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세계의 변호인, 지장] 보살을 넘어선 왕보살

무불無佛시대의 교주, 지장보살

2022-01-24     자현 스님

저승세계의 변호사, 지장보살의 위대한 서원

주호민 작가의 만화 『신과 함께』에서 지장보살은 대형 로펌의 변호사와 같은 설정으로 등장한다. 나름 정확한 비유다. 사람이 죽은 뒤 심판받는 곳인 명부(冥府)의 재판관은 염라대왕을 필두로 하는 시왕(十王, 사후세계에서 죄의 경중을 다루는 10명의 왕)이지, 지장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는 인과론을 기본으로 한다. 삶에 있어서 인과론의 작용은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 즉 ‘좋은 원인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나쁜 원인에는 고통의 결실이 맺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을 지장보살도 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지장은 명부의 심판과정에서 죄인을 임의로 빼주는 절대적인 사면권을 가진 분이 아니다. 바로 이점이 기독교의 심판론과 다른 불교만의 특징이다. 즉 지장보살 역시 초법적인 존재가 아닌 인과론의 원칙 안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장보살은 어떻게 지옥 중생을 구제할까? 지장보살은 죄인의 착함을 부각해서 뉘우치게 하고, 이를 통해 재판관에게 영향을 준다. 이런 점에서 지장은 변호사와 유사하며 판사와는 다르다.

대승 보살의 서원(誓願)이라는 배를 타면, 제아무리 무거운 돌이라도 물에 뜨고 가라앉지 않는다. 그런데 지장은 대승의 많은 보살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서원을 가진 분이다. 지장보살의 서원은 ‘중생도진방증보리(衆生度盡方證菩提) 지옥미공서불성불(地獄未空誓不成佛)’이라고 한다.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증득하고, 지옥이 비기 전에는 결단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인류의 종교사 전체를 통틀어도 지옥을 넘어선 존재가 자발적으로 지옥에 들어가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이는 지장이 유일하다. 이 때문에 특별히 지장을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지장의 서원에 편승하면 죄가 많은 망자라도 능히 구제될 수 있다. 마치 최고 로펌의 변호를 받으면, 극단적인 죄를 제외하고는 풀려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 지장의 위대한 서원은 염라대왕과 시왕의 존경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지장이 변호하면 중생은 구제되는 것이다.

<지장보살도>, 고려 14세기,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무불시대 최고의 ‘왕’보살

지장을 흔히 ‘명부의 구제자’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 전래한 초기 지장신앙은 명부 구제가 아니라, 관음신앙과 유사한 현세의 구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장보살과 관련된 경전에는 지장삼부경으로 불리는 『대승대집지장십륜경』(이하 『십륜경』)·『점찰선악업보경』·『지장보살본원경』(이하 『지장경』)이 유명한데, 이 중 유행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이 『십륜경』이다. 이 경전에서는 불교가 쇠퇴하는 험악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지장보살이 구원자가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즉, 사후의 명부가 아닌 삶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로 인해 중국불교의 초기 지장신앙은 관음과 더불어 현세 구제만을 다뤘다. 이는 『지장보살상영험기(地藏菩薩像靈驗記)』 속에 수록된 육조시대(229~589) 양나라의 화가 장승요가 선적사(善寂寺) 벽에 그린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방광(放光)했다는 「선적사화지장방광지기(善寂寺畫地藏放光之記)」의 기록 등을 통해서 판단해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항해의 안전이나 출산 등의 기원에서 지장이 신앙화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상은 관음이다. 관음은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맞춤 구제해 준다. 또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는 남인도의 보타락가산에 머무는 내용이 존재하며, 극락과 관련해서는 대세지보살과 더불어 아미타불의 좌우보처가 된다. 그런데 관음이 아미타불의 좌보처라는 점은 관음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부처님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그러나 지장은 원칙적으로 어떤 부처님과도 함께 등장하지 않는다(이것은 원칙이지 변형된 상황 속에서는 좌우보처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단독으로 등장하는 보살은 미륵과 지장뿐이다.

미륵은 미래불이며, 석가모니불은 열반한 과거불이다. 이런 중간기간을 부처님이 안 계신 무불(無佛)시대라고 한다. 미륵은 미래불로서 현재 당선인 신분으로 천상의 도솔천에 머물고 있다. 이 미륵이 56억 7천만 년 후에, 지상으로 내려와 부처님이 되어 용화세계라는 이상세계를 구현한다. 이러한 미륵의 준부처님의 위상으로 미륵은 다른 부처님의 좌우보처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십륜경』에는 이러한 무불시대의 주관자가 다름 아닌 지장으로 나온다. 즉 지장은 대통령 유고 시의 총리처럼, 부처님은 아니지만 부처님에 준하는 위상을 가진 보살이다. 이 때문에 지장 역시 미륵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좌우보처가 되지 않는다. 인기에서 지장은 관음에 미치지 못하지만 위계에서만큼은 관음이 지장에 필적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지장보살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지장을 다른 보살들보다 격을 높여 ‘지장왕보살’로 칭한다. 이는 총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명부의 시왕을 좌지우지하는 왕보다도 높은 보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옥이 비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특별히 더 위대한 서원을 한 보살이라는 점이다. 셋째는 부처님께서 안 계시는 무불시대의 주관자, 즉 무불시대의 교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3가지 이유로 지장은 일반 보살이 아닌 최고의 보살, ‘왕’보살이 되는 것이다.

<지장보살도>, 고려 14세기, 리움미술관 소장

 

현세·명부·지옥의 구제자

지장신앙이 관음과 같은 현세 구제 중심에서 명부 구제까지 신앙의 영역을 확대한 시기는 687~778년 사이로 본다.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통일제국 당나라(618~907) 때였다. 이는 현존하는 유물과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다. 687년 낙양의 용문석굴에 지장보살상을 조성하고 내용을 새긴 조상기(造像記)에 망자의 천도를 발원하는 내용이 존재한다. 또 778년 지장의 명부 구제가 수록된 「도명화상환혼기」가 확인된다.

지장신앙의 명부 확대는 삼성이 가전을 넘어 반도체까지 영역을 넓힌 것과 유사하다. 삼성이 가전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반도체가 기업의 주력 사업인 것처럼 말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조상숭배가 강해 현세보다 명부 수요가 점차 비대해진다. 이 때문에 지장신앙은 ‘①현세 구제 → ②현세+명부 → ③현세<명부 → ④명부 구제’와 같은 단계적 변화를 보인다.

지장신앙이 변화하고 확대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당나라가 불교국가가 되면서 중국 전통인 조상 숭배와 천도에 필적할 불교적인 측면이 요청된 점. 둘째, 실크로드 서역남로(西域南路)의 도시인 호탄에서 지장의 명부 구제 내용을 담은 새로운 경전 『지장경』이 중국으로 유입된 점. 다시 말해 내부적인 요청과 외부적인 충격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신앙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장 역시 대승불교의 다른 보살들과 마찬가지로 인도를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인도에서 지장은 미륵·관음·문수처럼 부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호탄의 거라제위산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한다. 이때 먼저 완성된 것이 『십륜경』의 현세 구제이다. 이것이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으로 전래한다. 호탄이라는 실크로드 문화의 영향으로 지장의 모습에는 스님의 삭발한 복색 외에도 머리에 두건을 두른 피건(被巾)지장의 모습이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는 아랍의 부호들이 강렬한 햇빛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를 천으로 덮는 것과 유사하다. 피건지장의 형태 속에는 무더운 문화 배경과 영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십륜경』 이후 호탄의 지장신앙은 명부 세계로까지 영역을 넓히게 된다. 이러한 전개가 가능한 것은 지장이 무불시대의 주관자이기 때문이다. 지장이 전체 책임자이므로 이 세계를 넘어 명부로까지 영역이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불화 지장보살도를 보면, 제석·범천과 사천왕이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제석천은 하느님이며, 범천은 조물주이고, 사천왕은 일종의 방위신이다. 이들은 이 세계와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 신은 부처님을 그린 불화에는 등장해도 보살도에는 표현되지 않는다. 이는 이 세계의 대표이자 주관자는 부처님이며, 보살은 이를 돕는 제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옥천사 <지장보살도>, 1744, 옥천사 성보박물관 소장. 중앙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앉아 있고, 우측에 무독귀왕(無毒鬼王), 좌측에 도명존자(道明尊 者)가 서 있다. 

그러나 지장보살도와 미륵보살도에는 이들 신이 표현된다. 이는 지장과 미륵이 각기 무불시대의 주관자와 미래불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도 지장이 현재 이 세계의 주관자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또 지장이 명부 세계까지도 관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지장은 이 세계와 명부 세계를 통괄하는 최고의 보살인 것이다.

지장보살이 명부의 구제자라는 인식은 지옥의 구제자와 겹쳐지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명부와 지옥 간에는 차이가 있다. 현행 사법제도로 말하면, 명부는 사건이 계류 중인 상황으로 형이 확정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지옥은 형이 확정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다. 양자 간에는 미결수와 기결수라는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오늘날과 달리 사법 심리가 진행되는 법원과 교도소가 연결된 공간 속에 존재했다. 이 때문에 지장에게는 명부와 지옥의 구제자라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장보살은 손에 밝은 구슬과 고리가 6개 달린 석장(錫杖)을 잡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어떤 이들은 구슬이 망자의 생전 일을 비춰보는 업경대(業鏡臺)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구슬은 여의주로 풍요의 상징일 뿐이다. 또 석장으로 지옥문을 연다고도 하는데, 지장신앙 경전에는 이러한 내용은 없다. 다만 우란분절과 관련된 『대목련경』에 석장을 떨쳐 소리를 내서 아비지옥의 문을 여는 대목이 있다. 이런 측면이 지장보살의 석장으로까지 전이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석장은 기본적으로 만행하는 승려들이 드는 지팡이로 동물 등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호신용으로도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이런 석장이 후대에는 지옥문을 여는 만능키와 같은 역할로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불교에서는 자취를 감췄지만, 과거에는 석장 또한 목탁이나 요령과 같은 불교의식에 필요한 신령한 도구인 불구(佛具)였다. 

 

자현 스님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월정사 교무국장을 맡고 있다. 인도·중국·한국·일본과 관련된 170여 편의 논문을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에 수록했다. 『지장 신앙의 성립과 고려불화 지장보살도』(2021), 『사찰의 상징세계(상·하)』(2012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등 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