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유불儒佛 교체와 전통의 유산

숭유억불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2021-10-27     김용태
조선태조어진, 어진박물관 소장.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cm, 세로 218cm이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렸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말선초,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불교는 4세기 후반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 한국인의 사유와 관념, 종교와 문화의 기본 틀을 바꾸어 놓았다.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를 거치며 1,000년 동안 불교는 토착화에 성공했고 한국의 주류 전통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1392년 유교의 기치를 높이 든 조선이 건국하면서 유불(儒佛) 교체라고 하는 상징적 전환이 일어났다. 고려 말 조선 초를 가리키는 여말선초, 조금 더 길게 보아 14~15세기는 불교에서 유교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였다. 

14세기는 동아시아 세계의 체제 변동기로서 원에서 명,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를 대신해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졌다. 특히 중국에서 몽골족을 쫓아내고 한족이 세운 명이 중원을 재편하면서 중화 체제가 다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고려 유학자 관료들은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나누는 화이론(華夷論)의 세계관과 성리학을 앞세워, 불교를 오랑캐의 종교이자 이단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고려 말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한 비판과 이념적 공세의 강도를 점차 더해갔다. 이는 사원의 경제력과 불교계 세력이 지나치게 컸던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학계를 대표하는 높은 평판과 정치적 위상을 갖고 있던 이색은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이었지만, 공민왕이 즉위한 1351년 올린 상서에서 “오교양종(五敎兩宗)이 이익을 위한 소굴이 되고 놀고먹는 백성들이 많습니다. 도첩(度牒, 출가한 승려에게 나라에서 발급하던 일종의 신분증명서)이 없는 승려는 군대에 충당하고 새로 창건한 사찰은 철거하며 양민이 함부로 승려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며, 현실적 폐단에 대해 따끔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불교를 배척하는 배불(排佛)의 목소리는 정치·경제와 관련한 현안뿐만 아니라 윤리와 내세관처럼 불교와 유교가 자주 부딪혀온 문제에 대한 정면충돌로 불길이 옮겨붙었다. 불교는 부모와 군주를 저버리고 인륜을 도외시하는 오랑캐의 가르침이며, 인과응보와 윤회 등 터무니없는 혹설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왔다는 것이 비판을 일삼은 유학자들의 단골 메뉴였다. 그렇지만 사원이 막대한 토지와 10만 명이 넘는 노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고려 말까지는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억불정책이 취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불교가 나라에 해악이 되며 창업의 기반을 다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됐다. 승려가 생산을 안 하고 얻어먹으면서 사치가 심하다거나 사원의 재산 축적이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 불교가 국가와 백성을 좀먹고 병들게 한다는 등의 신랄한 비판을 당시 기록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 배불 논서인 정도전의 『불씨잡변』에서도 유교 우월주의와 척불(斥佛)의 논조가 강화되고 공세 수위가 훨씬 높아진 시대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제 고려의 핵심 전통인 불교는 중화의 시대적 보편을 자부한 성리학에 주류사상의 지위를 완전히 넘겨줘야 했다. 결국, 조선의 개국과 함께 불교는 유교에 밀려 비주류로 전락하게 됐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대상이 펼쳐졌다.

한양전도(漢陽全圖), 1780년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한양 도성 안의 모습을 남산을 위쪽에 경복궁을 아래쪽에 위치하게 그렸다. 정조 시대에 건립한 경모궁(景慕宮)이 표시된 것으로 보아 1776년 이후에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지도 하단 우측에는 한양의 행정 단위인 5부의 현황을 기록했다.
조선성시도(朝鮮城市圖), 조선시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한양 도성 안의 궁궐, 도로, 다리를 비롯해 문묘, 사직 등의 주요 건물을 표시했다. 사대문과 사소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한강과 한강 너머의 관악산도 표시됐다.

 

불교계 지각변동 부른 숭유억불

유교 이념을 전면에 내세운 조선 정부는 차츰 불교에 대한 통제와 방임, 그리고 사원 경제 기반의 대규모 환수를 추진했다. 조선의 창업 군주이자 불교를 숭신(崇信)했던 태조 대에는 강력한 억불 조치가 시행되지 않았고 승려 수를 제한하기 위해 도첩의 조건을 강화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정종을 이어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억불 시책이 본격화했다. 고려 말 국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교육을 받고 과거시험에 합격했던 태종은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진 불교계를 손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군주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고 6년 뒤인 1406년 불교 교단을 관리하는 승정(僧正) 체계를 전면 정비했다. 당시 11개 종파에 소속된 242개 사원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승정 체계 안에 들어갔다. 조계종과 총지종을 합쳐 70개,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 43개, 화엄종과 도문종 43개, 자은종 36개, 중도종과 신인종 30개, 남산종 10개, 시흥종 10개 사찰이었다. 이들 사찰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에 추가로 전지(田地)가 지급되기도 했다.

이때 242개를 제외한 전국의 사찰들은 어떻게 됐을까? 흔히 조선은 ‘숭유억불’로 인해 불교가 크게 위축됐다고 알려졌지만, 전국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사찰을 없애거나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태종 대에도 242개 외의 사원들이 보유하던 토지 가운데 공적 성격을 갖는 수조지(收租地, 조세를 받을 권리가 있는 땅)에 한정해 국가에 귀속시켰다. 실록의 기사를 보면 당시 사사전(寺社田) 3~4만 결, 그리고 사찰에 있던 노비 8만 명이 환수됐다고 한다. 이는 분명 사원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고 불교계에 큰 타격을 준 억불 조치였지만, 폐불(廢佛)은 아니었다. 다음 해인 1407년에는 조계종, 화엄종, 천태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의 7개로 종파 수를 줄였고, 242개 사원 가운데 비보사(자복사)로서 주로 지방 읍치(고을)에 소재하던 88개 사원을 제외하고 명산대천의 유서 깊은 사찰로 대체하도록 했다.

다음 세종 대에도 억불정책 기조는 그대로 이어졌다. 1424년 기존 종파들을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합했고,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개씩 36개 사찰을 지정해 국가 승정 체계 안에서 통제했다. 앞서 242개 사원이 전국의 군현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면 36개는 광역의 도 단위로 선정된 사찰이었고, 특히 경기도 일대 중심 20개 이상이 왕실과 관련 깊은 사찰이었다. 36개를 합쳐 선교 양종의 승려 수와 사사전 규모가 정해졌는데, 선종은 1,950명, 4,200여 결이었고 교종은 1,800명, 3,700결이었다. 또 승적과 인사 관리 등 승정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인 승록사(僧錄司)도 이때 폐지됐다. 대신 한양 흥천사와 흥덕사에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 조선 전기 불교의 선종이나 교종을 관장하던 행정 기구)가 설치됐고 승과(僧科)도 선종과 교종에서 각각 치러졌다.

동궐도(東闕圖), 조선 후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조선 시대 도화서 화원들이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과 전경을 그린 궁궐 그림이다.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궁궐의 전각과 다리·담장은 물론 괴석 등 조경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했다.

 

단절 없이 계승된 불교 전통

1910년대 시작된 조선 불교에 관한 연구는 고려와 조선을 단절된 시기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 결과 ‘유불 교체와 숭유억불에 따른 불교의 급격한 쇠퇴’라는 도식이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르며, 정치이념과 시대사조를 유교가 주도한 조선 시대에도 불교 전통은 계승됐다. 심성과 가치관, 신앙과 관습을 포괄하는 불교 전통의 오랜 유산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무게였다.

조선이 세워지고 100년이 지난 15세기 말까지도 불교는 굳건한 기반을 가진 주류 전통이었다. 사유와 관념, 신앙과 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크나큰 지분을 가지고 있던 불교가 조선 개국과 함께 신기루처럼 갑자기 사라졌을 리 없다. 무엇보다 삶의 희망과 위안을 얻고 죽음의 두려움을 해소하는 종교적 구원의 길은 기존처럼 불교의 이정표를 따라야 찾아갈 수 있었다. 고려에서 행해지던 불교 신앙이나 사십구재와 같은 대부분의 재회(齋會, 음식을 차려 여러 승려와 모든 넋을 공양하는 법회)도 국가 의례를 제외하고는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우란분경』을 근거로 부모와 조상의 명복을 빌고 천도하는 의식인 우란분재(盂蘭盆齋)는 7월 15일 백중에 사찰과 거리에서 세시풍속으로 거행됐다. 물과 뭍의 모든 혼령을 위로하는 수륙재는 고려 말 왕실 상장례에 포함됐고, 조선 태조는 이를 국행 수륙재로 설행했다. 조선의 공식 법전인 『경국대전』에 수록된 유일한 불교 의례가 바로 이 수륙재다. 이 밖에 4월 8일 연등회, 12월 8일 관불 등도 연례행사로 치러졌다.

성종 대에 예조판서를 지낸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15세기 시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태종 때에 불교 종파를 개혁하고 사사전을 혁파했지만, 불교의 유풍이 끊이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친속을 위해 재를 올리고 빈당(殯堂)에서 법회를 설하기도 하며, 기제(忌祭)를 행할 때 승려를 맞이해 음식을 공양했다. 승려와 관리들이 시를 화답하는 일도 많았고 유생들은 대개 절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 유학자와 승려가 교류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세조 때에 극에 달했다. 성균관 유생 가운데 부처의 사리에 은총을 구하는 이가 있었는데도 사림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처럼 불교 신앙과 의례는 왕실과 서민은 물론 일부 사대부 가문에서도 관습이자 전통으로 이어졌다. 원당(願堂)을 비롯한 왕실불교의 특수한 행태는 조선 말까지 지속했고, 국왕은 왕실과 유학자 관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불교식 재회가 공식 국가 의례에서 점차 배제되고 유교식 상·장례가 권장됐음에도, 정토왕생과 내세의 명복을 비는 불교의 사후 관념과 기원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했다. 결국, 여말선초 시기는 유불 교체의 전환기로서 변화와 단절도 생겨났지만, 불교의 관념과 사유, 신앙이 이어져 새로운 전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근대기의 한 일본인 학자는 조선 역사에 유교와 함께 불교가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유생과 관료는 유교, 왕실에서 서민까지는 불교에 의해 지배됐다고 평가했다. 최남선 또한 유교와 불교가 조선 전통의 주축을 이루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서민의 정신생활과 사회의 심령적 발전에서 불교가 유교보다 더 많은 역할을 했고, 불교의 사회적 세력과 문화적 영향력도 매우 컸다고 보았다. 이처럼 불교는 고려의 유산에만 머물지 않고 조선의 내적 전통으로 승화되며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이어져 왔다. 

 

김용태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및 한문불전번역학과 교수로 역임 중이다. 주전공인 조선시대 불교를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바라보려고 하며, 근대 불교에도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 불교사상사: 유교의 시대를 가로지른 불교적 사유의 지형』, 『토픽 한국불교사』, 『韓國佛敎史』,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