 고르는 등 한바탕 정리했다. 장모님은 이런 쌀은 밥을 지으면 푸실푸실 해서 밥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으니 뻥튀기를 튀겨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나눠주자고 했다. 뻥튀기를 튀겨오는 일은 내가 맡고 잘 갈라 담아서 마을회관에서 나눠주는 일은 장모님이 맡기로 했다.
집안 공론이 된 뻥튀기
그리고는 전통시장이 서던 날, 시장 안에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뻥튀기 점포로 갔다. 가보니 노인 어른이 뻥튀기를 튀기고 있었다. 들고 간 쌀을 계량통에 부어보니 한 다섯 방을 튀길 분량이었다. 앞에 두 분 어르신이 튀겨가고 난 뒤 내 차례가 돌아왔는데, 노인 어른은 힘이 드시는지 내게 뻥튀기 기계 조작하는 것을 직접 해보라는 것이었다. 뻥튀기 튀기는 순서에 따라 뻥튀기 기계 안에 쌀을 넣는다. 이때 단맛을 내기 위해 감미료를 같이 넣는다. (옛날에는 사카린을 넣었는데, 요즘엔 발암물질로 지목돼 퇴출당했을 것인데 무엇을 넣는지 모르겠다) 감미료를 넣으면 먹을 때에 쉬 입이 마르니 넣지 말라는 장모님 말씀을 따른다. 그러고는 입구 문을 닫는다.
이때 노인이 쇠막대 두 개를 엇갈리게 꽂고 꽉 조이라고 하여 일러주는 대로 했다. 노인은 가스에 불을 붙이고 기계 밑에 넣은 다음 스위치를 올려 기계를 돌렸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아마도 대략 볶는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겠다. 시간이 되어 가스 불을 빼고는 스위치를 올려 뻥튀기를 튀긴다는 신호로 사이렌을 울렸다. 그리고 “뻥이야!” 하는 소리 없이 바로 쇠막대를 당겼다. 이렇게 튀겨진 뻥튀기를 큰 용기에 부어 내고 비닐봉지에 담으면 끝이다. 이렇게 다섯 방을 튀겨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나눠드렸다.
그런데 두 달 전쯤 시장을 돌아보았는데 뻥튀기 가게가 닫혀있었다. 예사롭게 뻥튀기가 없으니 시장 어디 한 곳이 좀 빈 것 같고, 구색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번 장에 다녀오신 장인어른께 뻥튀기 점포 문을 열었더냐고 여쭤보니 안 열린 것 같더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음번 장에 다녀오실 때 잘 보시라고 부탁드렸는데 이번에도 열리지 않았단다. 알아보니 아마도 그 노인 어른이 더 유지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내가 “우리가 인수해볼까요?” 하고 가볍게 지나가듯 말을 던졌는데, 의외로 장인어른은 적극적으로 “그래 한번 추진해 볼까? 나도 옛날에 뻥튀기 튀기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생각을 한 적이 있어”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말에 아내가 내려왔을 때 뻥튀기 가게의 인수 문제가 본격적으로 집안 공론에 부쳐졌다.
장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시골에서는 젊은 나이에 그런 일 하는 게 건달처럼 보여서 안 좋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른바 내리막 업종이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시골 노인들이 자식 손자들 오면 주려고 뻥튀기를 튀기는데 그럴 일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버님은 텔레비전에서 보니 어느 전통시장에서는 뻥튀기 점포를 어머니가 물려주어서 아들 내외가 시골로 내려와서 하는데 잘 되더라는 것이다. 단순히 뻥튀기만 튀겨주는 것이 아니라 강정 같은 것도 개발해서 만들어 팔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그곳에 전통시장이 서는 날 같이 보러 다녀오자고 적극적이셨다.
이렇게 오가던 얘기들이 이제는 중단되어있다. 그 이유는 아버님이 상인회에 알아본 인수 비용과 그 노인 어른이 주장하는 금액이 두 배 이상 몇백만 원이나 차이가 나서 노인을 잘 구슬려 설득하지 않는 이상 어렵다는 것과 적어도 두 사람은 같이 일을 해야 이거 저것 새로운 것을 벌여볼 수 있는데 혼자 서는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순간에 충실한 외침, 뻥이야!
내가 뻥튀기에 끌린 것은 그 뻥튀기 점포 노인의 심부름을 해준 인연도 있지만, 더 멀리는 아마도 어렸을 적의 아련한 기억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어릴 적 우리 집 바깥마당은 탈곡기를 세워 온 동네 장정들이 탈곡하는 장소로 쓰일 만큼 넓었다. 그래서 뻥튀기 장수들이 마을을 돌다 우리 동네에 오면, 우리 집 바깥마당에서 자주 뻥튀기 좌판을 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시로 나갔던 외가 친척 부부가 뻥튀기 손수레를 끌고 집 마당에 나타났다. 부부는 묵묵하게 그러나 다소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잘게 조각낸 장작에 불을 피우고 기계를 손으로 천천히 돌려 볶은 다음 뻥튀기를 튀겼다. 뻥튀기 마당에는 동네 조무래기들 몇몇이 모여 있을 뿐 어른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날 튀긴 뻥튀기는 몇 방 되지 않았다. 뻥튀기 기계를 정리하여 오토바이에 묶인 손수레를 끌고 가는 부부의 모습이 내겐 무척이나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부부 모두 점잖은 분 같은데 도시에서 하던 일이 실패를 했을까, 고향을 비켜서 어디 낯선 곳으로나 다닐 생각을 하지 않고 왜 고향으로 왔을까, 지나가는 길에 들리러 왔을까, 아니면 낯선 뻥튀기 일을 고향마을에서 처음 시작해보는 것일까?’
이처럼 뻥튀기 장수가 된 그 사람들이 짠하고 안 되었다는 생각이 최근 많이 바뀌었다. 전통시장 뻥튀기 점포에서 노인의 일을 도와줄 때, 사이렌 소리에 겹쳐 그 수줍어하던 모습 같던 그이의 깜짝 놀랄만한 “뻥이야!”하는 의외의 커다란 외침이 되살아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소리는 그에게 있어서 그냥 온통 “뻥이야!” 그 자체였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원망도, 지금도 나는 살아있으니 보아라 하는 듯한 오기 어린 호소도, 나는 지금 한낱 뻥튀기 장수요 하는 부끄러움도, 그 어떤 삿된 생각이 티끌만큼도 달라붙을 곳이 없는, ‘자신의 존재를 ‘뻥이야!’하는 외침에만 백 퍼센트 던진 그런 소리였으리라, 아마도 그래야 했으리라’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뻥이야!”하는 소리는 오직 곧바로 다가올 “뻥!”을 예고하는 쌍둥이 소리일 뿐 그 어떤 무엇이라고 갖다 붙일 것이 없는 소리이다.
뻥튀기의 원리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뻥튀기 기계통 안에서 답답하고 고되게 서로들 안달복달 하던 쌀알들이 뻥튀기 문이 열리자마자 “뻥!”하고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 밖으로 탈출을 시도할 때, 그렇게 백 퍼센트 “뻥!”이 된 그 자리에서 자기 몸을 몇 배나 불린 튀밥으로 변신하는 신비로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리라.
요즘 우리 세상살이 세태를 생각해 본다. “뻥이야!” 하는 그 소리에 모든 사람이 “뻥!” 소리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등 반응하지만, 그 소리를 지른 뻥튀기 장수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등등 그 어떤 사적인 반응이나 관심도 대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금 우리 사회도 그런 관계들이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 말이다. 메시지 발송자와 그에 대한 세속사를 꼬치꼬치 캐고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소셜네트워크 전성시대 한가운데서 이처럼 관심-무심한 세상살이는 어떨까?
나는 진정으로 뻥튀기 장수를 해보려고 한 것인가 되물어본다. 아내는 오직 책상물림으로 살아온 내가 뻥튀기 장수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낸 것만으로도 내가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다고 좋게 평해주지만, 나는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건, 어떤 세상사건 간에 닥치는 그대로 백 퍼센트 온 존재를 들이부어 순간순간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 스스로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윤남진
동국대를 나와 1994년 종단개혁 바로 전 불교사회단체로 사회 첫발을 디뎠다. 개혁종단 순항 시기 조계종 종무원으로 일했고, 불교시민사회단체 창립 멤버로 10년간 몸담았다. 이후 산골로 내려와 조용히 소요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