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작과 끝, 경주 남산] 남산 순례 가이드

신라인의 마음 찾아 떠나는 경주 남산 순례길 셋

2022-04-28     손수협
남산 서쪽에 세 개의 릉이 있다고 해서 삼릉이라 한다. 신라의 박(朴)씨 왕릉으로 전한다.

5월의 남산은 연꽃으로 피어난다. 봄을 보듬은 자비의 미소에 돈독해지는 신심처럼 산색도 조금씩 짙어간다. 바위는 부처 부처는 바위라, 탑과 절은 별이 되고 새가 되니 경주의 봄은 남산에서 시작된다. 이번 안내 길에는 재단하고 분석하는 일은 접어둔다. 역사책 속의 낱말도 뒤에 둔다. 고독하고 여유롭고 설레는 한 순례자가 된다. 또 가피라든가 지혜라든가 하는 언어들도 잠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머리나 가슴보다 몸이 먼저다. 호흡과 심장의 박동이 산과 함께한다. 바위와 체온을 교환한다. 지금 여기 불보살님이 바위에서 걸어 나오신다. 탑이 솟아오른다.

 

남산 드는 길 하나,
삼릉에서 용장까지
(삼릉~금오봉~용장골 4.6km 약 4~5시간 소요)

“남산은 어머니 같다. 여느 산들은 산에 드는 길이 몇 곳에 불과하지만 남산은 어느 골짜기로 가도 편안하고 푸근하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남산은 동서남북 예순여 넘는 골과 능선 어디로든 들 수 있다. 그중에 처음은 삼릉에서 시작해 냉골을 올라 468m 금오산 정상을 넘어 용장사를 거쳐 용장마을까지 순례다.

울진 봉화에 금강송 군락이 있다면, 한라산 영실코스에 육송군락이 있다면, 남산에는 삼릉 솔숲이 있다. 울산 언양에서 경주 시내로 들어오는 길. 솔향기 가득 머금은 솔숲 터널이 일주문처럼 방문자를 반겨 맞는다. 춤사위인 듯 경애왕릉과 삼릉을 도래솔로 감싸며 수천 년을 나고 쓰러지고 나고. 포석정에서의 음주가무에 대한 오해 속에서도 저무는 신라와 백성을 위해 엄동의 추위 속에서도 몇 날 밤낮을 남산신께 기도하던 경애왕도 솔숲의 호위와 위로에 영면하고 있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던 때에도 이 숲을 지켜준 주민들의 고마움은 빼놓을 수 없다.

사진 1. 삼릉골(냉곡) 석조여래좌상. 높이 1.6m에 무릎 너비가 1.56m다. 왼쪽 어깨의 가사끈과 승기지(내의)끈 매듭이 인상적인 머리 없는 석불이다. 

5월의 솔바람 소리를 도반으로 능을 지나 천 년의 시간인 듯 천천히 오른다. 바람과 새소리, 숨소리가 나지막이 염불처럼 들려온다. 탑이며 불상 조각들이 놓인 곁을 지나면 곧 첫 번째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사진 1)을 만난다. 50여 년 전쯤 계곡에 어깨만 살짝 드러난 채 묻혀 있던 불상을 지금 자리에 올렸다는 사실보다, 원래 이 자리에 계셨으리란 짐작에 더 마음을 둔다. 자연 바위 위, 툭툭 깨뜨려 연잎 없는 연화대좌 그 위에 결가부좌한 원만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부처님은 그대로 남산과 하나다. 시간과 역사, 인연 속 숱한 사연에 상호는 대하지 못하나 적정에 드신 상호는 쉬이 마음에 새겨진다. 왼편 바로 위로 사람의 크기와 같게 만든 등신상인 듯한 마애관음보살님(사진 2)이 바위에서 나투시는 중이다. 아직 무릎 아래는 바위 안에 있고 둥그런 바위 자체는 광배로 삼고 뒤쪽 옷깃이 내려 날리는 듯한 바위는 지금 막 하늘에서 남산에 도착한 여운 그대로 순례자를 맞는다. 입술은 붉어 체온이 돌고 그윽한 시선은 우리가 온 길을 굽어본다.

사진 2.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관세음보살입상이 미소를 머금은 채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있다. 

관음보살과 석조여래의 후광을 뒤에 두고 그림인 듯 조각인 듯 여섯 불보살이 조성된 선각육존불(사진 3) 앞에 선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님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바위 속 부처님을 찾아냈다”라는 시인의 표현이 꼭 맞는 곳이다. 신라의 석공은 수 날을 이 바위와 마주했으리라. 어느 날 사바세계와 극락세계가 이 자리, 여섯 분의 불보살이 실루엣처럼 나타났을 것이고 이내 힘찬 정질로 순식간에 그 모습을 그리듯 새겨두었다. 여섯 분이 머무실 만치 거대한 바위를 오르다 문득 돌아보면 삼릉 솔숲이 물결치고 형산강 상류 기린천 너머로 남산과 짝인 망산이 주변 산들의 유혹에 아랑곳없이 남산과 순례자를 향해 가르마 탄 고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사진 3.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병풍처럼 펼쳐진 넓은 바위면에 선으로 새겨졌다. 왼쪽 면에는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상과 꽃을 바치는 협시보살상을 새겼다.

다시 몸을 돌려 바위길을 오르노라면 호흡이 다소 가빠질 즈음 정면 암벽이 걸음을 멈춰 세운다. 높고 고른 면의 갈라진 틈 아래를 자연스레 연화대로 삼고 두툼히 다문 입술과 풍만하나 골이 난듯한 상호의 여래. 여느 불상과는 다른 모습. 참으로 친근하여 절로 미소와 합장이 따라온다. 행여 원효대사님 모습이 이러셨을까. 근엄하나 자애롭고 소박하나 장엄하다. 간단한 선과 약간의 양감을 준 얼굴로 당당함과 여유를 순례자와 나눈다. 그 우측에는 부부바위가 협시보살을 대신하고 있다. 신라 귀족불교 속 민중불교의 산실이 남산이라고 하더니 삼릉골 선각마애여래좌상(사진 4) 한 체의 불상으로도 그 말을 대변하기에 넉넉하다. 원효대사의 무애춤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긴다.

사진 4. 선각마애여래좌상. 높이와 너비 각각 10m쯤 되는 바위절벽에 새겨진 연꽃 위에 앉아 설법인을 하고 있는 마애불. 몸체는 모두 선각으로 새겼고 얼굴만 돋을새김으로 조각했다.  

이내 무참한 파괴를 당했던 불상이 지금은 보수와 복원을 거쳐 본래의 표정을 잃었음에도 단정하고 굳센 금강좌에 결가부좌를 튼 석조여래좌상(사진 5)이 순례자의 마음을 아프게도 단단하게도 만든다. 금오봉 정상에 닿은 부처님은 상선암 줄기를 용의 등에 탄 듯 내려오다가 지금의 자리에서 솟아올랐다. 아니 여전히 솟아나고 있는 것이 연화대 아래는 꽃잎을 생략하고 팔각의 모만 주어 산과 하나 되고 먼저 솟은 상대석 앙련은 한껏 피어 부처님을 받치며, 타오르는 화염문과 넝쿨무늬광배는 전성기 신라인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피고 있다.

사진 5.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연화대 아래는 꽃잎을 생략하고 팔각으로 거칠게 깎았고, 상대석 앙련은 한껏 피어 부처님을 받치고 있다. 타오르는 화염문과 넝쿨무늬광배는 전성기 신라인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피고 있다. 깨진 불상의 상호와 광배를 2008년 복원했다. 
사진 6.  선각마애불. 석조여래좌상의 뒤쪽 바위 절벽 면에 얼굴 부분만 선각으로 새겨졌다.

작은 개울을 건너 상선암으로 오르는 길 높고 아득한 느낌의 절벽 면에 어깨까지만 슬쩍 나타난 부처님, 선각마애불(사진 6)이 순례자를 보며 빙긋이 웃는다. 남산 부처님은 아무리 크고 높아도 군림하거나 경배를 강요하지 않는다. 굽어 내려 보지도 않는다. 같은 눈높이시다. 6m 높이의 마애석가여래좌상(사진 7) 앞에 서면 안다. 부조와 선각의 절묘한 조화는 미묘법문의 형상화이리라.

사진 7.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상선암에서 150여m 올라가서 상사바위 위치에서 내려다 보이는 높이 6m의 여래좌상.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다.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적으로 돋보이게 한 반면 몸체는 아주 얕게 선각했다.

대불 위 바둑바위에 서면 경주벌 푸른 모들의 은은한 물결. 선도산 벽도산과의 대면. 이곳 신선과 예인과 부처님이 어울려 신선은 바둑을 두고 예인들은 거문고를 탄다. 월명리 월명 스님의 피리 소리가 울려온다. 부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시원히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들어볼 일이다. 다시 금오산 정상 가는 길. 산신당(産神堂) 글자가 새겨진 상사바위엔 아이를 바라는 이에게는 한없는 원력불일 머리 없는 작은 불상이 바위에 기대어 서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과 관련이 있다는 이름의 금오산(金鰲山, 금자라산) 정상을 넘어 용장골로 들어서는 입구 삼화령 연화대좌가 있다. 세 꽃송이는 무엇인가? 세 화랑들 또는 고위봉과 연결된 고위산맥, 금오산맥, 용장산맥의 중심지일까. 아니면 석굴암 불국사가 있는 동쪽 토함산, 건너편 남쪽의 고위산, 서쪽의 단석산을 품는 자리일까. 아무튼 충담 스님은 해마다 이 연화대에 우뚝 서 계셨던 부처님께 차를 공양했고 안민을 노래하고 기파랑을 찬양했다. 지금도 삼짇날이면 이 연화대를 찾아 차인들이 차공양을 올린다. 충담 스님과 연화대 위 허공계와 중생계에 여전히 계시는 미륵부처님을 친견하고 용장사지로 향한다. 

남산 골골, 천여 년의 기간 동안을 적절한 곳에 알맞은 크기, 적당한 높이, 딱 그 자리에 맞는 모습으로 불보살을 모신 석공들. 바위처럼 굳은 손바닥과 연꽃처럼 피어나는 환희심으로 선인들이 모신 불보살님께 지극정성의 기도를 올린 뒤 정과 망치를 들었으리라. 한없는 하심으로 저만 돋보이지 않도록, 산과 그 전의 모든 상과 하나이도록 쪼아 세운 부처님과 탑들. 시대를 방황하던 김시습은 그런 남산, 그 중에 용장사에 들었다. 7년을 머물며 차밭을 가꾸고 경전을 읊고 해석하고 시와 소설을 썼다. 소설은 『금오신화』다. 이곳 금오산 용장사가 집필지다. 

폐탑재로 보이는 돌무더기를 지나 내려가면 5m가 안 되는 높이로 300m가 넘는 용장사곡 3층석탑을 세웠다. 자연 바위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산 전체가 탑의 기단이 되니 용장골 오르내리는 내내 수미산정에 세워진 이 탑을 볼 수 있다. 이 주변에는 탑을 만들 크고 좋은 석재들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비우고 또 버렸다. 기득권을 버린 싯다르타 태자의 마음일까. 절제와 비움이 산 전체를 탑으로 세웠다. 거대함과 화려함이 훌륭함이 되고 위대함이 된 요즘의 인심을 돌아본다.

탑 아래 삼층의 탑처럼 바퀴 같은 3단의 연화대 위 머리 없는 삼륜대좌불(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에 시선이 팔리지만 한쪽에 천연히도 막 바위에서 나오시며 순례자를 맞는 세 겹의 광배를 한 등신상의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구석 자리이나 딱 그 자리다. 금칠이 없어도 황금보다 빛난다. 얕은 새김이어도 풍만하다. 굳게 다문 듯 엷은 미소인 듯 온화하고 평화롭다. 보리수 아래 석가모니부처님이시듯, 3층석탑 아래 용장사지 마애석가여래(마애여래좌상)이시다.

석가여래는 바위에서 나오시고 미륵부처님은 땅에서 둥글게 솟아오르신다. 신라 대현 스님께서 미륵부처님을 염하며 돌면 부처님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삼륜의 대좌는 지금도 여전히 돌고 있다. 자연석 바위 위에 갈수록 조각을 조금씩 더 해 맨 위 대좌에는 연꽃을 피웠고 그 위에 다시 연꽃 방석을 마련하여 부처님을 모셨다. 역시 산 전체가 기단이 되니 용장사는 남산이다. “남산에 가보지 않고는 경주를 봤다고 하지 말 것이며 용장사에 와보지 않고는 남산을 보았다 말라”는 말이 수긍이 된다.

하산길에 이름과도 계곡과도 어울리지 않는 설잠교(설잠雪岑은 김시습의 법명)까지 내려오는 내내 용장사탑을 올려보며 하늘과 이어진 남산을 본다. 맑은 용장계곡물을 따라 마을로 내려오는 길, 그 옛날 용장골을 올라 열반골로 들어가기 전 먹물옷으로 갈아입었다던 소녀가 잠시 머문 갱의암(옷을 갈아입은 바위)을 뒤로하고 머리가 없는 석조약사여래좌상 한 체와 탑 지붕돌 조각이 있는 절골을 거쳐 용장마을 시내버스를 타며 순례 첫 번째 길의 꿈에서 깨어난다.

 

남산 드는 길 둘,
동남산 서출지에서 신선암까지
(서출지~염불사지~칠불암 편도 2.9km 편도 약 2시간 소요)

연꽃과 배롱나무, 팽나무, 은행나무에 300년을 훌쩍 넘은 이요당(二樂堂) 정자와 동네 돌담과 기와지붕과 남산부석과 또 다른 상사바위가 연못에 함께 담기는 서출지. 임금을 구한 편지가 나왔기에 서출지라 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스님과 궁주(宮主)가  죽었다는 이야기, 승려가 죽은 5세기 말까지는 아직 불교가 토착종교 세력에 열세였음을 은유한다는 이야기…. 남산만이 역사의 진실을 알리라. 

남산을 좋아하고 연못을 좋아해 인자(仁者)이면서 지자(知者)를 추구하던 선인의 마음을 닮은 평화스러운 마을길을 천천히 걸어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을 만난다. 신라 때 염불소리가 하도 맑고 깊어 서라벌 사람 모두가 어디서든 들었다 하여 염불 스님이라 불렀고 절 이름도 염불사. 곁에 양피사가 있었다 하는데 이 탑 앞 양피못의 풍광은 서출지와 견준다. 한참이나 멀리 오랫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탑 2기(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가 다시 제 모습 제자리를 찾았는데 복원하면서 스리랑카에서 모셔 온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그 사연을 알고 한결 더 경건히 합장배례하고 산으로 든다.

고요와 적정의 길. 아름드리 소나무가 시원스레 뻗어 한낮에도 볕보다는 그늘이요, 청향(淸香)한 솔향에 걸음마다 솔잎카펫. 한 시간이나 올랐을까.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사방불에 삼존불. 암자 이름은 여기에서 붙여진 이름임을 쉬이 짐작한다. 마애상임에도 마치 환조상(丸彫像, 재료의 사방을 모두 조각한 상)을 보는 듯하니, 남산 고위산 높은 곳에 이 단단한 화강암을 오로지 정과 망치로 쪼은 시간과 정성과 발심의 깊이는 어찌 가늠할까. 오르느라 잠시 피로하던 근육이 외려 죄송하고, 남산 최고의 걸작이란 품평은 그야말로 ‘품평(品評)’인지라 가치에 두지 않는다. 그저 감탄하고 예배드릴 뿐이다. 참배의 땀으로 신라 장인과 남산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적셔지려나.

다시 하늘계단인 듯 바위 길을 오르면 아! 신선암 마애보살님(마애보살반가상)(사진 8). 문무대왕릉에서 오르는 일출이 석굴암 부처님을 참배하고 토함산을 넘으면 신선암에는 니르바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꼭 일출 때가 아니라도 그렇다. 우아하다. 자유롭다. 노닌다. 그리고 쉰다. 순례자도 우아한 얼굴에 자유롭게 몸짓하며 도솔천을 함께 노닐다 멈추고 내려놓고 쉬어도 좋으리.

사진 8.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칠불암 마애불상군 위쪽, 솟은 바위에 새겨진 보살상. 오른쪽 발을 세워 유희좌(遊戲座)를 한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꽃을 들고 바로 앞 절벽 밑의 속세를 내려다보고 있다.

 

남산 걷는 길 셋,
감실불상에서 서출지까지

“경주는, 남산은 나에게 든든한 보험, 뒷배였다”는 고 윤경렬 선생님의 말씀에 조금 더 얹자면 부처골 감실불상(불곡 마애여래좌상)과 탑곡 마애불상군, 보리사 미륵석조여래좌상은 남산의 뒷배다. 남산에서 가장 일찍 모습을 보이신 감실불상과, 한 바위에 불보살, 탑, 천녀, 수행자 등 서른 체가 넘는 상이 있는 마애불상군과 석굴암 본존부처님과 호형호제할만한 보리사 부처님. 이 길은 이런 불적에 더해 봄마다 참꽃이 지천으로 피어 꽃대궐 길이며 흰진달래도 있어 놀람과 재미가 더하다. 감실부처님(사진 9) 계신 길은 언제나 정갈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골짜기 입구에서 감실부처님까지 가는 길을 쓸고 있는 분이 있다. 순례자의 마음도 저절로 길에서부터 맑아진다. 잠시 오르다 대숲을 지나면 감실 안에 곱게 앉으신 부처님을 만난다. ‘할머니부처’라고 부르고 있는데 동의할 수 없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이다. 며칠 전 봄날 진달래를 따던 수줍은 누나의 모습, 무언가 장난을 한 후 점잖을 가장한 채 앉은 개구쟁이 동생의 모습, 혹은 유복의 기득권을 훌 벗어던지고 토굴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막 시작한 푸른 수행자가 아니신가. 

사진 9.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 동쪽 부처 골짜기(佛佛)에 있는 너비 4.5m, 높이 3.2m의 바위에 깊이 1m의 
석굴을 파고 만든 불상이다.  

가을에 더욱 아름답지만 잎이 피고 짙어가는 봄도 못지않게 싱그러운 갯마을 옥룡암. 잎 작은 애기단풍에 작은 개울물, 자유롭게 헤엄치는 버들치를 따라 오르면 안양교를 살짝 건너고 가을 소리를 듣는 집인 추성각(秋聲閣)이 있는 암자. 안양교와는 다소 엉뚱한 대웅전이 금당으로 있고 그 뒤편 솔숲에 우뚝한 바위 탑곡 마애불상군(사진 10). 네 폭의 그림조각. 네 면에는 9층과 7층의 마애탑, 한쪽 무릎을 꿇고 차인지 향인지를 공양 올리는 스님과 하늘에서 즐거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천녀들, 나무 아래서 선정에 든 수행자, 단란한 가족같은 삼존상에 의상대사를 떠올릴 만치 단정하고 환한 스님, 얼굴은 많이 깨어졌으나 풍만하고 당당히 서 계신 여래입상, 나머지 좁은 한쪽 면에도 부처님과 천녀를 그려 바위 전체가 부처님세계 만다라다.

사진 10. 탑곡 마애불상군(보물). 옥룡암 뒤 높이 10m, 둘레 40여m의 바위에 사방으로 부처님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북면에는 9층과 7층 마애탑이 새겨져 있고 그 가운데 설법하는 부처님이 있다. 

탑곡불상군과는 대조되는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사진 11). 보리사 부처님은 연화대 하나로도 온 남산을 보듬을 듯하고 단 한 체의 불상으로 서라벌을 품은 듯하다. 토함산에 석굴암본존불이 계시다면 남산에는 바로 보리사여래가 계신다. 은근한 미소에 그윽한 시선은 선덕여왕이 계신 낭산 도리천과 남촌들판 그 너머 보문단지와 무장산까지 닿아 서라벌은 모두 보리사가 되고 남산이 된다.

사진 11.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남산의 석불 중 대좌와 광배를 온전히 갖춘 입체불로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다. 광배 뒷면에는 약사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남산 일대 가장 큰 절인 보리사에 모셔져 있다.

보리사에서 화랑교육원을 이어주는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의 갖가지 수목도 지금은 멋스러운 산책길이 되어 사색과 사랑과 추억을 준다. 화랑교육원을 지나 다시 솔숲 산책길로 접어들면 형제간인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이 나온다. 기울어가는 신라임에도 숯으로 밥을 하고 사철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자위 뒤에 내쉰 한숨과는 달리, 능으로 가는 길은 소담스럽고 수수하니 권력인들 부귀영화인들 흥망인들 오늘 이 길만은 못하다. 

솔숲을 나서면 통일전 광장이 나오고 통일전 안 연못 절반은 하늘을 담고 나머지 절반에는 수련을 피워 순례자의 환희심을 대신해준다. 

 

사진. 유동영

 

손수협
경주 원주민으로 1982년부터 불교학생회와의 인연으로 남산을 다니기 시작, 천 번 넘게 남산을 순례하고 있다. 남산이 좋아 남산을 바라보는 동네에서 살면서 시를 쓰고 서각과 전각을 한다. 박물관대학에서 답사지도교수로, 대한민국 명궁으로서 시민들에게 우리활쏘기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