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이성계의 기도처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상이암과 은수사
고려 우왕 6년(1890) 9월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존망의 위기를 구하자 최영 장군이 이성계에게 한 말이다. 왜구 침입에 가장 중요한 전투이며, 이성계 개인에게도 큰 전환점이 되는 전투였다. 왜구의 침입이 강화도를 넘어 한양부(漢陽府)까지 넘보는 상황이었다. 조정에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巡察使)로 임명해 이성계가 출전하게 됐다. 주변 계곡과 개천이 왜구의 피로 붉게 물들면서 스며들어 피바위[血巖]가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올 정도다. 황산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수산 자락에 상이암(上耳庵)이 있다. 이성계가 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돌아가던 중 무학 대사의 권유로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한다. 기도 중 동자승으로 변한 부처님을 친견하고 새긴 ‘삼청동(三淸洞)’이라는 비가 남아있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진안의 마이산에 다다른다. 이성계가 마이산 은수사(銀水寺)에서 기도를 드리는 동안 신선이 꿈에 나타나 금척(金尺)으로 계시를 주었다 해서 또 다른 기도처가 된다.
의정부 회룡사回龍寺
의정부 회룡사 역시 이성계의 기도처로 알려졌는데 여러 버전이 있다. 1384년, 이성계가 무학 스님과 함께 창업 성취 기도를 했는데 태조는 석굴암에서, 무학 스님은 무학굴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이성계가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 스님은 홀로 남아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고 한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와서 무학 스님을 찾아보고 절 이름을 회룡사로 했다고 한다.
남해 금산金山 보리암
남해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이었다. 보광산에 새 이름을 내린 임금은 태조 이성계다. 삼불암(三佛巖) 아래에서 이성계가 100일 동안 기도를 드린 끝에 산신령의 감응을 얻어 왕이 됐다는 전설과 이에 보은한다는 뜻에서 산 이름을 보광산에서 금산(錦山)으로 개명했다고 전한다. 보리암 밑자락에 기도터가 남아 있다.
사진. 정승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