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작과 끝, 경주 남산] 문학
용장사에서 남긴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유금오록」
용장사와 매월당 김시습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온 이 구절은 절과 탑이 끝없이 늘어선 신라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의 별처럼 많은 절 중에서도 경주 남산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집으로 알려진 『금오신화(金鰲新話)』와 기행시집 「유금오록(遊金鰲錄)」을 집필한 곳이다.
김시습(1435~1493)은 조선 초기의 유명한 문인이자 생육신이다. 장래를 촉망받던 유학자였지만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출가한 이후 불교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만행을 떠났다. 설잠(雪岑)이 김시습의 법명이다. 전국을 떠돌다가 1465년 31세에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 용장사에 칩거했다. 이때 김시습은 매월당(梅月堂)이란 호를 사용했다.
7년 뒤 상경하기까지 용장사에서 머물며 집필한 『금오신화』와 「유금오록」은 한국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서는 『금오신화』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유금오록」을 알아본다.
경주 기행시집 「유금오록」
茸長山洞窈(용장산동요) 용장골 골 깊으니
不見有人來(불견유인래) 오는 사람 보지 못해라
細雨移溪竹(세우이계죽) 가랑비에 시냇가의 대나무가 자라고
斜風護野梅(사풍호야매) 비껴가는 바람은 들 매화를 보호하누나
小窓眼共鹿(소창면공록) 작은 창에서 사슴과 함께 자고
枯椅坐同灰(고의좌동회) 마른 의자에 앉으니 재와 같은데
不覺茅簷畔(불각모첨반) 깨닫지 못하겠도다, 초가집 처마 아래서
庭花落又開(정화락우개) 뜰 꽃이 떨어지고 또 피어나는데
_ 김시습 <거용장사경실유회(居茸長寺經室有懷)>
김시습은 관서, 관동, 호남, 영남 등 전국을 유람하면서 시문집인 『사유록(四遊錄)』(「유관동록」·「유관서록」·「유호남록」·「유금오록」)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유금오록(遊金鰲錄)」은 김시습이 용장사에 머물며 경주 일대의 불교문화유산을 답사한 뒤 감회를 문학적으로 남긴 기행시집이다.
김시습이 신라의 불교문화유산을 답사한 기행시는 <용장사>, <선방사>, <흥륜사>, <황룡사>, <영묘사>, <백률사>, <무쟁비>, <분황사 석탑>, <봉덕사의 종>, <불국사>, <천왕사지>, <천룡사> 등이다. 선방사, 영묘사, 천주사, 봉덕사 등은 이미 폐사된 지 오래돼 폐허로 방치되거나 인가로 변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이를 보며 세월의 무상함과 천년고도 신라의 흥망성쇠를 회고했다.
寺廢沒沙礫(사폐몰사력) 절 자갈에 묻혀 폐허가 되었고
此物委榛荒(차물위진황) 이 종도 초목 속에 버려졌구나
恰以周石鼓(흡사주석고) 주나라의 석고와 흡사하여
兒撞牛礪角(아당우려각) 아이들이 두들기고 소는 뿔을 비벼대네
_ 김시습 <봉덕사종(奉德寺鐘)>
참고문헌
강석근 「매월당 김시습과 경주 - ‘유금오록’을 중심으로」, 『온지논총』 제23호, 온지학회, 2009
김재웅 「김시습의 경주기행과 문학창작의 현장」, 『시학과 언어학』 제21호, 시학과언어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