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감춘 암자] 추월산 보리암
지리산에서 날아온 나무매가 부처님 좌복을 틀어 연리지 느티나무 바위틈
1694년에 쓰인 『보리암중수기』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607년 신찬 스님이 중수했다. 그 뒤 『보리암중수기』를 지은 신여도의 증조부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머무른 인연이 있어, 그의 아버지가 1650년에 중수했다. 중수기를 지은 해인 1694년에는 쇠락했던 절을 신여도를 비롯한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중건했다. 근래에는 1983년에 성묵 스님이 인법당을 중수했고, 1984년에는 주지 영공 스님이 두 보살의 시주를 받아 가람을 갖추고 전기를 시설했다. 시주 보살들의 공덕비는 가파른 나무데크 시작 전 동굴 옆에 세워져 있다. 지금은 주지 원용 스님과 기도와 공양주 소임을 함께 보는 비구니 스님이 산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공부를 할 때다. 3년을 정진하다 초견성을 한 스님은 수행하기에 좋은 터를 찾기 위해 나무로 매를 만들어 전국으로 보낸다. 그 가운데 세 마리만이 땅에 내려앉았다. 한 마리는 송광사에, 또 한 마리는 백양사에, 세 번 째 한 마리는 바로 추월산 보리암에 앉는다. 송광사와 백양사는 이미 가람이 반듯하게 갖추어진 대중 수행 터였으므로, 두 곳은 초견성을 넘어서는 공부가 필요한 스님에게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보리암 터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절벽 틈 사이이기는 했으나 물이 끊기지 않고, 햇빛도 적당히 드는 동남향 석굴이다. 깎아지는 절벽이니 찾는 이도 없어 공부터로서는 여러모로 안성맞춤인 자리였을 것이다. 게다가 산의 형상이 기이해서 담양 쪽에서 보면 머리 깎은 스님의 형상이고, 암자 바로 아래 동네에서 올려다보면, 암자가 앉은 자리는 영락없는 수사자의 머리 부분이다. 암자 아래로 난 계단을 타고 약 30여m만 내려가면 ‘보조국사 토굴’로 전해지는 관음굴이 있다. 이름처럼 지금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다. 20여 명이 앉아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넉넉한 크기다. 이것을 보아 보조 스님이 지리산에서 내려와 잠시 머무르며 대오를 위해 동굴 수행을 했을 법하다.
주지 원용 스님은 큰스님의 공부 자리에서 많은 불자들이 기도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내부를 손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1597년, 조선의 한 여인이 수직 절벽의 바위 끝에 섰다. 여인이 오래 전부터 드나들었던 암자 주변의 절벽이다. 한 해 전 남편이 조선의 국왕 앞에서 죽자 여인은 암자를 더 자주 찾았다. 그이 남편이 적의 수급을 취하려 했던 것은 오로지 국왕의 안위와 종묘사직을 위함이었다. 그이는 한양에서 실려 온 남편의 주검을 보고서야 알았다. 자신의 기도에는 빗기고 스러지는 적의 총칼만 있었을 뿐, 흔적 없이 씌워지는 조정의 누명은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남편이 끝내 스스로 끄지 못하고 간 가슴 속 열불을 끄기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 일로 암자 법당에 살다시피 한 지 1년이 돼 갈 즈음이었다. 남편의 죽음에 환호한 왜적은 마침내 담양에 이르고, 어느새 여인이 머무는 암자 바로 아래까지 닥쳤다. 좌복을 딛고 선 여인은 남편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담은 ‘춘산곡’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봄 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에 다 붙는다. / 저 산의 불은 물로라도 끌 수 있으리니, / 연기 없이 타는 이 몸둥이의 불은 끌 물이 없구나.’
왜적에게 화를 당하느니 차라리 먼저 간 남편을 쫓아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충장공 김덕령의 처 흥양이씨다. 가파른 절벽 길을 40분 넘게 오르다 암자로 향하는 푯말을 지나면 후세인들이 흥양이씨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를 볼 수 있다.
지금 선원에 들어간 스님들이 한 3천 명 돼요. 종단스님들 총 1만 5천 명 잡으면 1/5이 선방에 들어간단 말이에요. 철철이 공부허면 도인들이 많이 나와야 되는데 도인들이 안 나와요. 언젠가는 뜻있는 스님들이 저기 선방에서 용맹정진 해서 함께 한 2년간 하루 18시간씩 해봤어요. 거기는 그래도 뜻있는 스님들이 오니까 한 2년간 있었던 거죠. 근데 아무리 뜻있는 스님들이 와도 공부를 헐라고 하는 마음은 다 있는데 같이 해보니까 새벽간에 꼬구라지는 것은 똑같더란 말이요. 선정력을 닦아 용맹정진으로 막 몰아붙이는 스님들이 그렇게 많지 않드라는 거요. 내나 공부 많이 한 큰스님들은 그래요. ‘시간이 공부가 아니고 발심이 공부라고.’ 마음이 일어나야 공부에 진척이 있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데 몸만 거기에 적응할라고 애를 쓰니까 잘 안 되는 거라요.
그렇다고 간화선이 아닌 것은 아니라. 간화선이 위기다 어쩌다 하지만은 조선시대에 간화선이 어디 있었어요? 스님이 천민보다 못한 지위에 있었는데. 간화선이 정법이 아니고 삿됐다면 이미 다 망하고 끊어졌어야 맞죠. 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정법이라고 했으면, 아직도 살아남아야 하는데 유학이라는 전통은 오백 년을 끝으로 사라졌단 말이죠. 유학은 궁극에 사람을 교화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라지게 됐다 이 말이죠. 근데 불교는 지금까지 살아남았어. 그건 뭐겠습니까. 간화선을 해갖고 도인이 나왔다 이 말이죠. 도인이 한 번 나올 때마다 전법이 확 되고, 또 언제는 끊어진 듯 허다가 또 확 살아나고, 이렇게 이어졌다는 말이죠. 큰 공부인이 나오면 흥하게 되죠. 그 힘이 간화선에 있는 건 맞죠. 다만 지금 시기는 포교에 비중을 두고 어렵게 중생들 속에서 사는 스님들을 지원해야죠. 대승이라는 게 보살심 내는 것 아닌가요. 신도들이랑 세상이랑 부딪힘서 진짜 공부허는 스님들 많아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부처님 불법을 전파하는 게 쉰 일은 아니잖아요. 그 스님들 자칫 속세에 물들지 않고 살게 헐라먼 종단이나 언론의 관심이 필요하죠. 큰 도인이 나와서 법보시 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요.
이 궁벽한 암자를 신도님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죠. 도량을 깨끗이 허다보면 신도님들이 신심을 내고 허니까. 개인적으로는 참선도 열심히 허고, 법당이 낡아서 손도 좀 보고 탱화도 새로 모실라고요. 관음굴도 참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계단을 바깥에서 내려갈 수 있도록 내서. 옛날 큰스님들이 공부했던 곳이라고 알리고. 좋은 환경에서 기도헐 수 있도록 헐라고.
글·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