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작과 끝, 경주 남산] 골골[谷谷]마다 바위 기도처
신라인의 기도와 염원 남산 바위를 수놓다
서울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목멱산)이라 부르듯이 경주에도 남산이 있다. 경주 남산은 경주 시내에서 가장 가깝고 웅장한 바위산이다. 본래 이름은 금오산(金鰲山)이라 부른다. 금빛 거북이가 엎드린 형국의 산이라는 뜻으로 거북이나 자라 이름이 들어간 산은 예로부터 신성한 기도처로서
받아들여졌다. 김해 구지봉이 그러하고, 국사봉도 구수봉(龜首峰)이 음운변화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경주 남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다. 길이가 8km, 동서의 너비 4km이며 북쪽에는 금오봉(468m), 남쪽에는 고위봉(494m)이 높이 솟았다. 남산 자락에는 신라의 흥망성쇠를 상징하는 유적들이 함께 남아있다.
신라, 남산에서 출발하다
신라 이전 경주 일대에는 6개의 씨족 집단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를 보통 6부촌(六部村)이라 불렀다. 6개의 씨족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 수장(首長)들은 기원전 69년 3월 1일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임금을 추대한 뒤 나라를 세울 것을 결정하고 높은 곳에 함께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자리에는 붉은색의 큰 알만 남아있었는데 알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닐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고 하여 혁거세(赫居世)라 이름 짓고 알이 박과 같이 생겼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했다.
아이가 열세 살 되던 해 6부촌장이 다시 모여 여섯 촌을 합해 나라를 세우고 그 아이를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 기원전 57년의 일이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했으나 세간에서는 사로(斯盧)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곧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르며 세운 나라가 사로국이며, 부족 연맹체 국가였던 진한(辰韓)의 맹주국(우두머리 국가)이었다. 진한은 12개 소국이 소속돼 있었는데 사로국은 차츰 세력을 확장해 신라로 성장하게 된다.
박혁거세가 처음 거주하던 궁궐은 남산의 서쪽 창림사터에 있었다. 나정에서 약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3대 유리왕 때에는 6부촌에 각각 성씨를 내려줬으니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 최, 손, 정, 배, 설 씨가 탄생하게 된다. 원효대사가 바로 설 씨의 후손이며 최치원이 경주 최씨의 후손이다.
남산의 바위신앙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은 선사시대부터 무언가 종교 행위를 하고 기도하고 빈다는 사실이다.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는 수렵, 채취 문화에서 농경과 목축의 정착 문화가 자리 잡자 비를 빌어야 했고 자손을 빌어야 했고 질병 퇴치를 빌어야 했다.
하늘 가까운 곳에 가서 빌기에는 흙산보다 바위산이 좋았고, 경주 남산은 인근에 인구도 많아 자연스럽게 고대인들의 기도처가 됐다. 선사시대부터 남산은 종교적 행위를 했던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물론 그 흔적은 바위에 남겨져 있다.
한반도에서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물은 청동기시대 고인돌이다. 경주 지역에도 학계에서 조사한 고인돌이 200여 기 남아있다.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건천, 강동, 안강, 산내, 내남면 등에 골고루 분포돼 있으나 뛰어난 신라시대 유물이 워낙 많다 보니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실정이다. 남산의 오산계에도 고인돌이 몇 기 있다. 예전에는 20~30여 기가 있었으나 길을 만들고 밭을 일구며 사라져 버렸다.
청동기시대 암각화도 물론 남아있다. 경주 시내 서천(西川) 물가 수직 암벽에 사람 얼굴, 발자국, 동물을 새겨 놓은 석장동 암각화다. 선사시대 암각화가 대개 생명을 상징하는 물가에 있듯이 석장동 암각화도 역시 그렇다. 경주에 가까운 울주 천전리 각석(刻石)이나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도 다 물가에 있다. 암각화는 농사의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행위의 흔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인구도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선사시대 기도행위의 유적으로는 알터도 있다. 학문적 용어로는 ‘성혈(性穴)’, 영어로는 ‘Cup mark’라고 부르며 요즈음에는 ‘바위구멍’이라고도 부르지만 알터라는 말을 오래전부터 써왔다. 알은 곧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도와 관련된 용어로도 적당하다.
알터는 선사시대 암각화에도 같이 나타나지만, 개인적 기도용으로도 많이 쓰인 것으로 추정한다. 경주 선도산은 선도성모 여산신의 기록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을 만큼 유서 깊은 산인데 이 인근에 500여 개의 구멍이 파인 알터바위가 있다. 서악동 바위구멍 유적이라고 한다. 경주 남산에도 이러한 알터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남산의 알터를 찾기 위해 1995년 경주에 내려가 우선 양지마을의 고(故) 윤경렬 선생님 댁을 들렀다. ‘마지막 신라인’이라는 별명처럼 경주 일대는 물론 남산에 대해서도 모르는 곳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남산에 알터가 어디 많으냐”고 여쭸더니 “양조암골 줄바위로 가 보라”고 즉답했다. 1985년 윤경렬 선생님을 처음 뵙고 남산을 다니기 시작했고, 필자의 스승이신 조자용 박사님과도 친분이 두터웠기에 자세히 답변해 준 것이다.
양조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양조암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짜기를 더듬어 올라가니 능선 부근 줄바위 바위마다 알터가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남근석을 닮은 바위에 알터가 새겨진 기이한 형상도 발견했다. 근래에는 용장3리 틈수골 마을 근처에 알터 바위가 3기 있는 것이 알려졌으며 용장골에도 2기가 있다.
그러나 알터로 가장 압권인 곳은 게눈바위다. 경주 시내에서 보면 게의 눈처럼 튀어나온 바위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게눈바위가 있는 영마루를 해목령(蟹目嶺)이라고 하는데, 게눈바위가 있는 고갯마루라는 뜻이다. 우뚝 솟은 게눈바위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알터를 머리가 큰 뱀이 감싸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예전에는 아이를 얻기 위해서 빌던 기자대(祈子臺)라고도 불렀으니 오래전부터 기도신단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게눈바위 근처에서 근래에 발견된 윷판바위가 있다. 장창곡 윷판암각화라고 부른다. 윷놀이할 때의 말판인 원형의 윷판을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윷판은 가운데 있는 점이 북극성을 상징하고 그 주위를 북두칠성 7개의 점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4번 도는 형태로 구성돼 있다. 모두 29개의 점으로 짜여있다.
이 윷판바위는 안동 수곡리 신선바위 암각화처럼 선사시대부터 등장해 전국 곳곳에 그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정월달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하는 윷놀이도 칠성신앙에서 유래했다.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새해가 됐으니 칠성님에게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풍속이 윷놀이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윷판바위는 산중 바위신단 기도처에 많이 남아있다. 영동 영국사 망탑봉에도 있고 익산 신룡리 구룡마을 뜬바위에도 있다. 임실 가덕리 상가마을 윷판바위에는 무려 39점의 윷판이 너른 암반에 새겨져 있다.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의 윷판 암각화』에는 전국 85개소의 윷판바위가 소개돼 있다. 그러한 윷판바위가 게눈바위 인근에서 알터들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이는 게눈바위가 오랫동안 기도처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뿌리 깊은 민간신앙
선사시대부터 인근 사람들의 기도처였던 남산에는 그 기도의 흔적이 남산의 바위에 그대로 남겨졌고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불교의 기도와 신행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중생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바위 속에 머물러 있던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내게 됐으며 석탑이 솟아올라 남산 곳곳을 장엄했다. 지금 드러난 불교문화재만 하더라도 절터 140여 개소, 석불 110여 체, 석탑 90여 기가 온 산에 흩어져 있다. 완벽한 노천박물관이었기에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자연스럽게 등재됐다.
신라시대 서라벌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기도 공간이었던 남산은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서울이 개성으로 옮겨간 탓에 옛날의 영화는 누리지 못했지만 명맥은 유지됐다. 고려도 신라처럼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기 때문이다. 정작 남신이 정적 속에 누워있게 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와서였다.
조선 초기만 해도 김시습이 출가해 남산 용장사에 머물며 『금오신화』를 썼듯이 아직 불교가 숨쉬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유교가 사회 저변으로 정착되고 민간 풍속에서 불교가 밀려나면서 남산의 불교 유산도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과격한 유생들은 불상의 머리를 자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실제로 많은 불상이 피해를 당했다. 1965년 분황사 우물에서는 불두가 잘린 좌불상이 13구나 나왔다. 유생들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남산의 석불들도 불두가 잘린 것이 허다하다. 그렇다고 백성들 기도처로서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중생들의 삶은 무엇인가를 위해 빌어야 하고 기도해야 한다. 유교에서는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이다.
남산의 그런 유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 큰지바위다. 지바위골에는 작은지바위, 큰지바위가 있는데 큰지바위는 너비 140m, 높이 약 50m의 거대한 바위다. 땅에서 솟아올라 지바위라 하고 한문으로 지암(地岩)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민간신앙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마치 여성의 자궁과 같이 바위 사이 깊은 안쪽에는 다른 데서 보지 못한 여성형 석상이 하나 있다. 가슴에는 5개의 별, 태극 문양, 28개의 작은 바위구멍이 아래위에 새겨져 있다. 도대체 어느 신을 상징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조자용 박사님은 삼신할머니라고 추정하고 아이를 빌던 곳이라고 말했다.
이 석상 외에도 큰지바위 아래쪽에는 민불(民佛)이 두 분 새겨져 있다. 사찰에서 법식에 맞게 조성한 불상이 아니라 민간에서 개인 치성을 위해 만들어진 민불은 어딘가 어설프고 서툴다. 그래도 구수한 정감은 남아있다. 그만큼 큰지바위는 오랫동안 기도처로서 받들어져 온 것이다. 어렵사리 큰지바위 상단으로 올라가면 게눈바위와 같은 커다란 알터가 2개 나란히 파여 있다. 큰지바위가 예부터 기도처로 쓰여왔다는 증거물이다. 이렇게 큰 알터는 속리산 문장대를 비롯해 남해 금산 상사암, 영암 월출산 구정봉, 장흥 천관산 구룡봉, 북한산 비봉 등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만큼 고대부터 제의를 행했다는 흔적이다.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민간의 기도신단 바위도 있다. 상사바위 서남쪽 ‘ㄱ’ 자로 꺾여 이뤄진 암벽에 있는 산신당(産神堂) 석각이다. 명문 아래에는 몇 줄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함풍 6년(1856) 병진년 4월에 기도하여 다음 해인 정사년(1857) 5월 10일 사시(9~10시)에 김응현을 낳았다. (김응현의) 아들은 홍구, 홍태, 홍대…… 이며 손자는 주○, 주○이다. 갑자년(1924) 4월 9일 새기다’라고 되어있다. 자손을 빌기 위한 기도신단으로서의 이 산신당은 얼마나 오래됐을까? 아무도 정확히는 모른다.
경주 남산은 선사시대부터 오랫동안 기도의 성지로서 받들어져 왔다. 고인돌, 알터, 윷판바위가 있고 숱한 불교문화재가 흩어져 있다. 이름 모를 석상과 민불, 산신당도 있다. 불교가 들어오든, 유교가 들어오든 기도의 간절함이 끊어져 본 적이 없다. 그러한 기도와 염원의 흔적이 온 산을 별처럼 수 놓고 있다. 경주 남산은 바로 그런 산이다.
사진. 유동영, 정승채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