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특집] 조계종 종정 중봉 성파 스님

2022-05-01     불광미디어
“출가 동기는 발심입니다.”

“그대는 물이라,
능히 배 띄우고 뒤집으니
부는 바람에도 잔잔하시길”

조계종 종정은 종통을 승계하는 최고 권위와 지위를 갖는 정신적 지도자다. 그래서 ‘법의 상징’이라 불린다. 표현부터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런데 지난 3월 30일 취임한 제15대 종정 성파 스님(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은 달랐다.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서도 넘치지 않는 소탈함. 권위 위에 서지 않는 소탈함은 평소 익혀두지 않으면 어느샌가 권위가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맞다. 성파 스님은 평소에도 그랬다. 기자간담회와 취임법회는 성파 스님의 소탈함이 오래됐다는 증거다. 

부처님오신날 특집 인터뷰 요청에 성파 스님이 곁을 내주었다. 월간 「불광」 발행인 지홍 스님, 류지호 불광미디어 대표가 서운암에서 다탁을 사이에 두고 성파 스님과 마주 앉았다. 찻잔 속 차는 그윽했고 잔잔했으며, 다담(茶談)은 격의 없고 소탈했다. 

“세팅 끝났습니다.”
“머, 어떻게 할 거가? 대담으로?”
“자연스럽게 친구처럼(웃음)?”
“허허허.”

 

권위 깬 소탈함, 그 속의 가르침

종정 취임법회 때 문자로 기록된 법어는 문자로만 남았다. 조계종 종정 추대법회 법좌에 오를 성파 스님의 법어는 사전에 공개됐다. 게송 ‘심외무법 만목청산(心外無法 滿目青山)’으로 마음의 중요성을 설하는 법어는 불교용어를 모르는 이에겐 어려웠다. 하지만 준비된 법어 대신 즉설을 택했고, 종정으로서 첫 번째 법어는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다가왔다. 

 

종정 취임법회 때 즉석 법문이 화제입니다. 어려운 공안이나 조사어록을 언급하지 않고 쉬운 일상언어로 법문해서 좋았다는 평이 많습니다. 세간의 평가에 대한 스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조사어록, 공안, 선문염송 등 좋은 말 많이 있지요. 과거의 말이 지금 해당할 수도 있고, 지금 있는 말도 거기에 해당할 수 있는데 꼭 쉬운 말이다, 어려운 말이다 구분할 필요가 없어요. 아무리 쉬운 것도 모르면 어렵고, 아무리 어려운 것도 알면 쉽지. 나주 배도 묵어보고 울산 배도 묵어보고 배인 줄 알면 되지, 맛이 어떻다 당도가 어떻다 따질 것은 없는 거라.” 

 

취임법회 때 준비한 법문 문안이 있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올라가서 옆에 내려놓고 그냥 다 잊어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올라가셨는지요?

“모르겠네, 나도(웃음). 평소에 그래요. 성철 스님 등 역대 큰스님들이 법어가 사회적으로 울림이 컸다며 내보고도 특별하게 울림 있는 말 나오면 좋겠다고 그래요. 자료집 인쇄가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가 안 써줄 수는 없고(웃음). 미리부터 작정한 건 아닌데 현장에 가보니 비는 오제, 사람은 많제, 대통령 내외도 왔제…. 쓴 거 읽고 앉아서는 안 맞겠더라고. 진열장에 있는 음식이 아무리 좋은 게 많아도 내 입하고 거리가 멀어. 당장 입에 들어갈 음식이 필요한데, 요리로 치면 즉석요리라. 그래가 나오는 대로 한 거지(웃음).”

 

삶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아름답다

경험의 축적은 말을 다듬는다. 다담의 행간에 담긴 의미를 성파 스님이 걸어온 길이 짐작게 했다. 당대 선지식인 경봉 스님이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던 시절인연도 성파 스님의 살림살이를 채웠다. 작년 <중앙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30대 초반의 성파 스님은 80대 경봉 스님에게 ‘마음이 무엇인가’를 게송으로 던졌다. ‘아심여명경 조진불염진(我心如明鏡 照塵不染塵)’. “내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아서, 티끌이 비치긴 비치되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경봉 스님은 “입 닫고 가만히 있어라” 답하며 어떤 견처를 인가했단다. 성파 스님은 웃으며 “대단한 깨달음 있었다고 말할 게 못 된다”라고 경계했다.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출가 후엔 은사스님에게 법을 배웠습니다. 누가 되지 않는다면 출가 인연을 듣고 싶습니다.

“출가 동기는 발심입니다.”

 

‘발심’ 단어 하나로 요약하면 독자들이 서운할 것 같습니다.

“서운하지만 뭐 우짜겠노(웃음).”

 

사실 성파 스님이 견뎌온 삶의 궤적은 간단치 않다. 1939년생인 성파 스님은 초등학교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다. 사람이 죽는, 학교가 불타는 전쟁의 참화를 기억한다. 스님은 학교가 아닌 서당에서 『명심보감』 등 사서삼경 한학을 배웠다. ‘명심보감(明心寶鑑)’,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에 마음이 걸렸다. 

1960년 월하 스님을 은사로 파르라니 머리카락 깎고 통도사로 출가했다. 36안거를 났다. 여름에 하안거든, 겨울에 동안거든 선방에 방부 들여 한철을 나면, 1안거다. 1년에 하안거, 동안거를 공부했다면 적어도 18년은 꼬박 일대사 해결에 골몰했다.

 

인간은 누구나 희로애락을 겪으며 지냅니다. 스님도 한국전쟁 등 지금 세대가 겪지 못한 시절을 지나오셨습니다. 그런데도 60년 넘는 수행자 시절 모두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이 나올 수 있는지요. 

“7살 때까지 일본 순사들 칼 차고 다니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그랬어요. 동네에서 군대 영장 받아서 일본 완장 두르고 막 출발하려는 날, ‘해방이야~’ 하는 기라. 그날이 1945년 8월 15일이었어. 한국전쟁 땐 전투를 눈으로 봤지요. 하나는 국군, 하나는 인민군으로 간 형네들 이야기도 듣고. 왜정 말기였지만 나라 없는 꼴 봤고, 동족상잔 비극을 봤어요. 전쟁과 배고픔 다 겪었는데, 지금은 너무 좋은 세상이야. 어려울 게 뭐가 있노(웃음)? 전부 다 좋은 일이고 전부 다 극락이고 전부 다 행복한 일이야.”

 

요즘 그렇게 말씀하시면 ‘꼰대’라고 합니다.

“꼰대? 하든지 말든지 허허. 현실에 불만을 가지면 끝이 없거든요. 나는 불만 쪽은 포기해버리고, 내만 생각해버리는 거라. 몸 있고, 먹을 것 있고, 입는 것 걱정 없는 생활이라면 무엇 때문에 불평하는가? 내는 마 사는 게 극락이라.”

 

‘자비심 또는 보살심이 없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요.

“무엇이 보살심인가요? 남을 해롭게 하지 않은 면 되는 거라.”

 

남에게 자비를 나누는 일은요?

“남에게 자비를 나누는 여유가 되는가?”

 

고통은 함께 나눠야 하지 않을까요?

“고통은 끝이 없는데 어떻게 다 해결하나. 내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삶이 처음도 중간도 끝도 아름다울 방법이 있습니까?

“얼마든지 있지요. 자기 하기 나름이라. 진리는 임자가 없습니다. 차지하는 즐거움은 자기 것이야. 안 해서 그렇지. 남의 것을 뺏는 일도 아니거든요. 열심히 공부하면 그 즐거움에 살지요. 당장 떡 하나 주듯 돌아가진 않지만, 많은 것을 베풀고 나누는 게 나오는 기라.” 

 

바람 불면 일어나는 파도도, 
바다 자체도 나 자신

성파 스님의 살림살이에 은사스님 자리도 있다. 성파 스님은 1998년 봉암사 태고선원 수선안거 이래 상원사 청량선원을 거쳐 2000년 4월, 통도사 서운암에 무위선원을 열고 정진했다. 2002년 2월 당시 영축총림 방장 노천월하 스님에게 ‘인인각지자등화(人人各持自燈火) 기대일월심전로(豈待日月尋前路)’’의 전법게 및 ‘중봉(中峰)’이라는 법호를 함께 받았다. 

 

월하 스님에게 ‘평상심이 도’라는 가르침을 받고 평생 지켜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평상심을 지키려고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요. 평상심 지키면 중노릇, 사람노릇 잘하는 건가요?

“평상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벌써 허물이라.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뭘 해? 안 건드리면 돼요(웃음).”

 

탐진치 삼독심 많이 내지 않았는데 상황에 따라 굉장히 화가 많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괴롭고요. 마음을 평화로운 상태로 유지하는 게 어렵습니다. 

“화가 안 날 순 없는 거라. 나는 게 정상이지요. 물에 바람 불면 물결이 일어나고, 바람이 세면 파도가 일어나고, 바람 없으면 안 일어나지요. 물은 물결을 여의지 아니하고, 물결과 파도 그 자체가 물이지요. 평상심이라 해도 얼마든지 굴곡은 있을 수 있는 거라. 없애야 한다는 것 자체가 평상심이 아니지요. 허허허.”

 

평상심을 잘 유지하려면 어떤 노력이나 수행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평상심은 인연 따라 움직여요. 내나 물이랑 한 가지라니까. 하지만 물은 능히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어요. 물을 떠나서는 배가 존재할 수 없고, 배는 산이 아닌 물에 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이 물이 배를 엎어버릴 수 있지요. 배가 엎어지지 않도록 물을 잘 다스리면 그것이 ‘평상심이 도’라는 거라.”

 

그럼 화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를 내더라도 배가 엎어지지 않을 정도까지 내나요?

“(배가) 안 엎어지도록 본인만이 할 수 있는 거라. 물이 따듯하고 차가운 것은 먹어본 사람만 아는 거지요. 구경한 사람은 몰라요. 해보면 돼(웃음).”

 

 

뱀이 마신 물은 독이 되니

문화와 문화재를 대하는 성파 스님의 애정과 태도는 남다르다. 1981년 3월 통도사 제20대 주지 소임을 맡아 불교계 최초로 성보박물관을 건립했다. 

 

언제부터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절집에 올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어수선하달까? 탱화 등 뭘 도난당하는 일이 드문드문 있었어요. 한국전쟁 땐 많은 사찰이 소실됐고. 문화재는 갑자기 새로 만들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불교문화재를 보존하려면 박물관이 있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지요.”

 

예술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혹 나무도 하고 혹 글씨도 쓰고 혹 좌선도 하는 스님으로서 일상에서 하는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출가수행자의 본분사가 우선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데, 스님이 생각하는 출가수행자 생활과 예술 활동은 무엇인지요?

“다르다고 할 수도 있고 둘이 하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우선 사람이 돼야 하지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도 나오는데,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는 것이지요. 하는 행위는 문제가 아니라요. 항상 수행으로 다듬고 다듬어서 변함없을 때 ‘불구부정 부증불감(不垢不淨 不增不減)’이 되는 거지요. 비교하자면 옥이에요. 백옥은 진흙 속에 갖다 놔도 근본적으로 색이 변하지 않고, 흙을 닦으면 그만이라. 그래서 옥이 되느냐 안 되느냐부터가 수행이라. 정등각에서 대과를 이루면 그 과는 옥처럼 변하지 않고 그러려고 수행하는 거지요. 수행이 안 된 사람이 하면 구정물이 속까지 배이는 거라. 수행이 없는 사람이 다른 짓 하면 다른 짓이지 수행하곤 거리가 먼 거라. 수행자가 할 경우에 예술도 수행이 되는 거라.”

성파 스님은 때론 ‘예술하는 스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옻칠로 한국의 전통 민화를 되살리고, 고려와 조선의 불화를 옻칠로 제작하고, 1991년부터 2012년 4월까지 21년에 걸쳐 16만여 개의 ‘도자대장경(陶瓷大藏經)’을 만들어 장경각에 모셨다. 국가는 2017년 스님에게 옥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출가수행자 일상 속에서 하신 예술이라고 하셨지만, 그 성과가 간단치 않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젊을 때, 불교계 독립사를 정리하려고 손을 댄 적이 있었어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자료에서 낸 독립운동사 책에서 발췌하려고 했지요. 한 권이 300페이지가 넘는데, 불교계는 너무 약소했어요. 노스님들에게 들은 스님들 독립운동 이야기가 많은데 기록이 없어요. 기록이 중요하다고 느꼈지요. 이 시대의 호국불교를 해야하는데 후세에 남길 만한 게 뭐 있겠나 고민하다 대장경을 생각한 거라. 인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일은 불보살 가피로 극복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지요. 이 시대 우리 민족의 큰일이 통일인데, 통일을 발원하며 대장경을 조성했지요. 이 시대 사는 모든 불자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장경각에서 지금 이야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안내 문구도 없었는데요.

“쓰지도 않았어요. 내 맘속으로 그렇게 시작한 거라.”

 

호국불교든 민족문화유산이든 어떻게 보면 스님의 개인 원력으로 하신 거잖아요. 

“전 종도가 했다 해야지. 허허허. 이 시대의 사부대중이 다 한 거야(웃음).”

 

 

성파 스님이 통일을 발원하며 조성한 도자대장경

도자대장경은 나무에 글씨가 양각(陽刻)된 팔만대장경의 글씨 크기와 모양이 똑같다. 도판 한 면에만 글씨가 있어, 팔만대장경(8만 1258장)의 2배인 16만 2500여 장이 됐다. 16만여 장의 무게만 650t에 이른다. 웬만한 원력으로는 엄두도 못 내는 불사인 셈이다. 

 

한 말씀 더 청하겠습니다. 5월 8일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종정 인터뷰하면서 법문을 듣지 않는다면 중요한 부분을 빼놓는 느낌이 듭니다.

“그건 그때 가서 해야 안 되겠나. 허허허.”

 

인터뷰 끝에 성파 스님은 “시원찮아서 제가 미안합니다”라며 먼저 합장했다. “나중에 다시 오고 싶다”라고 인사를 올리자, 성파 스님이 바로 받는다. 
“취재 말고 그냥 와라.” 

 

대담. 지홍 스님, 류지호
정리. 최호승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