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정사情死, '사의 찬미' 윤심덕
비극적 사랑과 죽음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경,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던 관부연락선이 대마도 앞바다를 항해하던 중 남녀 한 쌍이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보고를 받은 선장은 즉시 운행을 중단하고 객실과 바다를 수색했으나, 실종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승객명부를 조사해보니, 남자는 ‘조선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金水山·30)’, 여자는 ‘경성 서대문정 일정목 73번지 윤수선(尹水仙·31)’이었다. 남녀가 탔던 일등석에는 여자의 지갑 안 현금 140원과 장신구,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남아 있었다.
승객명부에 적힌 ‘김수산’과 ‘윤수선’은 극작가이자 연극이론가인 김우진, 최초 여성 성악가이자 연극배우인 윤심덕이었다. 수산은 김우진의 호였고, 수선은 김우진이 지어준 윤심덕의 호로 수산의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윤심덕이 일본 오사카에서 <사의 찬미>를 녹음한 뒤 귀국하던 길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유부남이었던 김우진과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이자 대중가수였던 윤심덕의 투신자살은 ‘불륜’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당시 신문들은 <미성(美聲)의 주인 윤심덕 양 청년문사와 투신 정사>(「조선일보」 1926년 8월 5일자), <현해탄격낭중(玄海灘激浪中)에 청년 남녀의 정사(情死)>(「동아일보」 1926년 8월 5일자)라며 연일 대서특필했다.
윤심덕(尹心悳, 1897~1926)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이자, 최초의 여성 관비 유학생, 최초의 대중가수였다. 특히 자살 직전 녹음한 <사의 찬미>는 최다 레코드 판매를 기록하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평양에서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윤심덕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서양음악을 일찍 접하며 노래에 재능을 보였다. 이후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된 윤심덕은 1915년 일본 도쿄음악학교 사범학과에 재학했다. 김우진과는 1921년 유학생으로 이뤄진 동우회 연극단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한국 남자 유학생에는 홍난파, 채동선 등도 있었다.
김우진은 목포 부호의 아들로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조혼으로 이미 처자식이 있었지만 윤심덕과 조선순회공연을 다니며 가까워졌다. 어려서부터 ‘왈녀’로 불릴 만큼 쾌활하고 대범한 성격이었던 윤심덕에 비해 김우진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예술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논하며 관계가 깊어졌다.
1925년 귀국한 윤심덕은 순회공연에 출연하며 성악가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학교 음악 선생, 대중가수, 극단 토월회 연극배우로도 활동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 시기 김우진은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귀국해 극작가와 연극이론가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의 가업을 잇길 원하는 부친의 반대로 갈등을 겪고, 도쿄로 도망치듯 건너가 작품을 집필했다.
닛토축음기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윤심덕은 1926년 7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사의 찬미>를 비롯한 곡들을 취입했다. 녹음을 마친 뒤 도쿄에 있던 김우진에게 전보를 보내 재회한 후 생에 마지막 여행이 될 배에 몸을 실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사의 찬미> 가사 중
윤심덕이 낸 작은 균열
윤심덕은 개화기 여성운동을 주도했던 나혜석, 김일엽 등과 함께 신여성으로 꼽힌다.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신여성 가운데 자유연애의 대표적 인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신여성 1세대로 활발히 활동한 김일엽은 윤심덕과 평안남도 용강에서 함께 자라 삼숭보통여학교를 다니며 오랜 친구로 지냈다. 1920년대 초 김일엽은 정조에 있어 남녀 사이의 육체적인 결합의 기준보다는 정신의 일치, 즉 인간 합일 같은 근원적인 가치 기준을 두자는 ‘신정조관’을 주장했다. 또한 「신여자」 주필로 활동하며 동아일보에 기고한 <근래의 연애문제>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연애와 사랑의 감정에 기초를 두는 한에는 상대 남성이 기혼이건 미혼이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연애는 가장 자유롭지아니치 못할 것이외다. 만일 그 남녀가 참마음에서 끌어나오는 사랑에서 이러한 관계를 두게 되었다 하면 남자도 ‘자기는 기혼 남자다’하는 생각보다 그 여자를 사랑하는 생각이 앞설 것이요, 여자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만일 연애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교환되는 것이라 하면 민적상 아내로 있는 그것이 무슨 그 두 사람 사이의 연애 문제에 큰 장애가 될 것입니까…”
-김일엽, <근래의 연애문제>, 「동아일보」 1921년 2월 24일
김일엽의 이 글을 윤심덕이 읽고 공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애석하게도 5년 후 ‘기혼자’인 김우진과 ‘미혼자’인 윤심덕은 그 ‘큰 장애’를 넘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당시 신여성들은 봉건적인 가족제도와 결혼제도에 대해 비판하며 신문명 사회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신여성들의 주장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죽음을 택한 윤심덕의 삶에서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단지 불륜으로 자살이라는 비극을 택한 가십거리의 여성이 아닌, 당시 여성들을 억압했던 사회적 제도에 도전하며 작은 균열을 낸 신여성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