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봄을 기다리는 제주도
제주도는 고난의 섬이었다. 탐라국 시절에는 백제에 조공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다시 신라에 조공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어 독립국의 지위를 잃었다. 고려가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부마국이 되자 제주의 고통이 시작됐다. 원나라는 탐라총관부를 두고 다루가치(점령지 통치관)를 파견했다. 곧 원나라의 직접 통치 지역이 된 것이다. 이는 말을 기르기 적당한 풍토였기 때문이다. 말을 관리하는 몽골인 목호(牧胡, 하치)와 몽골 군사 1,500여 명이 제주에 들어왔고 제주 사람들은 100여 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해야 했다.
조선시대에도 제주인들의 고난은 끝이 없었다. 조정에서 공납하라는 전복 수량 등을 채우기 위해 해녀들의 고통이 심했고 관리들의 농간으로 더욱 힘들었다. 임진왜란과 전염병이 겹치며 제주 백성 3분의 2가 죽었지만 수탈은 줄어들지 않았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 많은 제주인이 도주하듯이 육지로 이주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결국 1629년 출륙금지령을 내린다. 거주이전의 자유를 없앤 것이다. 이때부터 제주인은 1825년까지 200여 년간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1866년 이후에는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이 고종의 신표를 지니고 선교하며 토호 세력, 무뢰배들과 어울려 도민들을 멸시하고 가렴주구를 일삼자 대정군수의 통인 이재수가 난을 일으켜 제주성을 점령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살해했지만 결국 조정에 자수해 교수형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인들이 해녀조합을 만들어 수산물을 수탈했기에 해녀들의 항일운동도 일어났다. 해방 후에는 다 알다시피 4·3사태가 일어나 3만 명 이상의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30만 명이었다.
토박이 제주도민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 뒤에는 오랫동안 시련을 겪은 제주인의 아픔이 있다. 제주도에 오면 이러한 동족의 시련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제주도를 바르게 바라보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서귀포 동쪽 남원읍 위미리에는 동백나무가 많다. 동백수목원도 있지만 나는 제주도기념물 제39호인 동백나무군락지가 더 좋다.
이곳은 현맹춘(1858~1933) 할머니가 17살에 시집와 해초를 캐고 품을 팔아 황무지를 사고 동백 씨를 돌담 울타리에 심어 조성했다. 키가 10~12m에 이르러 장관이다.
2,000~3,000평 대지에는 애기동백이 자연스럽게 심겨 있어 한가롭게 산책하기에 좋다. 국화를 닮은 노란꽃도 피어 있다. 너무 다듬지 않은 것도 매력이다.
동백의 꽃말은 “나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라고 한다. 동백은 나무 위에서도 피고, 떨어져서도 피고, 마음속에서도 핀다.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다.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 너 동백.
한쪽에는 훌쩍 큰 야자수들이 서로 키를 자랑하며 서 있다. 이 워싱턴 야자수들은 90년대 관광도시 이미지를 부각하려고 수입해 식재하기 시작했다.
큰엉 해안풍경. 큰엉은 해안절벽 아래 파인 커다란 바위 그늘로 해녀들이 옷도 갈아입고 휴식도 취하고 식사도 하는 곳이다. 구름과 바람이 노래한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해는 이미 바다로 떨어졌다. 중산간도로를 달리다 보니 푸른 초원 위로 한라산이 훤히 보인다. 구름도 한 조각 두둥실 떴다. 행운이다.
만장굴은 제주도 용암동굴 중에서도 가장 크고 길이도 7.4km에 달한다. 폭이 18m, 높이 23m에 이르러 원형극장에 들어온 듯 시원한 느낌이다.
용암이 뚫고 지나가며 생긴 동굴로 입구에서 1km 지점에 있는 용암석주. 상부 굴에서 용암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용암 돌기둥은 7.6m에 이른다.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비자림은 항상 사람이 붐비는 명소다. 1년에 1.5cm밖에 안 자랄 정도로 성장이 늦다.
그러나 주목처럼 수명이 길어 지름 20cm 정도면 벌써 100살이 넘는다. 시조목으로 알려진 이 천년수도 800살이 넘었다. 인간수명 별거 아니네.
아침 식사하러 서귀포 시내로 가는 길에서 만난 한라산. 정상의 눈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니 머리 풀고 누운 여신의 윤곽선이 보이나, 안 보이나?
화순 곶자왈생태탐방숲길로 들어서니 사람이 다닐 좁은 길에만 붉은 화산송이를 깔아 놓았다. 간간이 긴 의자만 있을 뿐 경계선 줄도, 화장실도 없다.
곶은 숲, 자왈은 가시덤불 돌밭이라는 뜻이다. 곧 농사지을 수 없는 황무지지만 나무도 자라고 그 나무에 콩짜개덩굴과 송악덩굴이 엉켜 자란다. 건강하다.
나무에 송악덩굴이 수없이 감고 올라가 나무 등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송악덩굴은 나무뿐만 아니라 제주의 돌담, 바위등에도 끈질기게 붙어 자란다.
붙어 자라던 송악줄기가 굵어지고 어쩌다 태풍으로 붙어있던 나무와 떨어지게 되면 잔뿌리가 털처럼 나기도 한다. 공기 중의 습기를 얻으려는 변신이다.
밑동에서부터 사람의 키 높이까지 무시무시한 가시로 무장하는 나무도 있다. 동물과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위쪽 가지에는 가시가 없다.
서귀포 쪽은 이미 매화가 한창 피어나고 있다. 이 꽃소식이 바다를 건너면 남해안 매화들도 기지개를 켜리라. 금둔사 홍매, 선암사 백매가 줄줄이 피겠지.
명자나무도 이미 꽃 피울 준비를 끝냈다. 아직은 차가운 제주 바람, 조금만 누그러지면 화려하게 피어나겠지. 우리들에게도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