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산, 소박한 절집에서 느끼는 온정
바라밀 국토를 찾아서, 아산시
백제의 유물 가운데 유명한 산수문전(山水紋塼)은 백제땅의 산세와 물줄기를 사실적으로 그 려내고 있다. 산수문전에서의 산은 위압적이거나 외경스럽게 보이기 보다는 봉긋봉긋한 모 양이 친근감에 가깝다. 평택을 지나 천안에 다다르면 왼편에 우뚝하게 솟은 성거산은 높진 않아도 이 인근에서 태백의 험한 산줄기들을 빼어 닮은 마지막 산이 아닐까 싶다. 그 아래 로 다시 내리 뻗어 호서를 다시 영동, 영서로 가르는 금북정맥의 광덕산이나 칠갑산, 오서 산, 성주산들은 이미 그 산아래 대대로 자연과 부대끼며 살고 있는 민초들의 순박한 생활에 서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진다.
이 달에 찾은 아산은 그 친근한 산줄기, 산수문전의 산들처럼 봉긋봉긋한 금북정맥 북쪽에 위치한 고장이다. 마곡사나 광덕사를 품고 있는 금북정맥의 산세가 아산만의 넓은 바다로 비탈져 흐르는 곳이다. 천안처럼 육로에 있어 요지도 아니요, 홍성이나 서산처럼 바닷길의 출발점도 아닌 아신이어서 자칫 역사 속에서 그리 큰 의미가 남지 않을 뻔했지만 월인(月印)이 찍히지 않는 강이 없듯 바라밀의 인연은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깊다.
아산은 무엇보다 온천으로 이름높다. 아산이 포함하고 있는 도시 온양은 오랫동안 우리 나 라 온천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으나 그 역사가 아득히 백제시대까지로 올라간다. 즉, 백제 시대 이곳의 지명은 '탕정(湯井)'이었다. '탕(湯)'이란 뜨거운 물을 뜻하는 한자요, '정(井)' 은 우물이 아닌가? 이 탕정이 처음 발견된 것도 불교와 이 땅 무지랭이 신심의 만남에서 비 롯된다.
이 지방에 살던 한 절름발이 노파가 있었다. 이 노파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과년토록 장가를 보내지 못했다. 어미가 절름발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노파는 가까운 절을 찾아가서 부 처님께 아들을 장가보내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 타나 "내일 마을 앞 들판에 나가서 학이 노는 모양을 잘 보라."고 알려 주었다. 노파가 다음 날 들판에 나가보니 과연 절름발이 학 한 마리가 나타나서 물에 발을 담그고 사흘 동안 서 있더니 사흘 되던 날 다리를 고쳐 날아가 버렸다. 노파가 그곳에 가보니 땅 가운데서 뜨거 운 물이 솟고 있었다. 이 불심 깊은 노파의 다리도 나았음은 물론이다.
지난 해 시군통합정책으로 온양시와 아산군이 아산시로 합쳐지기 훨씬 전부터 이곳은 온주 군과 신창군으로 나뉘었었다. 지금의 온양시 중심부가 온천의 개발로 인한 신도시라면 옛 온주군의 중심부는 지금 온주아문이 남아 있는 남동쪽 2Km 외곽이다. 또한 신창군의 중심 은 현재 순천향대학교가 들어선 신창면 읍내리 일대라고 한다.
먼저 옛 온주군 일대의 불적을 돌아 보자. 온주아문 앞의 당간지주(보물 537호)는 별다른 치 장이 없는 단순한 것으로 높이가 약 3미터에 달한다. 우뚝하게 솟은 모양이 당당하게 보여 여기 큰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지만 지금은 그 절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나 역사를 찾을 수가 없다.
온양 시가지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왼편 철둑길을 넘어 유구, 공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배방면에서 신창으로 질러가는 요즘 새로 포장된 길과 만나게 되는데 온양을 들르지 않고 가려면 배방면에서 바로 들어 올 수도 있다. 이 두 길이 합쳐진 지점에서 유구쪽으로 더 가다보면 나오는 동네가 송악면이다. 이 송악면에는 수려한 산세와 수량 풍부한 계곡 때 문에 아산의 오랜 고찰이 거의 다 모여 있다. 가면서 만나는 순서대로 용담사, 용화사, 봉곡 사, 강당사가 그 절들이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의 모롱이를 돌면 어김없이 소박하게 자리잡 고 있어 큰산의 대찰에서 느낄 수 없는 친근감이 느껴지는 절들이다.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용담사에서는 장륙상으로 모셔진 고려시대의 석조약사여래부처님(보물 526호)의 당당한 모습이 찾아오는 이를 반긴다. 높이가 5.5미터에 달하고 하체가 길어서 현 대적인 안목으로 볼 때도 훤칠한 미남형이다. 일찍이 폐사가 되었던 절을 일제시대 때 한 보살이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이후 보살의 아들이 출가해서 이곳에 살게 되면서 절 이름을 용담사라 하고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효 스님이 창건주라고 하나 원효 스님의 수행처가 대개 토굴이나 띠집 수준에 머물렀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원효 스님의 수행처에 후대(신라 애장왕대)에 다른 스님이 창건했다는 설이 타당할 듯 싶다. 기록상으로는 고려 광종 연간에 혜명(慧明) 스님이 중창했다고 전하는 데 약사여래불도 이때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용담사에서 걸어서도 10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용화사가 있다. 용화사에도 고려시대 돌로 조성된 부처님이 한 분 모셔져 있는데 호서와 호남 인근에서 볼 수 있는 마을미륵처럼 친근하고 소탈한 상호이다.
봉곡사는 인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찾아오지만 전국적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절 이다. 887년(전성여왕1)에 도선 국사가 창건하고 봉수산(鳳首山) 석가암이라 명명했으며 보 조국사 지눌이 1170년 중창했다고 한다. 1419년에는 조선 초기의 명승 함허득통 스님이 다 시 중건하면서 사격이 가장 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수차례 중수와 중창을 거듭했 는데 구한말 만공 스님이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고도 전한다.
이곳도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는 아니지만 도선 국사께서 창건한 절로서 산세와 어우러진 호 젓한 분위기가 호서의 어느 절에 비해 빠지지 않는다. 유구쪽으로 넘나드는 길에서 약 30분 걸어 오르다 보면 점점 산에 안겨드는 맛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쳐든 품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산이름, 절이름이 모두 봉수산이요, 봉곡사다. 길 끝에서 우러러 보이는 현대적인 모양의 탑이 만공 스님의 깨달음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탑이다. 여기서 오른쪽으 로 난 다리를 건너면 한눈에 단촐한 절살림이 드러나 보인다. 대웅전(문화재자료323호)과 향 각전, 산신각의 독립건물과 입구(口)자 모양으로 건립된 요사채가 전부다.
대웅전에는 목조여래좌상과 문수, 보현의 협시가 모셔져 있다. 이 가운데 목조문수보살좌상 에서는 세종 30년(1448년) 간행된 묘법연화경 5권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종 4년 (1867)에 제작 된 영산회상도와 지장탱화(문화재자료242호)도 이 대웅전 안에 걸려 있는데 근대에까지 활발히 활동했던 마곡사 금어들의 솜씨로 보인다.
요사채는 휘어진 나무 부재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이 고장 절집 특유의 멋스러움이 아 주 잘 나타난다. 특히 밖에서 볼 때 지붕이 높아 보이는데 귀틀 위에 마루로 된 고방(庫房) 이 있는 2층 건물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현재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봉 곡사의 자랑거리로 내세울 만하다.
온양시에서 현충사쪽으로 다리를 건너서 바로 당진으로 향하는 왼편길로 접어들어 10여리를 가면 오른편으로 산양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마을로 들어가 골짜기 깊은 곳으로만 향하다 보면 그 끝에서 만나게 되는 절이 세심사(洗心寺)다. 백제 때 창건했다는 얘기만 전해오지만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고 뒤에 자장율사가 중건했다고 전한다.
1968년에 현재 조계종 전계대화상이신 일타 스님과 해인사 도견 스님께서 절입구 부도에 새 겨진 '세심당'에서 이름을 따 세심사라고 명명함으로써 오늘날까지 그 이름으로 불린다.
이 절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가 남아 있는데 모두 근래에 지어진 걳 이고 애웅전 안에 모셔진 철조아미타여래좌상과 대웅전 앞뜰의 9층석탑만이 유물로 전해 내 려오고 있다.
철조아미타여래좌상은 1.2미터 높이의 육중한 모습으로 말끔히 금니를 새로 해 입으셨다. 철 불 특유의 다부지고 당당한 느낌이지만 자연스런 수인이나 상호에서 자비로움이 저절로 우 러나온다.
앞뜰의 9층석탑은 도 문화재자료 231호로 지정되었는데 공식명칭은 세심사다.
원래 기단부만 남아 몇 층 탑인지 모르던 것을 지금의 주지스님께서 성주산 남포오석(南浦烏石)으로 다시 탑신부를 조성하여 9층의 훤출한 모습이 되었다. 뒤에 조성한 모습이 조금 도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으니 원래 9층탑이었다고 해도 그대로 넘어갈 만큼 자연스러워 보 인다. 한편 이 절에는 판각연대를 알 수 없는 부모은중경판 13매가 보관되어 있고 3기의 부 도와 신중탱화도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이름이 신심사(神心寺)로 나와 있어 적어도 조선후가까지만 해도 이 자방의 신심깊은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산에서는 이밖에도 신창 읍내리의 인취사(仁翠寺)나 송악 광덕산의 강당사(講堂寺)등 옛 절들이 남아 있다. 단순히 소비성 짙은 온천관광지라고만 생각하고 들러보길 꺼려왔다면 한 번쯤 가벼운 마음으로 들러볼 만한 가까운 거리이다. 동네 뒷산 같이 친근감 느껴지는 산, 그 안에 숨겨진 듯 남아있는 절집과 돌부처님들... 거기다 이름 없는 절름발이 노파의 간절 한 신심이 유래로 남아 있는 가장 유서 깊은 온천, 그 속에서 여지껏 명산대찰에서 느껴볼 수 없었던 또 다른 감동이 여울지고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