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이성계의 기도처

2021-10-27     김남수
임실 상이암 무량수전.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상이암 삼청동비(三淸洞碑)를 모신 어필각.

상이암과 은수사

고려 우왕 6년(1890) 9월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존망의 위기를 구하자 최영 장군이 이성계에게 한 말이다. 왜구 침입에 가장 중요한 전투이며, 이성계 개인에게도 큰 전환점이 되는 전투였다. 왜구의 침입이 강화도를 넘어 한양부(漢陽府)까지 넘보는 상황이었다. 조정에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巡察使)로 임명해 이성계가 출전하게 됐다. 주변 계곡과 개천이 왜구의 피로 붉게 물들면서 스며들어 피바위[血巖]가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올 정도다. 황산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수산 자락에 상이암(上耳庵)이 있다. 이성계가 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돌아가던 중 무학 대사의 권유로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한다. 기도 중 동자승으로 변한 부처님을 친견하고 새긴 ‘삼청동(三淸洞)’이라는 비가 남아있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진안의 마이산에 다다른다. 이성계가 마이산 은수사(銀水寺)에서 기도를 드리는 동안 신선이 꿈에 나타나 금척(金尺)으로 계시를 주었다 해서 또 다른 기도처가 된다.  

진안 은수사. 이성계가 선신으로부터 금척을 받은     그림을 그려놓았다.
상이암 삼청동비.

 

의정부 회룡사回龍寺

의정부 회룡사 역시 이성계의 기도처로 알려졌는데 여러 버전이 있다. 1384년, 이성계가 무학 스님과 함께 창업 성취 기도를 했는데 태조는 석굴암에서, 무학 스님은 무학굴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이성계가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 스님은 홀로 남아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고 한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와서 무학 스님을 찾아보고 절 이름을 회룡사로 했다고 한다. 

도봉산 회룡사 전경, 의정부시 제공.

 

남해 금산金山 보리암

남해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이었다. 보광산에 새 이름을 내린 임금은 태조 이성계다. 삼불암(三佛巖) 아래에서 이성계가 100일 동안 기도를 드린 끝에 산신령의 감응을 얻어 왕이 됐다는 전설과 이에 보은한다는 뜻에서 산 이름을 보광산에서 금산(錦山)으로 개명했다고 전한다. 보리암 밑자락에 기도터가 남아 있다.

남해 금산(金山) 전경.
진안 은수사 전경. 

 

사진. 정승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