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청춘을 불사르고
고독한 잎 하나[一葉], 확고한 자아의 확립
신여성에서 비구니로, 다시 비구니 문인으로
한 비구니가 1960년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시작으로 1962년 에세이집 『청춘을 불사르고』를 펴내자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저자가 다름 아닌 소위 신여성 문인으로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몸소 실천하다가 1933년 이후 출가해 세속과 절연하고 철저히 승려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던 김일엽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일엽은 1971년 입적하기 전까지 다시금 활발히 문필생활을 이어가며 한국 문학사, 사상사에서 승려 문인의 한 계보를 새롭게 남겨놓게 됐다.
한국 근대 여성 문학, 그리고 한국 여성 불교를 논할 때 김일엽의 위치는 각별하다. 김일엽은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일본에 유학도 다녀온 데다가 「신여자」의 편집인까지 역임하며 (여류)문인이자 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했다. 그리고 그간 자신에게 부여됐던 모든 이름을 뒤로하고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로 생을 마쳤다.
‘자유연애’와 ‘신정조론’을 이야기하고, 누구보다 활발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제 목소리를 내던 김일엽이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된 사실은 그 드라마틱함 때문에 오래도록 세간의 이야깃거리가 됐다. 그러나 그런 저널리즘적 관심은 김일엽과 불교의 인연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뿐 그의 일생에서 불교가 갖는 의미를 섬세히 살펴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김일엽의 일생을 불교적 관점에서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원적 고독과 자아의 문제
김일엽(일엽一葉은 법명, 본명은 원주元周)은 1896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했다. 당시 평안도는 한반도 내 기독교 문명에 일찌감치 노출돼 기독교 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일엽의 아버지인 김용겸은 평안남도 지부장까지 지낸 목사였다고 한다. 이후 김일엽이 기독교계 교육기관인 이화학당과 도쿄 영화학교에 수학한 사실까지 포함하면 출생과 성장에 있어 기독교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밀한 고백과 계몽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김일엽의 글의 경향 또한 기독교적 글쓰기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김일엽의 전격적인 불교 귀의가 더욱 이채롭게 느껴지는 것 또한 그의 이런 성장 과정 때문일 것이다.
김일엽은 일찌감치 선진 문물에 눈 뜬 부모의 지원에 힘입어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김일엽의 어머니인 이마대 또한 전통적인 여인상과 거리가 있어 딸을 마냥 현모양처로만 길러낼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자신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학교 측에 청을 넣었던, 이후 노래 <사(死)의 찬미(讚美)>로 유명해진 친구 윤심덕(尹心悳)과의 인연을 기록해두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딸의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던 가정에서 성장한 김일엽은 어머니를 시작으로 동생들, 마지막으로 이화학당 시절 아버지까지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말 그대로 일엽(一葉), ‘외로운 잎 하나’가 되고 말았다. 천애(天涯) 고아가 되어버린 김일엽에게 인간 존재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상실과 근원적인 고독에 대한 의문은 전 생애를 관통하는 큰 과제로 남게 됐다. 김일엽의 고백에 따르면 기존에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기독교에서는 자신의 심부 속 의문을 풀지 못해 심적 갈증을 더욱 느끼게 됐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절대자에게의 온전한 의지를 전제하는 기독교는 자기 삶에서의 주체적 의지가 강했던 그의 성향과도 그다지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일엽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자아의 탐구는 그가 일생을 두고 고심한 화두가 됐다.
「신여자」와 ‘신정조론’
부모의 별세 이후 김일엽은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도쿄의 영화학교로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이 시기 이광수, 나혜석 등 도쿄의 유학생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일생에 걸친 교우관계를 맺게 된다. 특히 이후 한국 사회에서 여러모로 화제의 인물이었던 나혜석과의 인연이 김일엽과 나혜석 일생 동안 각별하게 이어졌다는 점은 눈여겨볼 지점이다. 김우영과 결혼하고 화가로 승승장구하던 나혜석은 최린과의 스캔들로 이혼, 이후 <이혼고백서〉의 발표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에 이른다. 사회적 추락 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은 나혜석을 수덕사 인근 자신의 거처 주위에 있을 곳을 마련해주고 거두어줬던 이도 김일엽이었다.
한편 일본에서 귀국한 김일엽은 문인이자 사회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그를 안쓰럽게 여긴 주위의 주선으로 나이 차가 상당했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교수였던 이노익과 혼인하게 된다. 남편의 재정적 지원 하에 1920년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대사회적인 메시지를 발화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동아일보」에도 글을 싣게 됐다.
「신여자」는 일본의 여성 잡지 「청탑」을 강하게 의식해 편집과 필진 모두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잡지였다. 소파 방정환을 고문으로, 김활란, 나혜석, 박인덕 등이 동인으로 함께했다. 김일엽은 「신여자」의 주요 필진으로서 여성의 사회참여와 여성 교육의 필요성, 여성의 주체적인 삶의 중요성 등을 여러 장르의 글(소설, 산문, 시)로써 발화했다. 특히 서간체 양식을 전략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자칫 대사회적인 메시지가 가질 수 있는 경직성을 타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심차게 기획했던 「신여자」는 저조한 투고, 재정적 어려움, 당국의 감시 등으로 결국 발간 4호 만에 폐간하게 됐다. 이즈음 서로 간에 다소 무리한 결합으로 여겨졌던 결혼 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후 도쿄로 2차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
잠시나마 새로 꾸렸던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김일엽은 이후 보다 과감한 행보를 보이게 된다. 신문, 잡지를 통해 여성 인권 향상의 목소리를 높였으며, 여러 좌담회에도 참여하면서 문인이자 사회운동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된다. 김일엽은 이 당시 여성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장류까지 사서 먹어야”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또한 ‘자유연애’를 주장하며 자유롭게 이성을 만나며 ‘방종한 신여성’의 전형으로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도중 1924년 「부녀지광」에 실은 <우리의 이상>에서 처음 주장하고, 1927년 「동아일보」의 <나의 정조관>에서 더욱 심화된 ‘신정조론(新貞操論)’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아도 파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주목된다. 김일엽은 정조를 “처녀의 기질이라면 남자를 대하면 낯을 숙이고 말 한마디 못 하는 어리석은 태도가 아니고 정조 관념에 무한 권위 다시 말하면 자기는 언제든지 새로운 영과 육을 가진 깨끗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감정”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더불어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만 부여되는 정조 지킴의 의무가 부당함을 주장한다. 결국 정조는 육체의 차원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김일엽의 주장은 기존 한국 사회 내 남성-여성 간 특수하고 고질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적 분석에서 나온 것이지만, 다소 낭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불철저함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혼녀나 의도치 않게 정조를 유린당한 여성들에 대한 당시 사회적 낙인의 폭력성을 상기할 때, 정조에 대한 전환적 관점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정조를 물리적 육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신적 차원으로 초월해 버리고 있음이 특징적인데 이는 불교의 주요한 가르침인 ‘일체유심조’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즈음 김일엽과 불교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불교와의 만남과 귀의
앞서와 같은 행보를 보였던 탓에 1933년 김일엽의 출가는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때 깊게 교제했던 백성욱과의 결별이 김일엽의 불교 귀의의 가장 큰 이유처럼 제시되기도 했다. 그 결과 김일엽의 출가는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면서 ‘정사(情死)’만큼이나 저널리즘적 관점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됐다. 그러나 이 같은 저널리즘적 흥미는 김일엽의 출가를 충동적인 것으로 여기고, 김일엽과 불교와의 인연을 축소한다는 데서 문제가 있다.
그러나 김일엽은 이미 1923년 만공 선사의 법문을 듣고 크게 발심한 바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1920년대 중반부터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고 있었다. 1927년경부터 「불교」지에 글을 발표하고 불교 인사들과 교류해 왔으며, 1928년에는 만공 선사에게 수계를 받기도 했다. 김일엽이 이노익 이후 부부의 연을 맺었던 이도 재가승인 하윤실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 선불교를 재정립한 만공 선사와의 만남은 김일엽의 불교 귀의 결정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김일엽은 그간 자신의 인생에서 풀지 못한 여러 의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상당 부분 불교의 세계관에서 얻었다고 고백했다. 특히 확고한 자아를 확립하고자 했던 일생의 노력이 불교의 ‘무아(無我)’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님을 확인했으며, 오히려 자아의 ‘무화(無化)’야 말로 자아를 확립하는 것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게 됐음을 밝혔다.
입산 후 ‘속세와는 철저히 절연할 것’을 당부한 스승 만공 선사의 말을 지켜 김일엽은 수행자로서 삶에 철저히 집중했다. 그가 다시 본격적인 절 밖 활동에 나선 것은 앞서 언급했듯 에세이를 통한 대중포교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김우영
성균관대와 서울대에서 한국근현대문학에 대해 공부하고 현재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석사 논문으로 「김일엽 문학과 자아의 의미」를 펴냈으며, 『김일엽 선집』을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