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보령 오천항 충청수영성

2022-02-24     노승대

보령은 예전에는 대천시, 보령군이라 불렀지만 광역시가 되며 보령시로 바뀌었다. 보령의 오천항은 우리나라 키조개의 60~70%가 생산되는 곳이다. 이제는 내방객을 위해 항구에 횟집도 많이 생겼고 키조개 코스요리도 개발해서 판다.

조선시대의 오천항은 충청수영이었다. 충청도를 관할하는 수군절도사의 군영이 있었던 곳이다. 곧 충청도 해군사령관의 본부가 있었다는 말이다. 조선 조정은 고려 말기 왜구의 침탈로 많은 곤욕을 치른 것을 참작해 경상도에 두 곳, 전라도에 두 곳, 충청도에 한 곳 등에 수군절도사의 군영을 배치했고 수군절도사를 ‘수사’라 부르고 그 군영을 ‘수영’이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봤을 때 경상도 왼쪽 수영(좌수영)은 지금 부산 수영 부근, 오른쪽 수영(우수영)은 지금 통영 부근이었다. 전라 좌수영은 여수, 우수영은 해남에서 진도 건너가기 전 우수영이었다. 수사도 좌수사, 우수사로 줄여 불렀다. 전라좌수사라 하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라는 말이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사는 박홍, 경상우수사는 원균, 전라좌수사는 이순신, 전라우수사는 이억기였다. 그러나 박홍은 40여 척의 배를 수장시키고 도망쳤고 원균도 연전연패, 겨우 4척을 이끌고 이순신에게로 갔다. 임진왜란 전 해인 1591년 77세의 노장 정걸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조방장(참모 역할)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미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를 역임한 무장으로 이순신보다 31세나 많았지만 나라를 위해 그런 명령에도 개의치 않은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육지와 바다의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고 그 모든 경험을 이순신에게 전달했다. 1년 뒤 정걸은 충청수사로 왔고 행주대첩에도 참전해 화살이 떨어진 권율에게 화살을 공급하고 한강 연안의 왜군을 공격했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이왕에 충청수영에 왔으니 그의 이름을 한번 되새겨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터이다.

 

충청수영은 중종 5년(1510)에 구릉의 정상을 따라 축조했기에 항구를 내려다보기 좋다. 네 문은 모두 없어지고 망화문 터의 아치형 석문만 남아있다.

 

진휼청은 충청수영 관내 고을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이다. 1896년 충청수영이 폐지된 후 민가가 됐으나 1994년 정부가 다시 매입했다.

 

성곽에서 바라본 오천항. 천수만에서 쑥 들어온 지형이라 태풍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충청수영은 국가 조운선의 보호임무도 가지고 있었다.

 

2015년 137년 만에 복원한 영보정. 높은 등성이에 앉은 이 정자는 정약용이 세상 경치 중 가장 뛰어나다고 했을 만큼 많은 시인 묵객이 방문했다.

 

영보정 쪽에서 건네다 본 성곽. 처음 축성했을 때 외곽성의 길이가 1,650m였다. 군선도 142척, 병력은 8,414명에 이르렀다. 그만큼 중요한 기지였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객사다. 중앙의 관리나 수영 산하의 장교들이 오면 묵기도 해서 장교청으로도 불렀다. 오천초등학교에서 옮겼다.

 

관아의 내삼문이다. 충청수사의 집무실은 공해관(控海館)이었다. 현판 글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후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가진이 썼다.

 

다른 지역의 관아들처럼 수영 자리에도 관청과 오천국민학교가 들어섰다. 옮겨진 내삼문 앞 충청수영을 거쳐 간 수군절도사와 소속 장교들의 공덕비.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평민 도미와 미모의 아내가 겪는 애달픈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보령에서는 정절사라는 도미부인사당을 세워 그 정절을 기린다.

 

도미부인의 묘는 진해시 청안동 해변마을 동산에 전해졌으나 토지개발로 사당 옆으로 이장됐다. 우리에게 도미부인이 있다면 중국에는 4대 미인이 있다.

 

출처 바이두

당나라 양귀비는 중국 대표 미인이다. 어느 날 화원에서 꽃잎을 만졌더니 꽃잎이 그 미모에 부끄러워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수화(羞花)미인이라 부른다.

 

출처 바이두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 그녀가 달밤에 화원을 거니는데 아름다운 달이 그 미모에 눌려 구름 뒤로 숨었다 한다고 하여 생긴 별명이 폐월(閉月)미인.

 

출처 바이두

왕소군을 빼놓을 수 없다. 한나라 때 흉노로 끌려가는 도중 비파를 타자 날아가던 기러기가 그 모습을 보고 날갯짓을 멈춰 떨어졌단다. 낙안(落雁)미인이다.

 

출처 바이두

춘추시대 월나라 미인 서시는 침어(沈魚)미인.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을 때 물속 물고기가 그 자태에 넋이 나가 헤엄을 멈춰서 가라앉았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 때 500여 명이 순교한 갈매못 순교성지에도 들렸다.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들어온 다블뤼 주교도 두 신부와 함께 순교했다.

 

다블뤼 주교는 21년 동안 조선에 살며 판소리를 좋아하고 우리의 공동체문화를 존경했다. 다섯 순교자의 시신은 처음 이 자리에 같이 묻혔다.

 

이지함(1517~1578) 묘역에도 들렸다. 서경덕의 제자로 천문, 지리, 의약에 밝았고 마포강변 흙집에 정자를 짓고 살아 토정(土亭)선생이라 불렀다.

 

바로 새해가 되면 한 번씩 보는 토정비결의 저자다. 모두 14기의 가족묘로 이루어져 있고 토정의 묘도 임진왜란 전의 양식으로 조성됐다.

 

토정의 부친 묘도 정면 중앙에 비를 세웠다. 토정은 이 명당을 잡으며 다음 대에 정승이 난다고 예언했는데 큰형 아들 이산해가 영의정에 올랐다.

 

상석 앞 향로석은 제사를 모실 때 향로를 놓는 받침대다. 뛰어난 조각이 많아 도굴꾼의 손길을 많이 탔는데 다행히 제 자리에 있다. 석질이 나쁜 탓이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