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예산 추사고택
이번 달부터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한 노승대 작가의 문화탐방기 ‘지안의 문화이야기’를 매주 목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휴일을 이용해 충남 예산으로 간다. 수덕사가 유명하지만 대학자의 고택으로 가본다.
조선시대 후기의 최고 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추사 김정희를 꼽을 것이다.
그는 연경을 다녀온 후 옹방강,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과거도 뒤로 미룬 채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 금석고증학, 훈고학, 실학, 불교학 등 다양한 학문에 통달하고 글씨에서도 대가를 이루었다.
서화론에서도 어느 누구에게나 뒤지지 않았다. 부단히 연경의 스승이나 학예의 벗들과 교유하며 독보적 경지에 올랐다. 스스로 북한산 비봉에 2번이나 오르며 그 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고 경주의 무장사비 파편을 몸소 찾아내기도 하고 경주의 인공 조산이 신라왕릉임을 논증했다. 금석고증을 현장에서 실천한 학자였던 것이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로, 집안 할머니뻘인 정순왕후가 영조의 계비로 간택됨에 따라 해미 한다리 경주 김씨가문은 왕실의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크게 성장했다.
추사는 이런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총명함과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기량도 갖추어 국제적인 학자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안동 김씨 세도가문에 밀려 부친 김노경이 유배되고 자신도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서서히 가문의 쇠락이 찾아온다.
추사가 위대한 것은 바로 그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더 갈고 닦아 스승 옹방강이 흠모했던 소동파의 삶을 뒤쫓으며 더 한층 높은 인품과 학덕을 갖추었다는 데 있다.
소동파도 황주에서 6년, 해남도에서 7년 유배를 당했지만 항상 낙천적으로 살았다. 또한 그는 불교에도 정통할 뿐 아니라 스스로 오도송을 남긴 인물이었다.
추사는 만년에 봉은사를 오가며 살았고 죽기 3일 전에 썼다는 <판전>글씨를 봉은사에 남기고 있다.
추사가 태어난 추사고택이 예산에 있고 고조부 김흥경부터 추사의 묘까지는 추사고택 인근에 있다. 추사 부친 김노경의 묘만 과천 옥녀봉 기슭에 있었으나 실전(失傳, 묘지나 고적 따위에 관련되어 전해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되었다.
김한신이 부친 김흥경과 선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화암사는 추사가 학문을 연구하고 불교를 궁구한 사찰로 추사 관련 암각글씨가 여럿 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동생들과 함께 화암사를 중수하며 상량문도 지어 보내고 시경루, 무량수각 현판도 써서 보냈으나 이 현판들은 지금 수덕사 박물관에 있다.
고조부 김흥경의 묘로 앞의 백송은 추사가 연경에 갔을 때 구해다 심은 것이다.영조의 사위 김한신의 월성위궁에도 백송이 한 그루 있었기 때문이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과 화순옹주 합장묘 옆의 재실이다. 두 부부는 13살 동갑내기로 결혼했으나 김한신이 병으로 39세로 죽었다. 아이도 없었다.
26년을 사이좋게 지내다 남편이 죽자 화순옹주는 따라 죽기로 결심하고 굶기 시작, 영조의 만류에도 14일 만에 죽고 말았다. 정조가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내렸다.
대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시는 재실과 부속건물이 타버려서 주초석들만 남아 있다. 그래도 왕실 관련 건물이라 담장으로 두른 터가 무척 넓은 편이다.
김한신 부부 합장묘. 두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어진 부마와 착한 옹주가 죽었다고 슬퍼했다. 추사의 조부 김이주가 대를 이어 봉사손이 되었다.
합장묘의 비석 앞면 글씨는 영조대왕이 썼고 비문은 당시의 문사 유척기가 지었으며 글씨는 봉사손 김이주가 썼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실 유일한 열녀였다.
합장묘 앞 문관석.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가 됨으로써 명예직 외에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또한 첩실도 둘 수 없었고 재혼도 금지였다. 법이 그랬다.
추사의 묘. 추사의 묘는 과천 아버지 묘 근처에 있었으나 후에 이장하여 첫 부인 한산 이씨, 둘째 부인 예안 이씨와 함께 합장했다.
추사고택 사랑채. 'ㄱ'자 건물로 앞쪽에는 툇마루로 마감했다. 추사고택은 충청도 53군현에서 1칸씩 부조하여 총 53칸으로 지었다고 한다.
해시계용 돌기둥이다. 상단에 해 그림자를 가늠하는 철침이 빠졌다. 추사 생존 시에 만들었다고 하며 '石年(석년)' 글씨는 추사의 서자 상우가 썼다.
70년대 황폐해진 추사고택이다. 마당은 밭이 됐고 해시계 돌기둥엔 소가 매여 있었다고 한다. 추사의 후손이 끊어져 남의 손에 넘어갔었다.
추사고택의 안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었던 내외 담장이 사라져 버려서 어딘가 휑한 느낌이다. 행랑채 고방채도 없어졌지만 대문만 간단히 복원했다.
안채는 충청도 지방에서 귀한 'ㅁ'자 구조다. 영조가 집과 땅을 하사했을 때 한양의 장인들이 내려와 집을 지었기 때문이라 한다.
추사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는 추사영실이다. 추사가 죽은 뒤 양자 상무가 지었으며 평생의 절친 이재 권돈인이 편액을 썼다. 상우는 서자였기 때문이다.
추사는 24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전하는데 우물이 말랐다가 다시 솟았다 한다. 동생 명희는 18개월, 상희는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화암사 정면 풍경이다. 양반가옥처럼 사랑채가 전면에 자리 잡은 모습이다. 돌출된 누마루가 있고 왼쪽에서 두 번째 칸에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대웅전 뒤 병풍바위다. 옛날에는 5층탑이 앞쪽에 있어 법당도 바위 가까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석탑은 대웅전 옆으로 옮겨 놓았다.
옹방강은 탁본해 놓았던 육방옹의 글씨를 추사에게 주었다. 시경(詩境)은 시의 경계, 즉 시를 읊을만한 풍취라는 뜻으로 시문과 글씨에 대한 추사의 의지가 보인다.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은 천축(인도)의 옛선생 집이니 곧 부처님 집이라는 뜻이다. 옛시에 소동파를 천축고선생이라 했으니 추사의 뜻을 짐작하겠다.
병풍바위 남쪽 360여m 지점의 쉰질바위에도 小蓬萊(소봉래) 각자가 있다. 옹방강 대문 앞 돌기둥에 蓬萊(봉래) 각자가 있어 자신을 낮추어 소봉래라 했다.
사진. 노승대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