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품은 신령스러운 땅 그리고 절

2021-10-07     최호승
설악산 봉정암.

“한국의 영지(靈地, 신령스러운 땅)는 기운도 좋지만 그 풍광 또한 일품이다. 아름다운 풍광은 그 자체로 사람을 치유하고 달래주는 효과가 있다.” - 조용헌, 『조용헌의 영지순례』 중에서

신령스러운 땅, 영지(靈地)는 명당(明堂)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는 “명(明)은 밝음이다. 파자하면 태양과 달이며, 아침과 저녁, 따듯함과 차가움, 열정이자 이성”이라며 “음과 양이 조화로운 곳에서 특별한 에너지가 솟는다”라고 했다. 코로나19로 답답하고 우울한 이에게 긍정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다. 이번엔 영지다. 불광미디어가 ‘영지, 기운 솟는 절’을 2022년 새해 달력에 담았다. 전국 명산과 그 산에 깃든 산사의 사계절을 불교 전문 사진가 유동영 작가가 오랜 기다림으로 포착했다.

희양산 봉암사.

| 봄, 조계산·희양산·청량산
만물의 기운이 생동하는 봄의 정취는 조계산과 희양산, 청량산에서 찾았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조계산의 계곡은 울창한 수림과 비룡폭포 그리고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사찰인 송광사가 자리한 산으로 유명하다. 임금의 스승인 국사가 16명이나 나온 영지다. 송광사 일원에는 여러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 절경을 이룬다.

1년에 딱 한 번 산문을 여는 조계종 종립특별선원 봉암사. 부처님오신날 외에는 출입을 철저히 금하는 도량으로 백두대간 단전 자리에 있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 희양산 자락에 있다.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 국사는 이곳을 돌아본 뒤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며 봉암사를 일으켰다. 지금도 봉암사는 일대사를 해결하고자 가부좌를 튼 수좌스님들의 구도 열정으로 가득하다.

청량산은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작은 금강산’이라는 소금강으로 불린 명산이다.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 통일신라 서예가 서성 김생이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진 김생굴,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 등 예부터 예사롭지 않은 산이었다. 이 산에 연꽃잎 같은 열두 바위 봉우리가 둥글게 펼쳐져 있고, 그 꽃술 부분에 청량사가 자리했다. 영화 <워낭소리>의 최 노인이 천도재를 올린 청량사, 청량사에서 바라본 청량산의 봄 끝자락 밤 풍경은 무명 속 광명을 밝히는 봉축 분위기가 생동한다.

북한산 문수사.

| 여름, 계룡산·두륜산·북한산
“계룡산은 남쪽으로 바위 맥이 흘러왔고, 그 바위 맥의 정상에 연천봉(連天峰)이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뜻이다. 이 연천봉 바로 밑에 등운암이 자리 잡았다. 등운암이 영험한 이유는 암자 밑바닥과 주변 봉우리가 온통 바위고, 앞산 여러 봉우리가 등운암을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 조용헌, 『조용헌의 영지순례』 중에서

녹음방초(綠陰芳草, 우거진 나무 그늘과 싱그러운 풀)의 계절 여름, 녹음 짙은 계룡산은 풍수지리에서도 손꼽히는 4대 명산이다. 갑사·동학사·신원사 등 유서 깊은 산사가 있다. 이 가운데 등운암이 있다. 부설(浮雪) 거사의 아들 등운이 창건한 암자다. 등운암은 연천봉에 새겨진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이라는 글씨로도 유명세를 탔다. 조선이 망하고 정 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얘기로 『정감록』 예언의 구실이 되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정 씨의 기운을 누르고자, 등운암 이름을 ‘누를 압(壓)’, ‘정씨 정(鄭)’, ‘절 사(寺)’ 압정사로 고치기도 했다고 한다.

자기 품에 안은 산사 이름을 따라간 산도 있다. 두륜산이다. 대둔사(大芚寺) 이름을 따서 대둔산이라고 했다. 대둔사가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자 대흥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흥사는 서산 대사가 터를 살핀 도량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서산 대사는 향로봉, 노승봉 등 두륜산 8개 봉우리에 안긴 대흥사를 천혜의 요새로 여겼을지 모른다. 이렇게 예언했다. “전쟁과 화재를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三災不入之處],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다.” 그래서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속 동막골 같은 공간이 바로 대흥사다.

두말하면 입 아픈 북한산은 예부터 명산으로 일명 한산, 삼각산(三角山) 또는 화산으로 불렸다. 개성의 송도에서 한양으로 오다가 이 산을 보면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으로 불렀다. 무학 대사가 이성계를 위해 도읍지를 정할 때 이 산에 올라 한양을 추천했다. 이 산 문수봉을 뒤에 두고 동쪽에 보현봉, 서쪽에 비봉을 앉힌 산사 문수사가 있다. 고려예종(1109) 때 구산선문 중 굴산파 중흥조 탄연(1070~1159) 국사가 산문을 열었다. 고려 의종이 친히 참배했으며 조선조 문종도 이곳을 찾았다. 박문수 어사 부친이 이곳에서 기도해 문수를 얻었다는 말도 전한다.

백양산 운문암과 약사암.

| 가을, 설악산·지리산·백양산
한라산, 지리산 다음으로 세 번째로 높은 산 설악산. 옥색빛 계곡 물빛, 단풍의 향연 등 빼어난 경관 만큼 산세 험하기로 유명한 명산이다. 백담사, 오세암, 신흥사 등 이름난 산사도 많다. 그중에서도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봉정암이 있다.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에 오르는 길목에 있는 암자로 해발 1,244m 지점에 자리했다. 백담사에서 대청봉으로 향하는 내설악 최고 절경 안에 있는 봉정암은 숨이 넘어갈 듯한 구간 몇 개를 넘어야 다다른다. 전생에 인연 닿지 않으면 참배하기 어렵다는 봉정암 그곳에는 불뇌사리보탑이 있다.

민족의 영산이자 어머니의 산인 지리산에도 쌍계사, 화엄사, 실상사, 법계사, 천은사 등 여러 산사가 있다. 발길 닿기 어려운 ‘길이 감춘 암자’ 황금지붕 묘향대가 여기 있다. 묘향(妙香)은 『아함경』에 나온다. 계를 잘 지켜 공덕 쌓아 남에게 공경심을 일으키는 계향(戒香), 말을 향기 맡듯 귀담아듣는 문향(聞香), 나눔의 향 시향(施香)이다. 그래서인지 불교와 도교를 넘나들며 『정본능엄경』을 쓴 개운 조사가 수행했던 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성삼재 주차장에서 꼬박 4시간 이상을 걸어야 찾을 수 있다.

늦가을의 정취는 단연 백양산이다. 이 중에서도 운문암에서 바라보는 백양산 가을 풍광은 압권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는 “우리나라에서 공부하기 좋은 이름난 수행터로 금강산 마하연, 백양사 운문암을 양대 도량으로 꼽았다”라고 했다. 운문암 앞에는 무등산, 조계산, 모후산, 백운산이 펼쳐져 있을 정도로 명당이자 영지다. 그래서 선기도 가득하다. 조선의 벽송, 정관, 백파 스님에 이어 근대의 학명, 용성, 석전, 서옹 스님 등이 주석했다. 호남에서 부처의 화신으로 추앙했던 진묵 대사도 인연이 깊다. ‘운문암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를 면한다’라는 말도 나온다.

오대산 북대.

| 겨울, 선운산·오대산·무등산
고창에도 산사 이름 따라 바꾼 산이 있다. 선운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도솔산(兜率山)이라 했지만,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불린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큼 계곡미가 빼어나고 숲이 울창하다. 울창한 숲 때문인지, 미래불인 미륵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간절함 때문인지, 이 산에는 비밀이 있다. 지장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도솔암 마애미륵불 이야기다. 마애불에는 큰 복장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을 두고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설이 내려온다. 1890년 전라감사가 책 한 권을 꺼냈는데 천둥소리에 놀라 도로 넣어두고 봉했는데, 이후 동학교도들 사이에서는 세상을 개혁할 비책이 적힌 책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892년 동학교도 손화중이 복장물을 꺼냈다는 말도 전한다.

“산이 높고 크며 골짜기가 깊어 산 기운이 최대로 쌓인 것이 다섯 개이므로 오대라고 부른다. 최북단은 상왕산인데 산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정상은 비로봉이다. 그 동쪽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가 북대인데 감로정이 있다. 비로봉 남쪽이 지로봉이고, 지로봉 위가 중대인데 산이 깊고 기운이 맑아 조수가 살지 않는다.”
- 미수 허목의 ‘오대산기’ 가운데

묵객들이 붓끝 먹으로 기록했던 오대산은 5만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문수성지다.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이 있지만, 상왕봉 중턱의 오대산 북대 미륵암도 예 있다. 해발 1,300m가 넘는 지대에 울창한 숲으로 한국 최대 자생화의 보고(寶庫)다. 특히 봄이면 눈 속을 뚫고 나오는 복수초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미륵암에는 1996년 하안거 결제 전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의 고행상을 본떠 만든 불상이 봉안됐었지만, 2010년 북대선원이 문을 닫으면서 미륵불을 봉안했다.

이 상서로운 돌산은 원효봉, 의상봉 등 산 구석구석이 불교다. 무등산의 별칭은 무돌뫼(무진악)인데, 무돌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이다. 서석산이라는 이름은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으로 서석대와 관련해 붙은 별칭이고, 무당산이라는 별칭은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의미다. 이 호남의 명산 무등산 동쪽 950m 높이 광석대 지대에는 규봉암이 자리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그의 제자인 진각 그리고 지공과 나옹 스님이 규봉암에 자취를 남겼다.

이 모든 영지의 명산과 절을 렌즈에 담은 유동영 사진작가는 이렇게 평했다.

“높고 거친 히말라야는 우리 산의 수백 배 크기임에도 겨우 몇 명조차도 품지 못하고 쫓아내지만, 나지막한 야산이라도 우리 땅은 수많은 생명을 품는다. 아무리 장엄하고 경이로운 곳이라 하더라도 생명을 살릴 물을 품지 않은 곳은 영지라 할 수 없다. 천 년이 넘도록 한자리를 지키는 스님들과 절이 없어도 영지라 할 수 없다. 수행자는 깊은 산속 영지의 화룡점정이다.”

한편 달력은 사이즈별로 대(30.5cmX30.5cm), 중(25.5cmX25.5cm), 미니(9.6cmX10cm) 그리고 탁상용(26cmX19cm) 총 4종이 출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