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삼모사(朝三暮四)와 소크라테스
강의를 많이 하다보니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
세 개와 네 개의 차이
새로운 책을 준비하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가끔 페이스북에 공유한다. 공개된 장소에서 메모하면 생각을 객관화하고 독자의 반응을 미리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우리는 대체로 풍부한 어휘력, 능숙한 문장, 멋진 표현, 정확한 문법으로 글을 쓰면 좋은 글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것들은 한편의 글을 만드는 기본 요소일 뿐입니다. 잘 썼다는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글을 통해 전하려고 하는 내용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입니다. 한마디로 구성, 더 나아가 전략적 설계의 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전략적 설계가 들어 있다면 기본 요소가 허술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만, 그게 없다면 기본 요소가 아무리 탁월해도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400개가 넘는 ‘좋아요’가 눌러졌고 댓글 반응도 뜨거웠다. 그 가운데 방송사 PD를 하는 후배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글쓰기처럼 영상 콘텐츠도 구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쩌면 구성이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메시지를 전하는 다큐는 씬의 배열과 강약 선택이 소구력(광고 등이 시청자의 사고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핵심입니다. 이를 결정하는 기준은 기획 의도이고요.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그 다음에 소재의 선택과 배치가 이뤄집니다. 조삼모사는 콘텐츠에서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조삼모사’에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송나라 저공은 원숭이에게 줄 도토리의 총량을 더 이상 늘릴 수 없는 조건에서 놀라운 전달 전략을 구사한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던 것을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로 바꿔 원숭이의 불만을 잠재운다. 세상일은 도토리 일곱 개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한 이슈가 될 때도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어보면 소크라테스가 살기 위해 변론한 것일까, 죽기 위해 변론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
변론의 시작은 당연히 살기 위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살기 위해선 배심원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러자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진실한 내용과 설득력 있는 전달방식. 소크라테스는 이 가운데 후자를 처음부터 제쳐둔다. 자신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지 ‘말하는 데 능란한 사람’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앞으로 어떤 내용,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변론을 펼쳐갈지 분명하게 밝힌다.
“미사여구로 멋들어지게 꾸미거나 질서 있게 배열한 말이 아니라, 그저 단어가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하는 말을 나한테서 듣게 될 겁니다. 내가 말하는 것들이 정의롭다고 믿으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연설 전체에서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 고발의 부당성을 다각도로 입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고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소크라테스는 땅 아래의 일들과 하늘의 일을 탐구하고 더 약한 논변을 더 강하게 만들며, 다른 사람들에게 바로 이것들을 가르침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고 주제넘은 일을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망치고,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고발이 자신에 대한 미움과 비방의 결과라고 항변한다. 자신이 미움과 비방을 받게 된 까닭은 예언자, 신탁 전달자, 시인, 수공 기술자의 무지를 드러내고 지적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들의 미움은 가혹하고 비방은 지독했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항변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존재가 ‘아테네라는 크고 혈통이 좋지만 큰 덩치 때문에 꽤 굼뜬 말[馬]’을 일깨우는 ‘등에’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입증할 증인은 가난이다. 소크라테스는 등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은 물론 집안일도 돌보지 않았고 그 결과 가난하게 됐는데, 이 가난이야말로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는 증인이라고 내세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배심원의 유무죄 투표 결과는 280대 220으로 사형 찬성.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내용의 진실성 여부와 별개로 왜 현실에서 실패한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변론에서 “가능한 많은 동정을 사기 위해 자식과 다른 많은 집안 사람과 친구를 올라오게 해서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재판관들에게 간청하고 탄원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국가 전체에도 명성과 관련해서 아름답지 못한 일이라 평가한다. 더 나아가 재판관에게 간청해서 죄를 벗는 것도 정의롭지 않으며, 오히려 가르치며 설득하는 것이 더 정의롭다고 역설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등에’의 역할을 자처하며 첫 번째 연설을 마친다.
첫 번째 연설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노선은 분명하다. 진실을 드러냈기 때문에 진실을 수용하는 것은 재판관과 배심원의 몫일 뿐, 진실이 수용되기 위해 그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사여구로 멋들어지게 꾸미거나 질서 있게 배열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결국 사형 판결로 귀결된다.
유죄와 무죄의 표차이는 불과 60표(12%). “나는 이렇게 근소한 표차가 아니라 큰 표차가 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30표만 바뀌었다 해도 내가 죄를 벗을 수 있었을 것 같네요.” 소크라테스의 말 속엔 최악의 결과를 피한 안도감과 함께, 무죄 판결도 가능했다는 일말의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소크라테스는 대안 형량을 제시하는 두 번째 연설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그것은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첫 번째 연설과 차원이 다르다. 배심원의 성향을 파악했고 ‘감정에 호소하는 노력’과 ‘질서 있게 배열한 말’을 한다면 유죄와 무죄를 뒤바꾸진 못해도 사형을 면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후 아닌가? 안타깝게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연설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의 노선을 고집한다. 게다가 배심원들의 판결이 부당하다고까지 지적한다. 그 결과 360대 140으로 표차(220표, 44%)는 더 벌어지고 마침내 사형이 확정된다.
질서 있게 말을 배열하는 일
어찌 보면 소크라테스는 처음부터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죽음을 통해 자신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은 미움과 비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아테네 시민의 무지를 일깨우는 ‘등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감정에 호소하는 노력’과 ‘질서 있게 배열한 말’을 배제하고 사형을 언도 받은 것은 가치적 판단이라기보다 전략적 판단일 수 있다. 처음엔 가치적 판단이었다가 나중에 전략적 판단으로 바뀌었을 수 있다. 사형을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위해 사형을 더 의미 있게 활용하기로 마음먹었을지 모르겠다. 빌라도가 죽음을 면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것을 받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노력’이라고 뭉뚱그려 말했지만 ①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재판관들에게 간청하고 탄원하는 일 ②미사여구로 멋들어지게 꾸미는 일 ③질서 있게 말을 배열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①과 ②는 소크라테스의 노선과 함께 가기 어렵겠지만 ③은 같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가 ‘단어가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말하지 말고 ③의 노력을 더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진실한 내용에 설득력 있는 전달방식이라는 전략을 장착했다면 적어도 ‘사형’은 면하지 않았을까?
필자가 글쓰기 강의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내용의 선별과 배열, 즉 구성과 전략적 표현이다. 삶의 내용처럼 글의 내용이 달라지긴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는 전략은 배우고 노력하면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죽음으로 시민의 무지를 일깨우는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으니, 무엇보다 조삼모사의 방법을 배우는 일이 절실하고 긴요하다.
백승권
글쓰기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로 업무용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