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호랑이 잡는 대관령 산신
강릉단오제 주신主神 된 범일 국사
유·불·무가 함께하는 강릉단오제
강릉단오제는 대관령에서 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신제부터 신을 다시 보내는 송신제까지 약 20여 일간 진행되는 축제다. 예전에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제부터 5일간은 쉬지 않고 밤을 새우면서 굿을 했지만, 현재는 남대천 일대에서 8일 정도로 정해진 시간에 축소돼 열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2005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전통문화유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릉단오제는 여타의 단오제와 달리 유교·불교·무속의 제례 의식이 함께 공존하는 유일한 세시풍속이다.
강릉단오제는 음력 4월 5일, 강릉의 옛 관청이었던 칠사당(七事堂)에서 쌀과 누룩으로 신주를 담그는 일부터 시작한다. 음력 4월 보름, 산신을 모신 산신당에서 ‘대관령산신제’와 범일 국사(梵日國師)를 모신 국사성황당에서 ‘국사성황제’를 올린다. 성황제가 끝난 후, 신목잡이가 신목(神木)을 찾아 베면 사람들은 신이 깃든 이 나무에 청홍색의 예단을 걸어 국사성황 행차를 준비한다.
국사성황 행차는 대관령 옛길을 따라 구산과 학산을 거쳐 강릉 시내로 들어와 국사여성황제에서 ‘봉안제’를 받는다. 한 달 후, 대관령 국사여성황사에 함께 모셨던 국사성황 내외를 위해 신을 맞이하는 영신제를 올린다. 이후 두 신은 국사여성황의 친정인 정씨가에서 제례를 받고 나서, 단오마당이 열리는 남대천 제당으로 향하는 ‘영신행차’를 시작으로 강릉단오제의 본 무대가 시작된다.
범일 국사, 대관령 산신되다
강릉단오제에 대한 옛 기록들을 살펴보면, 산신에 관한 이야기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 성종 때 남효온(1454~1492)은 『추강집』에, “영동 민속에는 매년 3, 4, 5월 중에 택일하여 무당과 함께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음식을 아주 잘 장만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라고 기록해 대관령 산신제에 대해 언급했다. 광해군 때 허균(1569~1618)은 강릉에 잠시 머물렀을 때의 경험을 그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에 기록했다. 『성소부부고』에는 “김유신이 젊었을 때 강릉에서 공부했을 당시,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고 칼을 만들어 주었다. 김유신은 그 칼로 삼국을 통일하고, 죽은 후 대관령산신이 되었다”고 강릉 관아의 향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상의 기록들로 미루어 짐작건대, 강릉단오굿이 아주 오래전부터 산신을 모시는 제를 올렸고, 당시의 산신은 김유신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관령에는 산신당뿐 아니라 국사성황당 역시 존재한다. 현재는 산신당보다 국사성황당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강릉단오제 제례와 굿 대부분은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대관령국사성황신이 바로 범일 국사로 대관령의 주신(主神)이며, 강릉을 비롯한 영동지역 주민들의 기도 대상이기도 하다.
범일 국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아마 『조당집(祖堂集)』일 것이다. 『조당집』에 따르면, 범일(810~889)은 신라 선승으로 명주(지금의 강릉) 출신이었다. 범일은 홍덕왕 4년(829) 경주에서 구족계를 받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나라 제안(濟安)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문성왕 7년(847)에 귀국했다. 귀국 후 명주 도독 김공(金公)이 굴산사 주지를 청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간 굴산사에서 주석하면서 영동지역에 선불교를 뿌리내리게 했다. 범일은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창시자로 강릉 굴산사와 신북사를 비롯해, 낙산사와 두타사를 중창했다. 『조당집』에는 범일을 국사(國師)로 기술하지 않았지만, 신라 왕실에서 두 번이나 국사로 모시려 했기 때문에 국사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강릉단오제는 불교, 유교, 무속의 성격을 가지지만, 범일 국사를 위한 불교의례는 치르지 않는다. 의례는 유교제례와 무당굿이 담당하고 있고, 범일 국사에 대한 언급은 유교와 불교, 어느 쪽에도 없고 범일 국사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단오제 기간에 올리는 유교제례 축문에는 범일 국사가 아닌, 대관령국사성황으로 부르고 있다. 물론 범일 국사가 대관령국사성황이므로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유교제례에서는 범일 국사가 신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무당굿에서만 “강릉단오제 성황님을 모실라고 대관령 범일 국사 여국사성황님을 모시구요...”라며 범일 국사를 성황신으로 동일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강릉단오제 안에서 범일 국사를 대관령의 주신인 국사성황신으로 모시는 것은 무속(무당굿)에 한해서다.
그렇다면 범일 국사는 언제부터 강릉단오제의 대관령국사성황신이 된 것일까. 먼저, 단오제와 성황신에 대한 기록은 일제강점기 때 재편찬한 『임영지』(1933)에 단편적인 일화가 전한다. 영조 38년(1762)에 의금부 서리 이규가 살인범을 잡아들이기 위해 강릉에 갔는데, 때마침 관아의 아전이 단옷날에 국사를 배송하러 성황사에 갔다가 뒤늦게 돌아왔다. 의금부 서리는 화가 나서 아전에게 곤장을 때리고 성황신을 욕하던 도중,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많은 연구자가 이 일화에서 나오는 국사를 범일 국사로 보고 있다. 따라서 허균이 강릉에 머물렀던 1603년(선조 36) 여름 이후부터 의금부 서리가 갑작스럽게 죽은 1762년(영조 38) 사이에, 단오제의 주신이 김유신에서 범일 국사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정조 10년(1786)에 편찬된 『임영지』 속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강릉부에서는 매년 음력 4월 15일에 현직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정상에 있는 신당 앞에 나가 알리고, 국사를 성황사에 안치한다. 5월 5일이 되면 무당들이 갖가지 색깔의 비단을 모아 오색찬란하게 장대 끝에 매달았다. 신목(神木)을 들고 무당들이 풍악을 울리며 그 뒤를 따르고, 광대들이 잡희(雜戱)를 하며 행진했다. 이렇게 하루 종일 놀다가 대관령에서 모셔온 신목은 다음날 성황사에서 불태웠다. 강릉지역의 이 풍습은 그 유래가 오래됐는데, 이 행사를 치르지 않으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곡식이 손상되고 짐승들이 사람을 해친다고 했다.”
『임영지』 속지의 제례 내용은 현재의 강릉단오제와 거의 동일하며, 영·정조 시기에 국사와 성황사가 대관령의 주신으로 완전히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범일 국사 결혼하다
대관령국사성황당 내부의 범일 국사 모습은 승려가 아닌, 활을 차고 말을 타며 양옆에 호랑이를 거느린 무사의 모습이다. 산신도 그림만으로는 범일 국사가 아닌 김유신의 이미지에 가까운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산신각에 등장하는 산신은 호랑이 한 마리와 동자를 협시로 두는 삼존도 구도를 취한다. 하지만 대관령국사성황당의 범일 국사는 동자가 아닌 두 마리의 호랑이를 배치해 삼존도 구도를 취하고 있다.
국사성황당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대관령 산신당에도 등장하고, 강릉 시내의 국사여성황당의 도상에도 등장한다. 호랑이의 등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국사성황신이 호랑이를 매파(媒婆, 중매자)로 보내 국사여성황신이 된 정씨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는 설화와 연결해 이야기한다. 그러면 정씨 여인은 누구이고, 호랑이는 왜 등장한 것인가.
설화에 따르면, 정씨 여인은 강릉 출생으로 혼기가 찼지만 출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날 여인의 아버지 꿈에 대관령성황신이 나타나서 “내가 이 집에 장가올 터이니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사람이 아닌 서낭에게 딸을 줄 수 없어 거절했더니, 호랑이가 정씨 여인을 업고 달아났다. 가족들이 딸을 찾아 국사성황당에 가보니 딸은 성황신과 함께 있었으며, 이미 죽은 몸이었다. 가족들은 딸을 국사성황신과 결혼시키고, 정씨 여인은 국사여성황신이 됐다는 설화다.
또 다른 설화에는 정씨 여인은 동래부사를 역임한 정현덕(1810~1883)의 딸로 시집을 갔지만, 친정집에 머물고 있었다. 단오행차를 구경하던 중 호랑이의 습격을 당했고, 그의 시신을 국사성황당에서 찾은 뒤부터는 두 신위를 함께 모시게 됐다는 설화다. 정씨 여인이 국사여성황신이 된 데에는 ‘그녀의 집안이 당시 단오제를 주관하던 세력과 관련 있다’고 제시하는 의견들도 있다. 그녀가 살았던 강릉 남문동은 향리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읍성 주변이었으며, 당시 향리들은 단오제 연행을 주관했다. 따라서 정씨 가문이 당한 호환(虎患)은 단오제 진행에 있어 장애가 되기 때문에 정씨 여인을 단오제의 주신으로 봉안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강릉을 비롯한 영동지역은 호랑이의 피해가 컸던 지역으로, 『임영지』에는 강릉단오굿의 목적을 ‘풍작과 함께 금수의 피해를 막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영동 사람들은 호랑이를 숭배하거나,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남겨둔 머리나 신체 일부를 가족들이 찾아 호식장(虎食葬)을 치렀다. 심지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혼은 창귀(倀鬼)가 돼 일가친척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믿음 또한 강했다. 호랑이에 대한 피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영·정조 때에 극심해 영조 때 전국에서 100여 건이 넘는 호랑이 피해가 보고되기도 했다. 이 중 영조 11년(1735)에는 ‘8도(八道)에 모두 호환이 있었는데, 영동 지방이 가장 심해 호랑이에 물려 죽은 자가 40여 명에 이른다’고 상소가 올라갈 정도로 영동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무서운 존재였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제압하고, 호랑이에게 잡아 먹혀 창귀가 된 사람(정씨 여인)을 달랠 존재가 필요했다. 이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강릉을 중심으로 영동지역에 선불교를 정착시키고 세를 강화했던 범일 국사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뿌리 깊었고, 범일 국사가 두려움을 없애고 창귀를 달래며 풍작을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지역민들의 믿음과 연결돼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진. 유동영
지미령
한예종 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일본 미술을 독특한 시각으로 연구하며, 아시아의 불교미술 교류에 관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